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4] - 황정민
2005-10-19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멜로와 코미디 양극단에서 폭발력 보이는 황정민 이야기

완벽주의자, 투박한 진정성으로 성큼 다가서다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의 제작 초기에 영화의 ‘비장의 무기’가 황.정.민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스토리나 스타일의 어떤 요소에 방점을 찍어 답하게 마련인 질문에 특정 배우의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지면서도, <너는 내 운명>의 전도연 스타일로, “진정?” 하고 되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황정민은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 시절부터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어떤 배우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똑 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배우는 아니었다. 당장 이 작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가늠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어떤 기대를 걸어보기에는 너무 막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로 옮겨온 것이 벌써 대여섯해. 착실히 작품 목록을 쌓아온 이 배우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그가 아직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당신은 이런 배우였지’라고 아는 체를 해올까 두렵다는 듯 수시로 돌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황정민은 특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작품과 배역을 거쳐왔다. 주류와 비주류, 장르와 비장르에 넓게 걸쳐진 그의 행보가 남긴 것은 그 자체로 복잡한 한무리의 ‘인간군상’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순박한 드러머 강수인가 했더니, 어느 순간 <로드무비>의 마초적인 동성애자 대식으로, <바람난 가족>의 위선적인 변호사로 돌변했고, <마지막 늑대>에서 어눌하고 고집스러운 시골 경찰이 되었구나 했을 때, 다시 <달콤한 인생>에서 섬뜩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생양아치 백 사장이 되어 기괴한 카리스마를 발했다. 그리고 두편의 사랑 이야기에서, 그는 우리를 무지막지하게 울리고 웃긴다. 여기서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흠칫 놀라며, 돌아보게 된다. “순정도 지나치면 멍청하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남자, 어차피 한번 죽을 인생, 사랑하는 사람과 살다 죽겠다고 울부짖는 남자의 징한 사랑에 마음이 무너져내리고(<너는 내 운명>), 미처 흑심을 품기도 전에 오해를 사고 궁지에 몰리는 순진한 노총각의 교통사고 같은 수난에 키득대다가(<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백지 같은 순진무구함으로, 멜로와 코미디의 양극단에서 폭발력을 보여주는 이 배우가 정말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잘 봤다, 멋지다, 잘했다는 칭찬을 해주신다. 그럼 감사합니다, 흘려듣고 말지, 앗싸, 하는 기분이 되지는 않는다. 원래 칭찬받거나 주목받는 걸 불편해하는 성격인데다가, 내 몫이 아니라 배역의 몫이라는 생각에서다. 나는 직업이 배우일 뿐이다. 물론 ‘보여주는 직업’이지만,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별개고, 내 몫이 아니라고 느끼는 거다. 지금은 ‘온리’ <사생결단>(차기작) 생각뿐이다. 한 작품을 다 찍고나면, 순식간에 그 인물을 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휘르륵 사라진다. 촬영했던 공간, 상황, 사람들까지 금세 낯설어진다. 인물한테 붙기가 힘들지 떼어내는 건 쉽다. 사람이 원래 단순하고 이기적이니까, 잊으려면 금방이더라.”

황정민은 여러 배역을 거치면서도, 특정한 역할 이미지를 쌓아두지 않았다. 역할을 당겨와 ‘자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비우고 역할로 다가가 거기에 자신을 ‘올인’하는 그의 연기 스타일 때문이다. <로드무비>의 임대식과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과 <너는 내 운명>의 김석중이 같은 배우의 분신일 수 있다는 불가해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일례로, 그는 <너는 내 운명>에 대해서도 한 작품을 끝냈다기보다는 한차례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억하고 있다. “좋아하면 눈에 하트가 그려지지 않나. 내가 정말 그랬다. 손끝이 저리고, 가슴이 설레고.” 굵고 강한 연기로 압도하는 작품뿐 아니라, 짧게 스쳐지나간 <여자, 정혜> 같은 작품에서도 그가 실제 모습과도 이전의 분신과도 ‘전혀 다른’ 인물로 보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이에 대해 “기존의 성격파 배우들의 경우 작은 연기를 할 때나 멜로적 감수성이 필요할 때 배역보다 배우 그 자신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있는데, 황정민은 그런 순간에도 자기를 완벽히 비워내는 면이 있다”고 짚어낸다.

