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창작과 비평, 애증과 공생관계 [3]
1999-12-28
감독이 본 평론가와 감독

러브레터에 답장을 해다오!

한국의 영화평론가는 더이상 영화에 관한 글을 쓰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영화에 별점을 줄 뿐이다. 떠오르는 짓궂은 의문들. 별점을 주고도 원고료(?)를 받는지? 받는다면 얼마를 어떤 식으로 계산해 받는지?

신문에서는 문화부나 연예부의 영화담당기자가, 영화잡지에서는 영화전문기자가, PC통신이나 인터넷에서는 아무나(!)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정작 영화평론가만 영화에 관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강한섭 한국영화의 경계를 최소한 한뼘은 넓혔다. ★★★☆

박평식 다양하고 명렬하게, 자주, 오래도록 벗는 처녀들. ★★☆

유지나 여성의 섹스담론은 신선하다. 그래도 지겹도록 성기 중심적이다. ★★☆

이명인 저녁식사용으로도, 추석용으로도 껄끄러운 얘기. ★★☆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관한 <씨네21> 개봉영화 20자평에서.

박평식이 이 영화에서 ‘착지점 없는 당대 젊은 여성의 생존’(<국민일보>, 1998. 9.26. 김정룡) 대신에 단지 벗는 처녀만을 본 것은, 그가 대단히 윤리적인 사십대 중년 남성임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당대 페미니스트 전사를 자임하는 유지나가 이 영화를 성기 중심적으로 본 것은 뜻밖이었다. 혹시 영화에 애널 섹스가 안 나온다는 불평이었습니까?

강한섭은 <뉴스 플러스>(10.22)에 대단히 우호적인 평론을 썼는데, 특히 이 작품이 금기에 대한 한 도전장임을 읽어 준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의 글도 얼르고 달래고, 병주고 약주는 식의 한국영화 평론문의 도식적인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주간한국>에 실린 김민지의 글 ‘불안감을 못 떨친 참신한 아이디어’나 <한겨레21> 김의수의 글 ‘섹스말고 다른 건 없수!’도 그런 틀에 딱 맞아떨어진다). 글 말미에 그는 “세명의 캐릭터가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다양한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그려야 하는 창작자의 인간관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라고 비판한다. 글쎄, 말 자체는 지당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지만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감상은 이명인의 것이었다. 그녀는 <한겨레>(10.8)에 불온, 대담, 도발, 과감, 노골, 파격, 선동, 불편, 난처, 충격 등의 단어를 써가며 “여자들의 성, 불온하고 도발적인 선동”이라는 글을 썼다. 와우! 내 영화가 정말 이런 단어들에 합당했다면, 그건 분명코 걸작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별점으로도 얘기하듯이 이 영화는 그런 걸작이 아니다. 그녀의 글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새 영화들을 꼼꼼히 보고 자기만의 개성적인 비평을 틀리지(!) 않고 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성과 인생의 연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한국영화가 최근 몇 년간 그 질의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십년간 위로는 고매한 비평가로부터 밑으로는 거리의 필부필녀들에게까지 경멸어린 비판을 받아왔던 결과가 이제야 겨우 나타나는 건 아닐까? 사실이지 어떤 개인 조직 집단도 비판 받지 않으면 부패하고 무능해지고 망해버린다. 별점이나 주고 쪼가리 글이나마 쓸 수 지면을 찾아 헤매는 처지로 전락한 한국 영화평론가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비평가는 누가 비평했어야 했나? 물론 자기들끼리 치고 받았어야 했다. 어정쩡한 정답의 평문들은 집어 치우고, 개성적이며 자기만의 편견으로 가득찬 논쟁적인 글들을 썼어야 했다. 그런 격렬한 논쟁들 속에서만이, 전문적이고 개성적이며 매력적인 또 틀리지 않는, 그래서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평가가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말이다. 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비아냥 섞인 얘기를 종종하곤 한다. '기자들이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나, 뭐...' 마치 비평적인 전문성을 대단히 그리워 한다는 투로. 기자는 기자고 비평가는 비평가다. 비평가의 글은 기자의 글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비평가다운 비평가의 글을 찾아 볼 수 없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분명히 비정상적이고 건강치 못하다.

영화를 만들어 내보내는 건 이를테면 절절한 러브레터를 세상에 띄우는 거나 같다. 합당한 답신은 쉽사리 오지 않았고 난 그동안 몹시 외로왔다. 하지만 <여성이론>(여성문화이론 연구서, 1999)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주유신의 글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여성 섹슈얼리티의 재현'은 마침내 나를 황홀케 했다.

임상수/ <처녀들의 저녁식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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