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능대로 vs 연출대로
사건 일시: 2005년 6월23일
사건 장소: 경기도 파주 세트장
사건: 정순정이 스탠드를 휘둘러 김우택을 죽이다
“또 죽이기 시작했구나?” 파주 세트장에 들어선, 극중 오성호 형사 역의 문성근이 방 감독에게 인사 대신 농을 던지자, 모이를 놓칠세라 달려드는 병아리들마냥 후배 배우들이 두 사람 주위에 모여들어 왁자지껄이다. 정순정이 휘두른 스탠드에 얻어맞아 머리가 피범벅인 김우택 역의 장현성이 세트 바깥으로 나오자 배우들이 주고받는 만담의 수위는 더욱 높아진다. 문성근이 “빨간 모자를 썼네”라고 말하자 가짜 피를 뒤집어 쓴 장현성은 “한나절 멀쩡했는데 또 이지경이 됐네”라고 웃고, 극중 문성근의 동료 형사로 나오는 권오중이 “연기 너무 어색하더라. 감독님이 마지못해 오케이를 내시던데”라고 장현성을 공격하자 이번엔 방 감독이 “분량도 없는데 오중이는 항상 일찍 오더라!”라고 일침을 놓는다. 방 감독이 문성근에게 “못 보신 코믹액션을 보여드리겠다”고 오전 촬영 분량을 보여주는 동안 장현성을 상대로 힘을 썼던 엄정화는 “남자가 힘이 세긴 세구나. 내 맘대로 안 되네……”라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어이구 궁뎅이 아파 죽겠다”고 하소연한다.
두번째 현장검증이지만, 방 감독은 좀처럼 배우들 앞에서 시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문성근의 경우 선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엄정화나 다른 후배 배우들에게조차 시연을 삼간다. 왜 그럴까.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 감독이니만큼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액션 장면의 경우, 직접 바닥에 뒹굴기도 하면서 카메라가 앵글을 잡도록 도움을 주지만, 방 감독은 감정 표현 그 자체만큼은 철저하게 배우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내가 배우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서로 침범해선 안 되는 연출이나 배우의 고유 영역이 있다. 대개 현장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게다가 엄정화의 경우 “본인도 감독님이 하는 연기 따라 할까봐 무섭다”는 걱정을 털어놨던 만큼 방 감독은 시연은 금물이란다. “정화야! (스탠드를)급하게 팍 내려놓는 느낌을 주라고!” 대신, 고급 주택에 사는 변호사 김우택이 앞으로 벌어질 상황도 모르고 “천인공노할 범죄도 어떤 각도에선 정당방위가 된다”는 요설을 늘어놓다 정순정에게 일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방 감독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엄정화의 잔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요구를 덧붙인다.
십여 군데 매체를 불러모아 현장을 공개한 이틀 후. 다시 밤샘 촬영에 들어간 파주 세트장을 방문했다. 간발의 차이로 범행 현장을 빠져나오고, 들이닥치고, 서로 엇갈리는 정순정과 오성호의 장면 촬영이다. 어느새 세트는 아파트 내부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긴 복도로 개조되어 있다. 대형 선풍기 앞에 앉아 검은색 정장을 입고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문성근은 “간만에 다시 연기하니까 몸이 말을 안 듣더라. 그래서 촬영 들어간 뒤로는 김운경(<옥이 이모>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의 작가) 씨랑 등산을 한다”면서도 밤샘 촬영만큼은 전처럼 쉽지 않은가 보다. 반면, 방 감독은 아역배우들과 실랑이를 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간단한 대사지만, 조감독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시연을 하고 있다. 대사를 외서 뱉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수차례 주의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잠옷 차림의 꼬마들은 엄정화의 옆쪽에 숨어 있는 카메라가 신기한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댄다. 결국 방은진 감독까지 엘리베이터 안에 동승해서 엄정화 뒤에 서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자, 엄정화 또한 꼬마 배우들을 설득하기 위해 거들고 나선다. 옆에서 스탭들은 “출연료 대신 애들 엄마한테 필름 값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수군대고 있다.
