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2] - 수상작·화제작
2005-10-05
글 : 오정연

거장의 발걸음은 논쟁 속으로

황금사자상 밑에 포진한 은사자상(감독상)과 심사위원 대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거장의 신작에 돌아갔다. 필립 가렐과 아벨 페라라. 누벨바그의 적자와 미국 독립영화의 대부가 선보인 두 영화는, (다른 모든 경쟁작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환호를 받은 걸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간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성찰과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이 작품들은 상영장과 기자회견장, 이후 리뷰들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남겼다.

누벨바그는 끝나지 않았다

레 자망 레귤리에 Les Amants reguliers/ 감독 필립 가렐/ 프랑스/ 2005년

68혁명은 프랑스인, 혹은 유럽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날 이후. 어떤 이들은 영화에 투신했고, 어떤 이들은 시와 미술을 탐미했다. 1968년 5월에 파리의 거리에 섰고, 그 시기를 전후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필립 가렐은 혁명의 열기를 차가운 현실에 대입하며 예술에 눈을 돌린 두쌍의 젊은 연인을 주인공으로, 그 시대의 프랑스영화를 향해 무한한 경배를 바친다. 유럽식 35mm필름의 고집스런 1.66:1의 화면 속에는 표현주의와 누벨바그를 넘나드는 흑백영상이 펼쳐지고,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이 담담하지만 리듬감 있는 인물들의 대사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탁 트인 거리에선 전경과 대치하던 이들은 밀폐된 방 안에선 아편을 들이켜며 끝모를 꿈에 빠져든다. 이쯤되면 영화를 통해 현실을 알게 되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의 어떤 대꾸를 의도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영화 속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한 여학생은 갑자기 관객을 응시하며 “잘 들어, 베르톨루치”라고 또박또박 말하고, 이들과 대치하는 경찰은 <몽상가들>의 그 경찰을 바라보는 듯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시인을 꿈꾸며 병역을 거부하고,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자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자유라며 욕망을 억누르는 주인공 프랑소와를 연기한 루이스 가렐은 때때로 비슷한 캐릭터로 출연했던 <몽상가들>에서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나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젊은이들의 하얀 육체와 이들의 성적 일탈을 아름답게 묘사한 <몽상가들>과 이 영화가 바라보는 지점은 겹치지 않는다. 영화를 향한 폐쇄적인 애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을 끌어들인 <몽상가들>과 달리, <레 자망 레귤리에>는 혁명이 남긴 교훈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시와 예술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여전히 집요하게 영화의 형식을 고민한다. 필립 가렐은 아직도 누벨바그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벨 페라라가 만든 종교영화

메리 Mary/ 감독 아벨 페라라/ 미국, 프랑스/ 2005년

시상식을 지켜보던 기자들이 가장 큰 야유를 퍼부었던 것은, <메리>의 수상 순간이었다. 폭력과 무자비함을 극한에 밀어붙였던 아벨 페라라가 종교를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졸리니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종교영화 <이것은 나의 피다>를 만드는 영화감독 토니(매튜 모딘)와 그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로 출연한 메리(줄리엣 비노쉬), <예수, 그 진짜 이야기>라는 주제로 일종의 토크쇼를 진행하는 방송인 테드(포레스트 휘태커)가 서로 다른 이유로 신을 믿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메리>는 언뜻 절절한 종교귀의담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예수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되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가, 실은 영화 속 영화의 촬영장면을 보여준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등은 왠지 시시껄렁한 장난처럼 허탈하기도 하다. 그러나 테드의 방송장면 등을 통해 끊임없이 끼어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테러가 담긴 뉴스화면은 종교가 불러온 실질적인 폭력과 딜레마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을 비롯한 관객,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묻는다. 목숨을 바칠 만한 이상이 누군가를 죽여도 좋다는 믿음으로 변하는 현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고. 그러므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란 듯이 비웃으며 종교영화를 완성한 젊은 감독이 실제적인 테러 위협 속에 두려움에 떨다가 신을 찾고, 무신론자인 방송진행자가 임신한 아내가 사고를 당한 뒤 신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은 왠지, 비슷하게 바보스러워 보일 수 있다. 악행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도록 뻔뻔스럽기 그지없던 페라라의 초기작 속 무표정한 인물들을 기대했다면 <메리>는 심드렁한 종교영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말을 앞둔 범죄도시처럼 무시무시한 뉴욕의 밤거리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차원의 조롱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사려깊은 프랑스영화

