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세트, 거대한 고독의 바다
드디어 촬영이 진행 중인 세트다. 여긴 거대한 고독의 바다다. 첫 번째로 들어선 세트는 실사 스튜디오에 비해선 작았으나 제법 컸고 무엇보다 어둠침침했다. 애니메이터 메를린 크로싱엄이 홀로 사람 가슴 높이로 세팅된 미니어처와 그 앞쪽의 카메라, 그리고 모니터와 하단의 컴퓨터 사이를 외롭게 오가고 있다. 워낙 섬세하고 느리게 촬영이 진행되니 조명팀은 한번 세팅해놓고 사라지고 사운드는 사전 녹음으로 처리하니 애니메이터의 고독한 작업일 수밖에. 악역 빅터가 총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모니터에 총의 동선을 점으로 표시해놓았다. 한번 찍고 총을 점 표시 순서대로 조금씩 옮겨 찍으며 한 프레임씩 쌓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맡은 분량의 감독과 촬영, 배우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오늘(월요일 오후 2시께) 촬영한 게 3초 정도인데, 금요일까지 8분 분량을 마쳐야 한다”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난처한 표정을 이방인들 앞에 지어 보인다.
운좋게 최종 활극이자 긴 엔딩신을 준비 중인 세트에 들어가게 됐다. 가로 10m, 세로 5m의 잔디밭에서 ‘슈퍼야채선발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대회가 열리는 곳은 부유한 독신여성 토팅턴의 대저택. 군중신과 항공 액션신 등을 모두 이곳에서 마쳐야 한다. 당연히 복잡해진 조명과 지미집을 활용한 공중 촬영까지 세부 동선을 확인 중이다. 아트디렉터 매트 페리가 “<치킨 런>에서 닭이 매끈매끈하게 나오는데 이번에는 손닿은 느낌이 많이 나도록 애쓰고 있다”며 “단편에 비해 스케일이 커졌을 뿐 전형적인 영국풍의 비주얼은 고수하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안개 자욱한 숲속으로 거대 토끼가 질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직접 수증기로 안개 효과를 내고 CG로 보충작업을 하는 종류의 일만 빼면 기술적으로 아주 새로운 건 없다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두 감독은 주로 액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설명과 더불어.
히치콕, <배트맨> <늑대인간> <킹콩>의 인용
2만4천장의 스토리보드와 21개월의 촬영을 거쳐 완성된 장편 <월레스&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는 히치콕에게 헌사하는 오마주다. 히치콕식 스톱모션 스릴러를 기본 설계도로 삼고 <배트맨> <늑대인간> <킹콩>에 대한 인용과 오마주가 덧붙는다. 대기를 감싸고 도는 안개와 비,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 고전적인 호러영화 스타일이 감성적인 우뇌 구실을 한다면, 슬랩스틱과 철학적 사색을 칵테일한 아드만 본류의 코미디가 좌뇌 역할을 맡았다. 마치 우뇌 월레스와 좌뇌 그로밋이 합주하던 아기자기한 실내악을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탈바꿈시킨 형국이다.
런던의 한 골목을 그대로 따온 듯한 거리가 음침한 어둠에 잠겨 있다. 뚜벅뚜벅, 순찰도는 경찰의 발자욱 소리와 불안한 눈빛이 긴장감을 응축시키는데 결국 일이 터진다. 첫신이 전환되면, 예의 귀엽고 발랄한 월레스와 그로밋의 기상과 출동이다. 먼저 발동이 걸리는 건 역시 그로밋이고 월레스는 치즈 냄새로 유혹이라도 해야 잠을 깬다. ‘슈퍼채소선발대회’를 4일 앞두고 이들의 새 사업이 성업 중이다. 고객의 채소밭에 침입자가 생겼고, 배트맨과 로빈처럼 스타일리시하게 출동한 월레스와 그로밋이 채소를 앙문 토끼를 수거해간다. 거리에 도열한 시민들, 월레스와 그로밋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대회에 출품할 슈퍼채소의 보안장치를 정성껏 점검한다. 늘 그래왔듯 사고는 아저씨 월레스가 친다. 수거해온 토끼들을 그냥 방생할 수 없어 골치아파하던 그는 이번에도 문제적 기계장치를 고안해냈다. 달빛 에너지로 구동되는 기억조종장치, 좀더 정확히 말하면 뇌를 개조하는 무서운 욕망조종장치다. 말없는 그로밋이 몹시 염려스런 자태로 지켜보는 가운데 월레스가 직접 자신의 머리에 기구를 쓰고 토끼들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한다. “나는 채소가 싫다, 싫어….” 아뿔싸, 월레스와 토끼 한 마리의 머리가 도킹하는 사고가 생기면서 거대 토끼의 저주가 시작된다. 밤이면 어디선가 거대한 토끼가 나타나 채소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채소 약탈의 밤이 거듭되고 월레스와 그로밋(의 사업)은 궁지에 몰린다. 또 늘 그래왔듯 사고 뒤처리의 임무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용기를 겸비한 견공 그로밋에게 주어진다.
캐릭터의 특성이나 슬랩스틱과 스릴러의 기운은 <월레스와 그로밋> 단편 3부작의 연장이다. <전자바지 소동> 편과 <양털도둑> 편에서 선보인 액션과 음모극의 소용돌이는 ‘스톱모션의 반격’이라 부를 만한 놀라움이었다. 펭귄과 맹견에서 킹콩 같은 토끼로 사이즈가 커지고, 열차 추격전의 속도감이 항공 추격전으로 업그레이드됐을 뿐 단편에서 장편으로 되살아난 부활의 축제라는 근본을 잊지 않았다. 월레스를 침대에서 아침 식탁으로 끌어내리는 알람과 기상 장치, 토끼 진공 수거기를 장착한 비즈니스 차량 등 메커닉디자인도 한층 정교해졌고 성능은 향상됐다.
다만, 당신이 어떤 서운함과 정체감을 느낀다면 그로밋에 대한 기대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이 견공의 유머와 슬픔이 벌써 한계체감의 수순에 들어갔을까. 말없는 그의 눈이 오히려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즐거움을 만들어내거나 은근히 배어 있는 테마의 대변자가 되던 것이 무심한 방관자의 수동성으로 읽힌다. 혹시, 누명 쓰고 감옥에 갇혀서도 고전을 탐독하던 그 사색의 여유를 거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자연생태주의나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알레고리가 느껴지긴 하나 월레스의 발명품처럼 사뭇 기계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