방은진의 증언2: “실연은 금물이다”
“단역들에게는 실연을 해 보이는 게 훨씬 빠르고 좋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중요한 감정들을 책임지고 있는 주연배우들은 좀 다르다. 톤이든 템포든 쉽게 터치할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화의 경우엔 제발 정순정에게서 조금만 빠져나오라고 했을 정도로 몰입되어 있는 상태라서 실연이 먹히지도 않고 잘못하면 내 연기를 따라하는 식밖에 안 된다고 봤다. 사실 설경구가 있어야 <박하사탕>의 김영호가 가능한 것 아닌가. 초반 타워팰리스 촬영 때는 스스로 불어넣은 긴장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이 들고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장현성의 뺨을 너무 세게 때려서 코피를 터트린 적도 있다. 그러다 나중에 배를 세번 걷어차이는 보복을 당하고서 훌쩍이기도 했고.(웃음) 촬영에 들어가서 안 건데 정화는 인서트 장면은 거의 쥐약이었다. 발을 찍으면, ‘나 어떻게 해요?’를 계속 반복했으니까.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해보라고 하는데 매번 잘 모르겠다면서 구체적인 지시를 원했다. 미숙하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거지. 내 입장에선 배우가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여지면 카메라가 따라잡겠다는 식이었는데 정화는 그런 식으로는 하는 걸 영 힘들어했다.”
엄정화의 증언2: “구체적인 지시가 좋은데”
“감독님 눈을 한번 들여다봐라. 흉내낸다고 될 눈매가 아니다.(웃음) 감독님은 자신이 해석한 감정이라면서 시연하시는 걸 꺼려했다. 대신, 감독님에게는 내가 연기하는 순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이 있어서 내가 한번만 더 테이크를 가보자고 해도 매번 필름 아깝다면서 ‘다시 하고 싶으면 해. 이미 오케이는 났으니까’ 하시곤 했다. 반면, 감정 신이 아닌 장면에선 자유로운 동선을 원하셨는데 난 구체적으로 일러줬으면 싶더라. 카메라는 풀숏을 잡는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고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순 없잖나. 감독님의 경우 배우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스타일이라, 일부러 콘티를 많이 안 보고 가기도 했는데 카메라 앞에서 맘놓기가 쉽지 않았다. 김우택에게 배 걷어차이는 장면은 사실 서너번 더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너무 아파서 더 찍자고 못 하겠더라. 장현성 씨가 너무 미안해할까봐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눈에선 눈물 나지, 숨은 턱턱 막히지. 전에 안 맞으면 다시 때려야 할까봐 세게 뺨을 때린 적이 있는데 완전히 복수를 당했다. 피투성이가 된 장현성 씨가 외려 위로해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상황이 웃긴다. 때리고 맞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쾌감이 느껴지는 거 보면 배우들은 변태들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3: 화장 지워라 vs 화장 할래요
사건일시: 2005년 7월16일
사건장소: 서울 어딘가
사건: 배우들의 비협조로 오리무중
“저기 붕붕거리는 차들 좀 보라고. 뭐가 좋다고 다들 공기 나쁜 서울에서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능선을 타다 발을 삐끗해서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던 문성근은 공기 타령을 하다 말고 주변의 스탭들에게 운동을 강요하고 있다. 낮에는 등산하고 밤에는 촬영하던 청주에서의 일주일 일정이 그리운 것인가. “나야 뭐, 너무 정화한테만 빠져 있다니까.” 문성근은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서 운전석에 앉은 엄정화와 밀담을 나누는 방 감독을 보며 한마디 던진다. 지적이거나 혹은 비열하거나, 영화를 통해 그렇게 비춰진 문성근이기에, 피해자의 시신 앞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을 주님의 품으로 안아주시옵고……”라고 기도문을 외는 극중 오성호 형사의 모습이 다소 의외이고 코믹하게 느껴진다는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문성근은 “그런데 새로 구성된 영진위는 잘 굴러가고 있지?”라는 돌발성 질문을 먼저 던져 질문을 원천 봉쇄한다. 개봉 때까지 맡고 있는 배역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겠다는 영화사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이 배우가 갑자기 얄밉다.