주요 부문의 수상에서는 실패했지만, 각자의 영역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도약을 이루며 관객의 뇌리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두편의 프랑스영화가 있다. 두 영화의 감독은, 전작을 통해 하나의 대상, 관계, 상황을 파고드는 집요하고 섬세한 통찰력을 선보인 바 있다. 인간에게 육체가 의미하는 바를 통찰했던 파트리스 셰로(<정사>)와 차가운 켄 로치로 불릴 정도로 오늘날의 계급적 상황을 파헤쳤던 로랑 캉테(<인력자원부>)는 올해 베니스에서 나란히 선보인 자신들의 신작을 통해 묘하게 달라진 시선을 제시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변화는 더 깊어진 궤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존재는 서로를 파괴한다

가브리엘 Gabrielle/ 감독 파트리스 셰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2005년

기차역에서 쏟아져나오는 인파 속 누군가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만만하고 이성적인 이 목소리의 주인공, 장(파스칼 그레고리)은 자신을 둘러싼 완벽한 철옹성을 소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은 가브리엘(이자벨 위페르)이 편지 한통을 남기고 집을 나간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충격을 미처 소화하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다시 돌아온다(가브리엘의 가출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귀환이고,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귀환의 이유다). 이제 영화는, 10여년간의 완벽한 결혼생활을 순식간에 산산조각낸 아내에 대한 증오로 몸부림치는 장과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가브리엘의 감정적인 전면전을 다룬다. 이들의 호화로운 저택 안에서 진행되는 폐쇄적인 심리극은,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자막과 음악, 고속촬영과 프리즈 프레임, 흑백 화면의 교차 등 다양한 비주얼적 효과를 통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것은 스스로가 육체를 지닌 존재임을 망각했던 오만한 이성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존재를 건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링 안에는 이들 부부의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챙겨주는 무표정한 하녀들도 함께 있다. 카메라는 종종 똑같은 옷과 표정, 태도로 유령처럼 이들의 주위를 맴도는 하녀들의 미묘한 얼굴, 부엌과 같은 이들만의 일상 공간을 베르메르를 연상시키는 태도로 응시한다. 이곳에선 육체만을 사용하는 이들은 명상을 하고, 이성과 감성이 유일한 무기인 이들은 서로를 부숴버린다. <가브리엘>이 묘사하는 세계는, 올해 베니스의 그 어떤 영화보다 새로웠다. 파트리스 셰로는 그렇게, 또 다른 극단에 도달했다.

돈을 들고, 또 다른 천국을 찾아서

남쪽을 향하여 Vers le Sud/ 감독 로랑 캉테/ 프랑스, 캐나다/ 2005년

영화가 시작되면 모든 중년의 백인여성들이 젊은 현지 남성을 옆에 끼고 거짓말 같은 휴양을 즐기는 아이티의 해변이 펼쳐진다.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그 혼란은 계속된다. 40대 중반에 다다른 자신에게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선사한 렉바(메노시 세자르)를 찾아 다시 아이티를 찾은 브렌다, 돈을 지불하고 사랑을 사는 것에 당당한 50대의 엘렌(샬롯 템플링)은 싱싱한 육체를 지닌 렉바를 공유하며 억눌러왔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한다. 이들이 일탈을 즐기는 해변은 완전히 고립된 무릉도원. 몇 발짝만 내디뎌도 혼란한 범죄의 소굴, 진짜 아이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인공 천국 역시, 바깥세계의 보편적인 경제·정치 논리에 지배되는 곳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영화의 중간에 삽입되는 주요 인물들의 사적인 인터뷰는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며 욕망을 해소하는 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몸을 파는 남자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여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웨이터는 “침략자였던 미국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총보다 무서운 무기, 달러를 앞세워 이곳을 찾았다”고 말한다. 로랑 캉테는 첨예한 정치적 이론마저 가장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설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정치학의 사적인 세밀함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똑 닮아 있는 영화 속 세계의 풍부함과 정확성이다. 상황에 따라 돈, 감정, 혹은 단순한 수요공급의 법칙에 지배받는 이들의 관계는 결국, 도무지 욕망의 진위를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빛으로 일관하던 렉바의 허무한 죽음으로 일단락된다. 이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은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둥대며 귀향하거나, 또 다른 천국을 찾아 ‘남쪽으로 향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경쟁 부문 바깥의 화제작

경쟁부문과 비경쟁 부문, 그리고 오리존티 부문은 베니스영화제의 주요한 세 가지 섹션. 그러나 경쟁부문에 속한 영화라고 언제나 우월한 작품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고, 실험성을 중시하는 오리존티라고 무조건 난해한 것도 아니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다니면, 경쟁부문 밖에서도 의미있는 화제작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빡빡한 일정 탓에 경쟁부문을 제외한 부문은 상황과 여력이 허락하는 정도에서 접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는 그 목록 속에서,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한 세 편의 화제작을 소개한다.

