골목골목까지 물길이 이어진 미로 같은 도시 베니스에서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았다. 계절이 바뀌는 의미심장한 기간 중 베니스 근교의 작은 섬 리도는, 매년 열리는 영화축제로 술렁거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인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올해로 62살이 되었다. 관객은 애타게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매고 있고, 하이에나 같은 언론은 톱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잡느라 치열하다. 그 축제 속에서 객관적으로 뭔가를 예측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전세계 그 누구보다 일찍 새 영화를 접한 전세계의 언론들은 프레스룸에 모여 조심스럽게 영화를 소개하거나, 자신이 보고 들은 소식을 고국으로 타전한다. 한정된 정보를 접하며 허겁지겁 영화를 보다보니 어느새 영화제가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좀더 정직해지는 방법으로, 영화제의 중간까지를 일주일간의 일기로 구성했다. 제62회 베니스영화제는 오는 9월10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기 전에 막을 내릴 것이다.
9월1일 목요일
조지 클루니에겐 행운이 있나니
서극의 <칠검>으로 포문을 연 영화제가 정상 궤도에 오르는 첫날이다. 영화제 초반의 분위기를 장악한 것은 조지 클루니의 <굿 나이트 앤드 굿 럭>(경쟁부문)이다. 1953년 매카시 광풍에 맞서 미국의 진정한 가치인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발언했던 다큐멘터리쇼의 진행자 에드워드 R. 머로(데이비드 스트라태언)와 프로듀서(조지 클루니)의 활약을 그린 영화로, 전날 있었던 기자시사에선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 방송을 진행하던 머로가, 공포를 조장하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을 감행할 때는 영화 중간에 박수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9·11 이후 미국의 현재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키는 장면이었다. 우아한 재즈 선율을 타고 부드러운 흑백화면에 펼쳐지는 영화는 흠잡을 구석이 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머로가 매카시 시대를 종결시키는 과정을 그린 것은 영화적으로 상당히 평이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시대가 지니는 민감함, 미국사회에서 일종의 금기로 남아 있던 소재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영·미권 언론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성공한 톱스타가,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할리우드 스타 모시기에 열을 올리는 베니스는 클루니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있을 것 같다. 클루니는 2002년 첫 영화 <컨페션>을 들고 베니스를 찾은 바 있다. 그의 인기를 절감한 것은 이날 1시에 진행된 공식기자회견. 몰려든 기자들로 인해 영화제쪽은 일간지를 먼저 회견장에 들여보냈다. 중계하는 회견 내용을 받아 적기라도 하기 위해 TV 앞에 벌떼처럼 몰려든 기자들로 회견장 밖은 북새통이었다.
천막극장에서 일반 관객과 함께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마법의 거울>(경쟁부문)을 봤다. 죽기 전에 성모 마리아를 직접 봐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여인 알프레다(레오노르 실베이라)의 여정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진행된다. 올리베이라는 90대에 접어든 1998년, <불안>이 칸영화제에 진출할 무렵부터 주요 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예상이 이어지던 노장. 그런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줄기차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남녀노소를 불문한 팬들이 줄을 이었다. 황급히 변하는 세계, 그 미친 듯한 변화를 강박적으로 따라잡으려는 영화가 가득한 시대에, 언제나 신작이 궁금한 거장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9월2일 금요일
모두 다케시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경쟁부문 깜짝초청작 덕분에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주인공은 기타노 다케시. 1997년의 <하나비>와 2003년 <자토이치>가 황금사자상과 감독상을 받았던 다케시가 이탈리아에 열혈 팬을 다수 확보하고 있고, 지난해에 같은 형식으로 초청된 <빈 집>이 감독상을 수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신작 <다케시들의 것>(경쟁부문) 역시 기대를 가져봄직하다. 그는 철저한 보안과 비밀 유지를 위해 공항에서 행사장까지 차창 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못한 채 납치당하다시피 모셔져왔다. 마르코 뮐러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제 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깜짝초청 방식은 제작사에서 요청한 것으로, 영화제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현지인들은 “기타노!”를 연호하며 <다케시들의 것> 레드카펫 행사를 관전했고, 일반인 대상 시사장에선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자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TV스타 비트 다케시와 예술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로 이중적인 경력을 소유한 감독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의 영어제목은 <Takeshis’>. 