한편, 촬영은 꽤 오랫동안 지연되고 있다. 근접촬영 때는 최영환 촬영감독 옆에 바짝 붙어 카메라와 한몸이 되는 방 감독은 어찌된 일인지 헤드폰을 끼고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방 감독에게 이유를 물으니 “더블 뛰느라 정화가 순정의 톤을 잠깐 잃어버렸다”고 한다. 장마로 인해 <오로라 공주>의 촬영 시작이 늦어졌고, 결국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현장까지 오가면서 엄정화는 두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3중 인격으로 살아가야 하니 어찌 헷갈리지 않겠는가. “억양이 너무 왔다갔다 안 했으면 좋겠어!” 무전기로 차 안의 엄정화에게 연락을 취한 뒤, 방 감독은 슛을 알린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한번만 더 갈께요!” 아직 순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판단한 엄정화는 ‘컷’을 부르고선 다시 호흡을 고른다. “모니터 확인할께요!” 촬영 종료까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아서인가. 제작진의 움직임은 한결 가볍고, 또 여유롭다. 엄정화는 방 감독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오성호와 나누는 대사 중에 한마디인 ‘그래, 그럼’을 무슨 유행어라도 되듯이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겠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대사를 내뱉어서 방 감독에게 주의를 받았던 것이 엄정화로서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얼마 후, 방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지만, 엄정화는 “그래, 그럼. 그래, 그럼” 다시는 똑같은 시험문제를 틀리지 않겠다는 수험생처럼 각오를 되뇌이고 있다. 이제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열대야도 늦가을 선보일 <오로라 공주>를 만들어가는 이들 쌍두마차에게는 별반 고통이 아니다.
방은진의 증언3: “심리 묘사, 어렵지?”
“애초 버전에는 순정의 심리 묘사가 많았다. 첫 살인을 저지른 후 밀려드는 두려움. 그것을 숨기고자 하는 본능. 잊으려고 하지만 불쑥 찾아드는 기억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었는데 그런 장면들을 모조리 빼냈다. 그러면서도 그런 느낌들이 보여져야 하는 게, 아마 이런 점이 정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엔 화장하는 것까지도 정화랑 신경전을 벌였다. 연기하다가 화장이 번져도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는데도, 잠시 돌아보면 새로 화장이 그려져 있고.(웃음) 보자마자 인사가 ‘라인 지워라’였다. 나중엔 최영환 촬영감독이 나 대신 라인이 너무 어둡다고 거들어주더라. 그런 것 보면 내가 여배우였나 싶다. 처음엔 내가 순정을 연기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너무 잘난 척하는 여자 꼴을 못 봐주는 나라 아닌가. 감독도 하고, 배우도 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러겠지. 감독 준비하는 거 잠시 그러다 말겠지 하고 생각할까 싶었다. 60여회차 촬영을 끝내고 편집실에 앉아 수십번 돌려보는데 눈물이 날까. 그런데도 어떤 장면에선 내가 정화가 연기한 순정에게 이끌리는 걸 느낀다. 저 사람 ‘제작자야, 감독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슴없이 장면을 들어내면서도, 정화의 얼굴만큼은 한번이라도 더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이 된다.”
엄정화의 증언3: “아휴 헷갈린다, 정말”
“나도 몰랐다. <내 생애……> 촬영이 집중적으로 있다보니 그날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문성근 선배를 보면서 연기할 때는 분명 난 순정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모니터를 보니까 발랄한 투로 대사를 치고 있던 내가 보이더라. 화장? 감독님이 그런 말까지 했나? 내 입장에선 순정의 모습이 좀 차가워 보였으면 좋겠다고 봤다. 얼굴이 이래서 화장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글동글 맹해 보인다. 관객들에게 좀 강해 보이고 싶어서 라인을 그려도 스모키하게 했던 것인데. 감독님이랑 최영환 촬영감독님이랑 두 사람이 현장에서 협공을 하면 ‘어우, 알았어요! 알았어!’라며 면봉을 들어 라인을 지워야 했다. 물론 처음에는 뒤돌아서 지우는 척만 하고 그냥 찍었던 적도 사실 있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채찍질한다. 촬영 끝나고 나서 ‘방바라 방’ 감독님이랑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는데 내일 미국 가야 한다고 피곤하다면서 가버리는 바람에 울지도 못했다. 방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하고 작업할 수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