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홍콩엔 신인이 필요하다”
홍콩영화의 맏형, 감독·배우 증지위가 말하는 홍콩영화의 오늘과 내일
<무간도>의 냉혹한 보스 한침으로 익숙해진 증지위는 1970년대부터 감독과 배우로 활동해온 인물이다. 그는 홍콩영화가 아시아를 지배했던 전성기의 일원이었고, 그 퇴락을 지켜보았으며, 이제는 다시 한번 중심으로 발돋움하고자 애쓰는 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강호>와 <금계> 시리즈가 프로듀서로서 증지위의 작품들. 푸근한 정자나무처럼 젊은 후배들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증지위를 그가 진행하는 <TVB>의 버라이어티 쇼 녹화 현장에서 만났다.
-당신은 수많은 홍콩영화에 출연하면서 듬직한 존재감을 남겨왔다. 당신이 생각할 때 홍콩영화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언제였는가, 그리고 그 동력은 무엇이었나.
=80년대 홍콩영화는 찬란한 백화만발의 시대였다. 그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에 해외로 유학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방송사에서 경험을 쌓았고, 그중 몇몇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홍콩 뉴웨이브를 이룬 서극과 허안화, 담가명 등이었다. 그때 우리는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여 영화를 만들지, 연구를 많이했다. 내가 감독한 <최가박당>이 그런 영화였다. 그 무렵 <007> 시리즈가 유행했다. 제임스 본드는 멋진 차와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고 예쁜 여자와 같이 다녔기 때문에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장면을 모방하여 만든 영화가 <최가박당>이었고, 비슷한 방식으로 코미디영화를 변주하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독들은 혼자서도 다양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천녀유혼> <영웅본색> <오복성> 같은 영화들이 나왔다.
-당신은 액션과 코미디영화를 주로 찍었다. <무간도>는 당신의 경력에서 보기 드문 악역이었는데, 어떻게 그 역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나는 <첨밀밀>에서도 보스 역을 했고, <무간도>보다 연기하기가 어려웠다. 그전까지는 코미디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만옥이 여명을 버리고 나와 함께 떠나는 선택이 공감을 자아낼 수 있도록 열심히 고민했다. 그 영화 이후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흉악한 배우만 보스를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내게 보스 역을 많이 제안했다. <무간도>의 경우는 경찰국장과 보스 두 가지 중에서 보스를 맡게 된 거였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모든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경찰서에서 밥을 먹다가 집어 던지거나 죽기 직전에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처럼.
-지금 홍콩영화는 과거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배급력을 가진 제작사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홍콩에서는 배급사의 사전 결정에 따라 소재를 정하고 배우를 캐스팅한다. 그러므로 어떤 제작사도 신인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 양조위와 유덕화, 장만옥의 영화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홍콩은 점점 큰 영화는 너무 크고 작은 영화는 너무 작아지게 되었고, 중간이 사라졌다. 영화의 주동맥은 그 중간인데 말이다.
-당신은 젊은 감독과 작가들에게 투자해왔다. 이미 기반이 확고한데도 그런 모험을 하는 까닭이 있는가.
=사실 나는 4년 전에 한국에 간 적이 있다. 한국영화의 호황을 분석하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겐 신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기초와 경험, 인력, 기술이 모두 좋지만, 자금과 신인이 부족하다. 나처럼 나이먹은 사람들만 계속 나와서야 되겠는가. (웃음) 홍콩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문화의 사막이지만, 영화로 전세계에 알려져 있다. 이제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一國兩制) 시스템도 안정되었으니 새로운 도약의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다.
“투지가 있다면, 홍콩엔 미래가 있다”
<금계>의 감독 샘슨 치우 인터뷰
2002년 12월 <무간도>에 이어 2위로 데뷔한 <금계(金鷄)>는 성공을 예상한 사람이 거의 없는 영화였다. 1990년대에 드문드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 샘슨 치우는 증지위가 제작한 이 영화에 오군여를 쓰고 싶어했지만, ‘못난이 공주(ugly princess)’로 알려진 그녀는 관객을 끌어올 힘이 많지 않았다. 그때 오군여를 지지하여 버팀목이 되어준 이가 샘슨 치우의 <기이여정지진심애생명>에 출연했던 유덕화였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어찌됐든 유덕화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한 <금계>는 오군여에게 금마장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겼고, 다음해 속편 제작으로 이어졌다. 2046년 미래의 홍콩, “드디어 <2046>이 완성됐대!”라고 외치는 대사로 한국에서까지 소문을 탔던 영화가 바로 <금계2>. 한 창녀의 일대기를 들려주며 홍콩의 번영과 몰락을 조망한, 그리고 스타도 없이 모처럼 반가운 흥행을 기록한 샘슨 치우를 만났다.
-<금계>는 통장에 98홍콩달러밖에 없는 나이 든 창녀와 가난한 강도가 현금출납기 부스 안에 갇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 창녀의 일대기가 <금계>인데,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가.
=<금계> 시리즈를 찍을 때 홍콩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사람들은 한치 앞을 바라보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홍콩의 황금시대였던 80년대가 거짓이 아닌 진짜였다는 사실도 알리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홍콩의 번영과 쇠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여자들이 몸을 파는 오락 장소, 다시 말해 매춘이었다. 아금(오군여)은 홍콩 경제 상황에 따라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오뎅집(오뎅을 파는 여자아이들의 손을 은밀하게 만질 수 있는 가게)에서 나이트 클럽으로, 안마 시술소로 옮겨다닌다.
-2003년 홍콩의 야경은 아금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의미인가.
=나는 어릴 적에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가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 아름다운 등불들을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도 야경은 변함이 없다. 나는 홍콩이 끝장났다고 믿는 이들에게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져 앞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눈을 깨끗이 잘 닦으면 모든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고.
-<금계>를 찍을 무렵 홍콩은 최악이었다고 했다. 그런 분위기가 다른 홍콩영화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사람은 어느 한순간 생각지도 않은 일을 당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이, 네개의 벽에 갇혀 있는 듯한 그런 감각. 홍콩은 역사 이래 그처럼 막다른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매우 공평하다. 자살하거나 자포자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려움을 이겨낸다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나는 “최악을 모두 참아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라는 속담을 믿는다.
-홍콩영화는 90년대에 심각한 침체를 겪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90년대 중반 홍콩 경제가 불황을 겪으면서 투자자들이 자본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점점 무성의하고 무차별적으로 영화를 찍던 이들은 뒤늦게 상황의 변화를 인식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홍콩 영화인들이 새로운 창의력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우리만의 개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겐 진가신도 있고 두기봉도 있다. 서극도 드디어 <칠검>을 완성했다. 투지를 잃지 않는다면, 홍콩은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