우리의 일그러진 풍경

버블 Bubble/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미국/ 2005년/ 비경쟁 부문

휘황찬란한 스타진용을 이끌고 <오션스 트웰브>를 만드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동시대의 뒤틀린 초상을 보여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로 데뷔했다는 것이 이제는 가물가물할 정도. 그러나 그의 최신작 <버블>은 그가 관심두는 영화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수공업만으로 운영되는 인형공장이 경제활동의 전부인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기괴한 살인사건을 다룬 <버블>에는 100% 비전문 배우만이 얼굴을 비춘다. 반반한 외모를 지닌 젊은 남자와 그와 함께 공장에 근무하면서 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뚱뚱한 중년 여자. 그리고 뒤늦게 공장에 취직하여 이들과 기묘한 삼각관계를 맺게 되는 젊은 미혼모. 인형의 얼굴과 몸통, 다리와 팔 등을 하나씩 조립하는 작업, 그리고 매일같이 똑같은 하루하루는 소름끼치게 단조롭고 무의미하다.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때때로 몰래카메라의 앵글을 흉내낸 디지털 영상에 포착된 인물의 표정은 무뚝뚝하고 기괴하다. 실제 그 마을에 살면서 영화 속 인물들과 똑같은 일상을 살아왔던 배우들은, 무표정 위로 간간이 베어나오는 소박한 희망의 빛까지 그대로 전달한다.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일그러진 현대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버블>은 보기 드물게 경제적인 영화다.

뿌리찾기 혹은 역사 만들기

에브리싱 이즈 일루미네이티드 Everything is Iluminated/ 감독 리브 슈라이버/ 미국/ 2005년/ 오리존티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이제 와서 영화를 통해 상기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게 느껴진다. 오늘날의 정치적인 역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명백한 휴머니즘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소재는, 발랄하고 도전적이어야 할 데뷔감독이 관심두기에는 영화적으로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스크림> 등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춘 배우 출신 리브 슈라이버 감독은 현명하게 이런 우려를 극복한다. 영화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간직한 사진 속 주인공을 찾아 미국에서 러시아로 건너간 유대인 청년 조나단(엘리야 우드), 그는 여행길을 함께하는 낙천적인 러시아 청년과 그의 괴팍한 할아버지의 여정을 뒤쫓는다. 냉전시대엔 상상도 못할 여행길. 자본주의를 몸으로 받아들인 러시아의 시골길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이들의 문화적 간극과 이에 따른 사고방식의 차이는 계속해서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관객이 얻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오늘날 러시아의 현실,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이 영향을 주고받는 역사의 진리다. 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흙이든, 콘돔이든, 영화표든, 병뚜껑이든 닥치는 대로 수집하면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나단의 뿌리찾기 여행은,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로 승화된다. 대중적인 유머 감각과 깊이있는 통찰이 가능하다는, 데뷔감독답지 않은 자신감 덕분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보이지 않는 아이들 All the Invisible Children/ 감독 메디 샤레프, 에미르 쿠스투리챠, 스파이크 리, 카티야 룬드, 조단 스콧, 리들리 스콧, 스테파노 베네루소, 오우삼/ 이탈리아/ 2005년/ 비경쟁 부문

종족분쟁의 최전선에 나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에게 전쟁은 일상이다. 법률 따위 안중에도 없는 집시 부모 밑에서 좀도둑질에 동원되는 사라예보의 어린이들에게는 소년원이 차라리 안전하다. 미국의 흑인 어린이의 인생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에이즈 환자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병이고, 빈부격차가 극심한 브라질의 뒷골목 어린이들은 생계를 위해 각종 고물들을 실어나른다. 철저하게 자본주의로 변모해가고 있는 베이징의 어린이들은 계급적 상황은 다를지 몰라도 그 삶의 힘겨움은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옴니버스영화. 세계평화든, 인권이든, 이런 종류의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제작된 옴니버스물, 게다가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업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에 따라 영화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하고, 너무나 감상적인 오우삼의 영화는 지나치게 아이들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입장을 가진 서로 다른 국적의 감독들이 자국 어린이들의 삶을 현실을 토대로 고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사뭇 감동적이다.

현지지원 김은정/ 로마 통신원·사진제공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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