그러나 영화제의 공식 홈페이지 및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Takesh’s>라고 소개하고 있다. 문장부호의 달라진 위치에 따라 ‘다케시들의 것’과 ‘다케시의 것’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이러한 오해는 영화의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쿠자로 등장하여 인기를 끌고 있는 TV스타와 광대 분장을 하고 쇼에 출연하거나 연신 오디션을 시도하는 별볼일 없는 배우지망생은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뿐 아니라 외모까지 똑같다. 영화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서, 혹은 스스로에 대해서 꾸는 꿈으로 점철된다. 이것이 한명의 다케시의 꿈인지 아니면 둘 다의 꿈인지는 다소 모호하다. 데라지마 스스무, 교노 고토미 등 다케시 영화에서 익숙하게 등장한 배우와 비현실적인 총격전, 오키나와 해변에서의 즐거운 한때, 탭댄스 등 그의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이 <모두 하고 있습니까>의 막무가내식 전개로 보여지는 영화의 후반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함께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마지막 35분은 부연 같다는 <버라이어티> 데릭 엘리의 리뷰에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다. 영화가 끝난 뒤 자리를 뜨는 관객은, 시작 전의 들뜬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편 <굿 나이트 앤드 굿 럭>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강력한 수상후보로 점쳐지고 있는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경쟁부문)은 서부영화 속 이미지로 익숙한 카우보이의 절절한 사랑을 그린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양을 방목하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에 빠진 에니스 델 마르(히스 레저)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홀)는 각자 가족을 만들고 늙어가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이어간다. 일부 관객이, 그 둘이 사랑을 나누거나 둘의 관계가 다른 가족에게 들통나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리안 감독은 “동성애 역시,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성애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아직 먼 얘기다.
9월3일 토요일
박찬욱 감독, 레드카펫 밟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 없던 태양을, 귀를 찢는 천둥과 하늘을 가르는 번개, 굵은 빗방울이 대신한다. 현지인들은 이 무렵 지나가는 가벼운 비가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저녁 무렵에도 가는 비가 그치지 않았지만, <친절한 금자씨>(경쟁부문)의 레드카펫 행사는 별다른 동요없이 뜨거운 호응 속에 진행됐다. 중국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영애 덕분에 행사장 부근에는 이를 중계하는 <홍콩TV>의 제작진과 꽃다발까지 들고 이영애를 카메라에 담는 중국 관객 또한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전날 이탈리아 최대 규모의 무가지 <메트로>가 <다케시들의 것>과 함께 경쟁부문 최고 기대작으로 언급하는 등 주목을 끌었던 영화. 기자회견장에선 <올드보이>로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위상이 느껴졌다. 아이를 유괴하여 자행하는 폭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폭력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고, 복수 삼부작의 완결편으로서 전작과의 차이점에 대한 문답도 오갔다. 이후 영화제에서 만난 기자 및 일반 관객은 “스타일에 지나치게 치중했다”, “단지 복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테마까지 다루는 훌륭한 영화” 등 저마다 조금씩 다른 평가를 내렸지만, 모두가 박찬욱 감독이 유려한 영화적 화법과 스타일을 지닌 시네아스트임을 강조했다. 공식시사가 끝난 뒤 행사장 부근 엑셀시오르 호텔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파티에는, 단편경쟁부문 진출작 <Happy Birthday>의 홍준원 감독도 참석했다. 이탈리아 영화인으로는 <올드보이>의 이탈리아 배급사이자 <친절한 금자씨>까지 배급하게 될 러키레드의 안드레아 오키핀티를 비롯해서 페사로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 등이 있었다.
누벨바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거장으로 대접받고 있는 필립 가렐의 신작 <평범한 연인들>은 무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68혁명 당시 거리에서 만난 한 그룹의 젊은이들이 혁명 이후 아편을 벗삼으며 미술과 문학 등에 투신한다. 흑백화면 속에 진행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적 일탈과 영화 그 자체에 빠져드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명한 배우 모리스 가렐을 아버지로 둔 필립 가렐은, 영화 속에서 주연을 맡았던 아들 루이스 가렐을 대동하고 나타나 예술적인 가족의 전통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