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희로애락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토니 타키타니>는 물건으로도 말로도 다 채워질 수 없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에요.”
이치카와 준 감독은 언제나 미야자와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은 감독이었다. “자기 신념이 강하고, 테마가 뚜렷하지만 영상이나 대사는 굉장히 절제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만, 그때마다 “리에씨는 너무 메이저라 내 영화와 안 어울려”라는 반농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카와 감독도 “먼 세계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는 에이코의 모습을 미야자와 이외의 배우에게서 찾기는 힘들었다.
감독의 말에서 이치카와는 “막상 영상으로 옮기려 했을 때 하루키의 원작이 인물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소설에 흐르고 있는 투명감과 낮은 온도를 영상으로 옮기는 데 있어 미야자와 리에는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크린 속 그녀의 핏기없는 얼굴과 휘어버릴 듯한 몸에선 고독의 유전자가 느껴진다. 그건 노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타고난 도구다.
미야자와 또한 영화를 촬영하며 자기가 예상할 수 없었던 감정을 겪었다. 에이코와 같은 치수, 체격이라는 이유로 토니에게 채용된 히사코가 에이코의 옷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 우는 장면. 리허설 없이 단 한번에 촬영된 신이다. “촬영 직전까지 내가 어떤 감정에 휩싸일지 몰랐다. 안개 속에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감독에게 일단 한번 카메라를 돌려봐달라고 부탁했다. 슛이 들어가자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어요. 이런 얼굴도 있었구나, 하는. <아수라성의 눈동자> 같은 큰 규모의 상업영화에 출연했던 것도, <토니 타키타니>나 <아버지와 산다면>처럼 작은 영화를 한 끝이라 선택했던 거고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최근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상업적이거나 트렌디한 영화들은 드물다. 예상 밖 흥행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는 작가영화에 가까운 시대극이며, <토니 타키타니>와 <아버지와 산다면>은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테마가 확실한 작품이면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반 정도는 결심해버리고 만다. 큰 작품에서 대규모 스탭들과 일하는 긴장감도 좋지만 작은 영화에서 팀워크가 딱 맞아 일하는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다른 얼굴을 끄집어내보인다. ‘투명함’이 그녀 이미지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실제 그녀들의 작품을 보면 단 하나도 똑같은 이미지는 없다. <아버지와 산다면>에서 첫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딸 미즈에가 환생한 아버지와 장 속에 꼭꼭 숨어 나누는 긴 대화로 시작한다. 방재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버지와 얘기하는 미야자와는 순수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다. <토니 타키타니>의 에이코는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상대를 고독으로 밀어넣는 팜므파탈이다. <아수라성의 눈동자>에선 아예 삼면의 얼굴을 가진 아수라가 된다. 커다란 스크린에 삼면의 얼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여배우는 그리 흔치 않다.
“촬영 뒤 오케이 사인이 내려질 때의 해방감, 두려울 정도의 기쁨 같은 마음은 88년 영화에 데뷔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다만 내 안의 허들이 자꾸 높아져감을 느껴요.”
하지만 이렇게 이미지로만 그녀를 바라려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사실 지독한 노력으로 답한다. <유원몽경> 출연 당시 중국 경극을 통째로 암기했다는 그녀는, <황혼의 사무라이>에선 “옷 매무새 하나, 바느질하는 모습 하나가 머리가 아니라 세포에서 나오도록 준비”했다. <아버지와 산다면>을 보노라면 그녀는 또 하나의 허들을 넘은 듯하다. “이렇게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연기가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히로시마의 원폭자료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사진집을 보고 “전쟁과 핵문제를 내 인생의 테마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는 올 가을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특집드라마 <여자의 일대기>에서 실제 인물인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를 연기한다. 학생 때 결혼, 불륜, 작가 활동, 51살 때 출가 등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감정 폭은 자꾸 넓어져 간다.
미야자와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바바파파>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 몸을 의자로도, 물병으로도 만드는 그 프랑스 그림책 속 바바파파 말이다. “어렸을 땐 몸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게 재미있었지만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좋을까 어느 날 생각해보니, 유연성이랄까, 몸을 변해가며 얻는 풍성한 감정이 좋더라.” 아직까진 무엇을 해도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는 그녀지만, 언젠가는 그 틀마저 스스로 부수는 연기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살의 배우 미야자와 리에는 바바파파를 꿈꾸고 있었다.
미야자와 리에의 한국 미공개 최근작 3편
<황혼의 사무라이> 2002/ 감독 야마다 요지/ 출연 사나다 히로유키
일본의 시대소설 작가 후지사와 슈헤이 원작. <남자는 괴로워>의 노장 야마다 요지 감독의 건재를 알렸으며,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막부 말기, 녹봉 50석으로 살아가는 야마가타현의 하급무사 이구치 세이베이는 늙고 병든 어머니와 두딸을 돌보느라 일만 끝나면 집으로 직행해 동료들로부터 ‘황혼의 세이베이’라 놀림받는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이었던 도모에에게 행패를 부리는 난폭한 그녀의 남편을 말리다가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 결투를 통해 그의 귀신과 같은 칼솜씨가 소문나고, 절대 사람을 베지 않으려던 그는 번주로부터 자객의 임무를 명받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의 폼나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사랑에 가슴 저려하고 힘겨운 삶에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급변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정중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와 산다면> 2004/ 감독 구로키 가즈오/ 출연 하라다 요시오, 아사노 타다노부
동명의 연극이 원작. 구로키 가즈오 감독의 ‘전쟁 레퀴엠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이 묵직한 반전영화는, 핵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그려내는 데까지 이른다. 1948년 히로시마, 도서관에 근무하는 미즈에는 3년 전 원폭으로 사랑하는 친구와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은 상처 때문에 새로 다가온 사랑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딸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가 딸의 곁에 머문 나흘간을, 마치 2인 무대극처럼 그려나간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거의 우정출연 수준의 비중. 보는 이가 숨찰 정도로 많은 양의 대사를 히로시마 방언으로 아름답게 소화해내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부녀의 모습을 멀리서 나직이 비춰주는 장면, 마지막 인물 위로 서서히 올라간 카메라에 나타나는 히로시마의 원폭 돔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수라성의 눈동자> 2005/ 감독 다키타 요지로/ 출연 이치가와 소메고로
동명의 무대극이 원작. <바람의 검 신선조> <음양사>의 다키타 요지로 감독, 일본 가부키의 인기 스타 이치가와 소메고로의 첫 영화 출연, 스팅의 노래 <마이 퍼니 밸런타인> 삽입 등 개봉 전 화제가 많았다. 초닌문화가 번성했던 19세기 초 에도, 인간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오니(귀신)들이 공공연히 활개치며 자신들의 왕 아수라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처치하는 결사대의 일원이었던 이즈모는 5년 전 무고한 소녀를 베었다는 상처에 결사대를 떠나 가부키 극단의 배우가 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도적 츠바키라는 여성과 사랑하게 되지만, 5년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츠바키는 몸에 이상한 문신이 점점 커져가며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빠른 이야기 전개와 가부키 무대의 매력, 데카당스한 배우들의 분위기가 돋보이는 오락영화. <음양사>보다 짜임새는 한수 위지만 흥행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