자신을 비워내고 역할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황정민에겐 ‘메소드 연기’의 기본을 닦아온 역사가 꽤 긴 편이다. 중학생 때 가수 윤복희가 출연한 뮤지컬 <피터팬>을 보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경이감과 생소함”으로 배우가 되길 열망하며 계원예고에 입학했을 때 입에 달고 살았던 경상도 사투리(그의 고향은 마산이다)를 떼어내려고 부모님과 대화를 중단하고 말을 다시 배우다시피했던 일이며,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고, 보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흡수하던 스펀지 같은 시절”에 온갖 잡기와 잡학에 심취했던 일이 지금은 다 ‘자산’으로 쌓여 있다. 네댓해 몸담았던 극단 학전의 김민기 대표는 그에게 “배우가 가져야 할 기본”을 일러준 마음의 스승. 황정민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진심’을 전하기 위한 느리고 꼿꼿한 걸음을 걸어왔다.

“연기를 하면 거짓말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배우가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관객에게 바로 들킨다. 우는 장면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울 때와 억지로 쥐어짜거나 다른 생각으로 눈물을 만들어낼 때, 그걸 관객이 바로 구분해낸다는 말이다. <병원24시>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런 프로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건 실제 상황 아닌가. 진짜로 애틋하게 흘리는 눈물이고, 그걸 보는 사람의 눈에서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줄줄 눈물이 흐른다. 그게 진짜다. 머리로 하면, 기술로 하면 안 된다. 그건 벌써 거짓말이다. 가슴으로 해야 한다. 어떤 영화를 하든,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으로 보여졌을 때 감동이 더한 것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거지, 다른 게 아니다.”

다소 투박한 느낌을 주는 황정민의 외모는 소박한 인간미가 있는 역할들을 특히 잘 흡수해낸다. 종종 팔자로 일그러지는 동그란 눈,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툴툴대는 입, 자주 빨개지는 얼굴빛이 빚어내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역동적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 그가 생이별 중인 아내를 만난 면회실에서 아기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부짖을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번번이 여자를 가로채던 친구의 망가진 인생을 가여워하며 눈물 섞인 욕설을 던질 때, 감정을 실은 그의 얼굴은 더없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 작품들을 통해서 황정민이 자신과 닮았거나 어울리는 역할을 만났을 때 발하는 상승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면, <바람난 가족>이나 <달콤한 인생>처럼 아주 다른 느낌의 역할을 만났을 때 빚는 묘한 엇박자의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주영작이 홀로 밤을 나고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볼 때, 백 사장이 아이스링크에서 선우와 대면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조명이 내린 황정민의 눈의 그늘에선 위선적인 이의 고독, 사악한 이의 나약함 같은 것들이 슬쩍 스쳐지나간다. ‘순둥이’ 같은 그의 얼굴은 차갑고 흉포해져도, 뭔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고 그래서 한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런 정서가 있다.

2000년 오디션에서 황정민을 발견한 임순례 감독이 “마치 보석으로 깎이기 전의 거친 원석 같다”고 했다고 하듯이, 그에겐 어디로 튈지 짐작할 수 없고, 선과 악으로 이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원초적인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 배우로서 ‘정제’의 시간을 거쳐온 지금은 그 수위가 몇 레벨 더 높아진 느낌이다. 마약 세계를 다룬 <사생결단>에 복수를 꿈꾸는 퇴락한 형사로 황정민을 캐스팅한 최호 감독은 “내가 아는 한국 배우 중 눈이 가장 살아 있는 배우다. 멍하게도, 진지하게도, 착하게도, 악하게도 보이는 그의 눈에는 쉽게 읽을 수 없는 스펙트럼과 깊이가 있어서, 어떤 역할을 만났을 때 전혀 색다른 것이 뿜어져 나온다”고 들려준다.

“두 사람이 사귀면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열고 이해하고 고민하다보면, 그 역할을 닮아가는 거다. 그러니 배우 외모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다만 타고난 외모나 성격에 없는 것이 시니컬한 면인데, 그래서인지 그런 느낌이 강한 배우들, 숀 펜이나 조니 뎁이 좋더라.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진 배우들.”

