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정화랑 괜히 싸움 붙이지 마요!” 지난 8월19일 저녁, 인사동의 한 음식점. 김현 편집실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 머리도 식힐 겸 인터뷰에 응한 방은진 감독은 몇개의 질문에 답하더니 금세 기사의 방향을 눈치채고 미리 엄포를 놓는다. 일주일 뒤, 이태원의 한 레스토랑. “사진 찍는 거 아니죠”라며 편한 복장으로 나온 엄정화는 “아니, 감독님이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에요?”라며 이내 씩씩거린다. 돈독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이간질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5년 준비 끝에 메가폰을 든 배우 출신 감독은 도대체 배우들과 어떻게 소통할까. 궁금증의 출발은 그러했다. 게다가 엄정화에게 방은진은 선배 배우지만, 신인 감독 아닌가. 촬영현장에서 두 사람이 적지 않은 신경전을 벌일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함구하고 그저 구경만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영화사를 설득했고, 이후 <오로라 공주> 촬영현장을 네 차례 방문할 수 있었지만, 매번 야식만 축내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꼴이 됐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감독과 배우들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이 여자라는 것 외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열대야도 잊은 채 촬영을 거듭하는 이들에게 “저기, 그런데 말이에요?”라고 말붙일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못했다. 전체 분량의 70% 이상을 찍었고, 배우들의 감정이 폭발하는 신 또한 상당 부분 소화한 상태라는 것도 염탐을 방해했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거든요!” 방문 횟수가 늘어나면서 궁금증은 점점 조급함으로 변했고, 그러다보니 수선을 피우는 일도 잦아졌으며, 그때마다 제작부의 눈총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방은진과 엄정화, 두 사람의 신경전의 전모는 촬영이 끝난 뒤에 역추적해야만 했다. “그날 엄정화씨에게 한 말이 무엇인가요? 왜 그러셨죠?” “감독님 말은 다르던데요?” 여기 내놓은 <오로라 공주>(10월27일 개봉 예정) 미니 제작기는 네 차례의 현장 방문, 그리고 게으른 기자의 엉성한 심문에 기꺼이 응해준 방은진, 엄정화 두 감독과 배우의 후일담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울긴 왜 울어 vs 울어야 산다
사건 일시: 2005년 6월6일 PM 10:00
사건 장소: 충청북도 청주 변두리 쓰레기 매립장
사건: 정순정이 변호사 김우택을 인질로 붙잡다
청주시 외곽의 대규모 쓰레기 매립장. 입구에 마련된 임시 주차장은 매립장과 꽤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차문을 열자마자 역한 냄새들이 슬슬 비위를 건드린다. “오늘은 그래도 괜찮은데요” 비가 그쳐서 고약한 냄새가 어제보다 덜 난다는 남종우 프로듀서의 말에 “참을 만하네요”라고 입은 답하지만, 속은 후회막심이다. “자, 건너가야지!” 촬영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쉬고 있던 일부 스탭과 배우들을 채근하는 극중 형사반장 최종원을 따라 쓰레기 늪으로 들어선다. 세대의 카메라가 포진한 건너편 언덕으로 향하려면 중무장이 필요하다. 걷다보면 쓰레기 늪에 발이 푹푹 빠지는 경우가 많아 고무장화를 신고 건너야 한다. 대개 쓰레기를 곧장 파묻지만, 촬영 때문에 땅속에 묻었던 쓰레기까지 파내서 쌓아둔 것이라는 남 프로듀서는 민원이 들어오기 전에 촬영을 서둘러 마쳐야 한다고 덧붙인다. 촬영 때문에 스탭들의 주식이라는 두루치기 백반을 30분 전에 허겁지겁 넘겼는데, 악취의 엄습까지 더해져 위장은 요동을 치고 있다.
며칠 동안 악취와 피로와 씨름해서인지 방은진 감독은 탈진한 환자처럼 얼굴이 반쪽이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파란 마스크로 가렸지만, 새까매진 얼굴에도 파리한 기운이 얹혀 있다. “평소에는 모니터 앞에 가만 못 있고 뛰어다니는데 오늘은 군중 신이라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는 방 감독은 “동트기 전까지 분량을 다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연신 콘티를 들여다본다. 70% 촬영을 끝낸 <오로라 공주> 제작진은 이날 연쇄살인을 벌이던 정순정(엄정화)이 변호사 김우택(장현성)을 인질로 붙잡고 경찰들과 대치하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대형 조명탑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옮기니 25미터 높이에 매달린 피칠갑한 가짜 사람이 매달려 있다. 충분히 아찔한 높이인데도 방 감독은 “저걸 볼 때마다 너무 낮아 보인다”고 한다. 한때 실감나는 장면을 얻어내기 위해 배우 장현성을 직접 크레인에 매달기도 했다는 방 감독의 심정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순정이 어떤 여자인가. 날카로운 산적꽂이로 누군가의 면상을 수십번 내려꽂고, 석고를 물에 개어 누군가의 코에 흘려넣고, 날카로운 가위로 누군가의 주요 부위를 잘라버리는 여자. 이날은 분노의 의식을 치뤄왔던 순정의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는 대목. 그러니 방 감독의 눈에 일종의 참수대인 크레인의 높이가 성에 찰 리 없다.
