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창작과 비평, 애증과 공생관계 [2]
1999-12-28
글 : 성지혜 (파리 통신원)
감독집단행동, 비평가 자격시비

프랑스에선 지금

99년을 마감하는 현재 프랑스영화계의 최대 화제는 <리디큘>(Ridicule)의 감독 파트리스 르콩트에 의해 시작된 감독들과 비평가들의 일대 격전이다. 모든 것은 지난 10월13일 르콩트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감독, 제작자 연합인 ARP 회원들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 시작됐다. “얼마 전부터 프랑스영화를 대하는 비평가들의 태도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몇몇 평론가들이 마치 대중적, 상업적인 프랑스영화를 죽이기 위해 비평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함께 토의하자고 촉구하며 끝난다. 원래는 사적인 성격을 띤 이 편지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영화계와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언론은 암묵적으로 공격의 표적이 된 일간지 <리베라시옹>. 지난 10월25일 문제의 편지와 함께 르콩트 감독 인터뷰를 실어 논쟁을 확산시켰다. 이 인터뷰에서 르콩트 감독은 프랑스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점점 떨어지는 상황에서 프랑스영화를 매도하는 데 혈안이 된 비평가들의 태도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이제 곧 미국영화가 시장을 휩쓸 것이라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르콩트 감독은 특히 대중적인 프랑스영화에 적대적인 매체로 <리베라시옹> <르몽드> <텔레라마> 삼총사를 지목하면서 <제5원소> 개봉 때 뤽 베송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했다. “영화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길 원치 않는 착한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극우파 정치가에게도 하지 않은 증오에 찬 인신공격까지 하며 영화를 매장시키려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성토대상이 된 매체들이 바로 반박을 하기보다는 그간 잠복해있던 문제들을 공론화하는 건설적인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그런데 르콩트 감독의 토론제의에 화답한 감독들이 지난 11월4일 모여 작성한 공동선언문이 미처 수정되기도 전인 초안상태에서 지난 11월25일 <르몽드>에 공개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베르나르 타베르니에 감독이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문은 이제까지 프랑스영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매도해 나간 비평문들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그 필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시했다. 영화 못지 않게 항상 옳은 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해 곧잘 이곳저곳에서 인용되곤 하는 고다르의 말이 이 선언문에도 인용됐다. “평론가들은 영화를 위해 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 덕에 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 선언문의 공식적인 요구사항인데, 이는 비평가가 한 영화를 보고 비호의적인 평을 내릴 경우에 관객에게 끼칠 나쁜 영향을 고려해 영화가 개봉하는 주에 이 비평문을 싣지 말고 한주가 지난 다음에 실으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또다른 감독들이다. 아네스 미르나 자크 로지에, 로베르 게디귀앙 등 63명의 감독들이 지난 12월5일치 <리베라시옹>을 통해 문제의 선언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음을 선언했다.

프랑스 전국에서 900만명의 관객을 모은 <아스테릭스>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희망차게 시작된 99년은 공공연히 대중적인 영화를 표방하면서 여름 바캉스 이후 개봉한 바르니에의 <동서>, 다이안 큐리의 <세기의 아이들> 등이 전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낳으면서 ‘대중적, 상업적인 영화의 위기 및 프랑스영화 시장점유율 추락’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감독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논쟁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들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과연 대중영화와 작가영화를 평가할 때 다른 비평기준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곧 <르몽드>나 <리베라시옹> 같은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간지가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전문지와 동일한 비평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둘째, 미국영화라는 거대한 기구와 경쟁해야 하는 프랑스영화, 특히 이들과 직접 경쟁상대가 되는 대중적, 상업적인 영화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들 영화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마지막은 비평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절대적인 비평의 자유를 옹호하고 작품 외적인 요소의 고려없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반면,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지, 과연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토로한 소수 평론가들의 자아비판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문제의 선언문에서 “셀린이 사르트르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셀린 뒤에 <밤으로의 여행>이라는 걸작이 있기 때문인데, 과연 현재 비평가들은 그들이 속한 매체에서의 위치말고 자신의 비평을 정당화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쨌든 논쟁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