황정민이 매 작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저력은 무엇일까.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황정민의 미덕으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에겐 무한한 성실함이 만들어내는 어떤 경지가 있다. 무한히 성실한 데서 나오는, 웬만한 한계는 다 돌파한다는 느낌. 한창때 한석규를 보는 느낌과 비슷한 것이다.” 실제로 황정민이 자신이 갖고 있거나 갖고 있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엄청난 노력과 준비로 지워낸다는 것은 함께 작업했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들려주는 증언이다. “어떤 인물에 꽂히면 ‘온리’ 그 생각”이라는 그는 감독이 수용하는 선에서 배역에 대한 디테일들을 끊임없이 제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달콤한 인생>에서 백 사장의 얼굴 흉터와 금니, 결벽증 등은 그의 분석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가된 설정들이었다고 한다.

실제의 그와 닮아 있는 인물들을 만들어낼 때도 마찬가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단순무식한 형사 나두철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게 된 연유도 역할의 고유성을 고민하던 황정민이 없던 설정을 제안해 추가한 것이었다. <너는 내 운명>에서 많은 이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면회실 장면이 더 처절해진 것은 “뛰어올라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다”던 황정민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피커를 떼어내는 설정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박진표 감독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을 때 든든하게 같이 이뤄낼 수 있는 배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밤새도록 시나리오에 밑줄 그으면서 메모하고 연습해가면서 준비하는 철저한 준비형 배우다. 그것만 있으면 답답할 수도 있는데, 현장에서 캐치하는 동물적인 디테일이 뛰어나서, 밤새 준비한 것과 현장에서의 직감을 합쳐내더라.” 이것이 바로 동료 배우들에게 죄책감에 가까운 자극과 긴장을 준다는 그의 소문난 완벽주의다.

“나는 모든 해답은 대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본만 열심히 본다. 석중은 나와 닮았다고 생각돼서 쉽게 편안하게 접근했는데, 그게 실수였다. 김석중이 자꾸 황정민스러워지는 거다. 그럼 거짓말인데, 고민이 되고, 그런 역할과의 싸움이 힘들었다. 그 과정이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더라.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처럼 역할이 아예 이해되지 않으면,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으니까, 오히려 편한 점이 있다. 억지로 나를 갖다붙이면서도, 기분 좋은 궁금증 같은 게 있는데, 석중이나 강수처럼 내가 잘 알고 편한 역할들이 오히려 힘들고 위험할 수도 있더라. 내쪽으로 역할을 당겨오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친구 사귈 때처럼 내가 먼저 역할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이번 특집에 대한 황정민의 반응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남에 의해 규정되는 것, 역할이 아닌 배우로서 부각되는 것, 그래서 더이상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염려였다. “관객의 녹을 먹는 배우로서, 매 작품 다른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불만을 숨기지 못하는 눈길로, 모범적인 공무원 같은 말투로, 그는 일갈한다. <너는 내 운명>이 200만명 고지를 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의 출연작 중 최고 흥행작이었던 <바람난 가족>(180만명)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이쯤 되면, 황정민이 그간의 태도와 행보로 암시한 ‘날 보러오지 말고, 영화를 보러오라’는 주문은 더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비우고 지웠던 배우가, 장르와 역할에 특별한 취향이 없던 배우가, 영화 한복판으로 도드라지게 된 지금, ‘플랜 B’를 가동해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의 지인들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고,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다잡는 중이다. 황정민과 여러 작품을 함께한 MK 픽쳐스의 심보경 이사는 “자신의 고집을 지키면서도 외부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조화롭게 걸어온 지금까지의 행보, 그 느낌을 잃지 말고 몸을 가볍게 가져간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통해 더 좋은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 섞인 축복을 보낸다. 남들이 뭐라든, 황정민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갈 자신이, 그럴 배짱이 있어 보인다. 당장은 다음 영화에 주파수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을 보면.

“작품을 하는 건 운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건 인연이더라.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고, 그렇게 수동적인 일인데, 내가 나서고 계획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편해졌다. 내가 직업이 배우일 뿐이지, 다른 잘하는 일이 또 있지 않겠나. 닥쳐봐야 알겠지만, 주방장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고, 도예가가 될 수도 있는 거다. 어떤 배우가 되겠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으로서 남 도우면서 살겠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산다.”

의상협찬 BOSS, Earl Jean, STONE ISLAND 헤어 메이컵 제니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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