대개 장시간 밤샘 촬영에 가장 먼저 나자빠지는 건 단역배우들이지만, <오로라 공주>의 촬영현장은 좀 다르다. 모기 떼 못지않은 취재진과 이들을 막아내는 경찰 인력들로 분한 단역배우들은 수십번의 리허설도 마다않는 방 감독의 요구에도 끄떡없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질 때마다 대역들은 누구보다 먼저 “와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촬영이 끝난 것처럼 아낌없이 박수를 친다. 배우 출신 감독이니만큼 자신의 열연을 눈여겨봐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가. 아니면 연기 못한다는 이유로 단역배우 몇명이 해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서인가. 한 장면을 끝낼 때마다 대역배우들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주요배우인 문성근, 최종원, 권오중 등은 “누가 단역이고 주,조연인지 헷갈리네”라며 당황해한다. “정화는 차에 있어?” 정순정이 크레인 안에서 독백하는 장면 촬영까지는 아직 서너 시간이 남았지만, 방 감독은 조감독에게 수시로 엄정화의 컨디션이 어떤지를 묻는다. 자신의 출연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 울어버렸다는 엄정화를 배려해서인가 싶어 물었더니, 최영환 촬영감독은 “안개가 자주 끼는데다 바람까지 불어 하루에도 촬영 스케줄을 몇번이고 바꿀 수밖에 없다”고만 설명한다.
변덕스런 날씨는 엄정화의 출현을 예상보다 앞당겼다. 쓰레기장에서 천연덕스럽게 야식을 먹어치운 제작진이 촬영 순서를 바꿔 독백 장면을 먼저 찍기로 한 것이다. 모니터를 슬쩍 보니 건너편 쓰레기 산으로 건너간 방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배우에게 이것저것 요구를 한다기보다 자신의 표정으로 해당 장면의 뉘앙스와 대사의 톤을 전달하려고 하는 듯하다. 아마 그건 “엄정화는 어떤 상황을 본능으로 캐치하는 능력이 있는 배우”라고 여기는 감독 스스로, 촬영을 더해가면서 체득하고 확인한 배우와의 대화법 중 하나일 것이다. 30분쯤 지났을까. 최소 정예요원만의 접근이 허락된 크레인 장면 촬영을 끝내고 엄정화가 모니터 앞에 앉았다. “괜찮았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정화는 촬영현장을 벗어나면 ‘언니’라고 부른다는 방 감독 옆에 찰싹 붙어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얼마전 찜질방을 함께 다녀온 뒤론 두 사람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뒤로 하고 쓰레기 매립지를 빠져나오는데, 배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저 두 사람이 척력(斥力)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안간힘을 썼는지가 궁금해졌다.
방은진의 증언1: “울지 마, 정화야”
“시나리오에 <입질>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때만 하더라도 염두에 두고 있던 배우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는 배경도 중소도시였고,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도 촌스러운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지난해 여름, 엄정화가 정순정을 연기하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엄정화가 갖고 있는 밝음 자체가 이야기가 갖고 있는 무겁고 슬픈 느낌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출연작들을 훑어보면서 이 배우가 캐릭터를 본능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구나 싶더라.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은 본능으로 접근해서 이성으로 풀어내는 경우고, 싫어하는 배우들은 그 반대의 경우다. 엄정화는 어떻게 풀어낼지 몰라서 그렇지 학습으로는 불가능한 본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있었다. 반면, 촬영에 들어가선 그게 숙제로 변했다. 워낙 순정에게 몰입해 있던 터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고, 매번 나는 못 울게 했다. 크레인 독백 장면에서도 조금만, 조금만 감정을 누르라고 주문했다. ‘(대사)길이 줄이라’고 옆에서 하는데도 자기 느낌을 다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컷을 했는데도 끝까지 대사를 하더라니까.”
엄정화의 증언1: “감정이 주체가 안되더라”
“친한 사이인 <오로라 공주>의 음악감독 정재형이 갖고 있던 시나리오를 뺏어서 읽었는데, 그 버전은 심리 묘사가 많은 편이었다. 이후 시나리오는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서 그런지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눈물이 난 적이 많다. 주체를 못하는 거지. 그런 감정 신을 앞두고선 신나는 노래도 틀어놓고, 뜀뛰기도 했는데 별로 효과가 없더라.(웃음) 내 촬영 순서를 기다리다 진이 빠져 운 날도 그랬다. 아마 새벽 4시쯤 됐는데, 감독님이 내 타이트한 바스트 숏 장면을 남겨두고 다른 배우들 뒷모습부터 찍는 거다. 설정이 갈비집이라 고기 냄새에 질식할 것 같은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을 조리있게 표현할 자신은 없어지고, 그런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정작 내 차례가 돼서는 대사 치다가 ‘흑’ 하고 나가버리는 통에 촬영은 중단되고. 그날 그렇게 촬영을 한 데는 선배들을 배려하기 위함이기도 할 테고, 내가 감정을 좀 희석시키도록 시간을 주신 것이기도 할 테지만, 내 입장에선 ‘잘하고 싶은데 감독님이 그런 상황을 안 만들어주는 것 아닌가’ 투정이 났던 것이 사실이다. 울고 나선 ‘내가 아직 덜 자랐구나’ 후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