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차세대 대표배우 정재영·황정민 [2] - 정재영
2005-10-19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정재영의 연기가 빚는 공감의 동심원 들여다보기

삐딱함 속에 숨은 천 가지 표정의 힘

그 남자는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알아채기 오래 전부터, 낯은 익지만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친구처럼, 그렇게. 그리고 의식하지 못하는 틈에 우리는 그와 통성명과 악수를 했고, 말을 트고 수다를 떨었으며, 소주잔을 부딪치고 어깨를 맞걸었다. 그와 우리의 거리가 한자리 숫자의 휴대폰 단축번호만큼이나 가까워진 과정은 그토록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그를 예전부터 막역했던 사이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서 정재영의 공식 첫 주연작이 지난해의 <아는 여자>였다는 사실이나, 그가 <웰컴 투 동막골>과 부산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될 <나의 결혼원정기>까지 세편에서만 주연을 맡았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알고보니 몇달 전 한국에 온 외국인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킬러들의 수다> <실미도> <귀여워>처럼 ‘공동 주연’ 성격의 영화가 있었지만, 하여간 그의 이름이 포스터의 가장 왼편을 차지한 지는 얼마되지 않았으니 정말 믿을 수 없는 놈은 우리의 기억이다.

게다가 각자가 기억하는 정재영의 인상은 서로 다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에서처럼 비교적 강한 남자로 정재영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귀여워>에서처럼 어수룩하면서도 순수한 그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이들도 있다. <나의 결혼원정기>가 공개되면 후자쪽에 더욱 무게가 실릴 것이다.

“깔끔하고 단정한 건 겁이 난다. 익숙지도 않다. 그렇다고 내가 어릴 때부터 불량아나 문제아였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악역도 그냥 악역이 아니라 뭔가 있어야 하는 삐딱한 악역, 그냥 선한 역보다 뭔가 삐딱한 면이 있는 인물이 좋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바라봤을 때 더 재밌고 흥미롭지 않나?”

각자에게 다른 인상으로 각인된 정재영의 캐릭터에 일관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삐딱함’이다. <실미도>의 마지막 대목, 인찬(설경구)이 버스 밖으로 나가라고 할 때 그는 “너 혼자 개뼉다구 같은 똥폼 잡는 꼴은 못 봐”라고 말한다. 길들여지거나 굴복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상필의 이 말은, 하지만 가슴 뜨거운 애정고백에 다름 아니다. <귀여워>의 머시기는 보스의 잔치에 가서 주정을 부린다. 자신의 지위가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목을 앞으로 뺀 채 건들거리면서 후배들을 때리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런데 그의 삐딱함이란 반항심이나 뒤틀림과는 다르다. 그건 내면의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외양상의 저항이다. 인찬과 동료를 사랑하지만 “너희들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건 쑥스러워서, 조폭 후배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탓에, 그들은 도리어 눈을 부라리고 강한 척 한다. 순수하고 곧은 내면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건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나 <실미도>의 한상필, <귀여워>의 머시기, <웰컴 투 동막골>의 리수화 모두 강해보이지만, 나는 그들의 내면이 나약해서 연기하겠다고 한 거다”라는 정재영의 생각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가서야 “수진아, 내가 그렇게 싫으냐?”라고 진심을 드러내는,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 같은 인물들이다.

정재영의 연기가 돋보이는 지점은 이 삐딱한 과장과 허위의 외양 안에서 내면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실미도>의 초반부, 교수대 앞에 선 상필이 거칠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교도관이 담배를 입에서 빼는 찰나, 스쳐가듯 그의 눈매가 흔들린다. 두려움과 허탈함이 뒤섞인 그 오묘한 표정은, 하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는다. <귀여워>에서 후배 조폭 막내(박희순)가 그를 배신할 때 머시기는 모멸감과 분노, 두려움을 표정을 통해 아주 잠시 드러내지만, 비굴하게 씩 웃거나 울분을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 계속 거들먹거리는 척 할 뿐이다. 그들의 뻣뻣하고 삐딱스런 행동거지는 순간적으로 포착된 이 미묘한 표정을 통해 드러난 스산한 마음 속 풍경과 맞물려 풍부한 인간 내면의 보고서가 된다.

“웃기려고 하면 그만큼 더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지하지 않은 연기를 했을 때, 웃기면 다행이지만 안 웃겼을 때는 허무하다. 반면, 진지한 연기라면 안 웃기더라도 리얼리티는 살아있으니까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기에 코미디의 70~80%는 진실함에서 나온다.”

코믹 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리수화가 여일(강혜정)의 경고를 듣고 번쩍 일어나며 “나 뱀 무수와서 가는 거 아이야”라고 할 때, 그의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은 어린아이와 같은 두려움을 감추려는 또 다른 유형의 삐딱함이다. 화들짝 놀라 호들갑 떨지 않는 정재영의 연기는 이번엔 유쾌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는 여자>에서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동치성이 이연(이나영)에게 “너 때문에 집도 날아가고… 볼도 날아가고”라고 말할 때나, <나의 결혼원정기>의 만택이 키우던 개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개밥을 먹는 모습 또한 내면의 진실을 이와 매우 대조적인 행동과 꿰어낼 줄 아는 그의 연기 덕분에 자연스러운 코미디가 된다.

그러고 보면, 그의 연기를 보며 통쾌하게 웃는 대목은 하나같이 캐릭터가 무언가에 진지하게 임할 때다. <아는 여자>의 동치성이나 <웰컴 투 동막골>의 리수화는 시종 진중하게 행동하지만, 너무 어리숙해 보인다. 바로 그때, 정재영은 만인의 자화상이 된다. 그 동질감의 공통분모는 무언가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귀여워>와 <아는 여자>에서 정재영이 연기한 인물은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공통의 결핍을 갖고 있다. 그 결핍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경제적 곤란에서 사회적인 고립, 배우자와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는 나아가 “<나의 결혼원정기>는 정재영이 서민적 코미디 연기에서도 일가를 이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진심을 자꾸만 드러내는 그의 연기는 캐릭터를 자연인 정재영와 자꾸만 동일시하게 만든다. 리수화와 만택과 동치성의 진심은 어찌보면 다 통해있기에 그것이 정재영의 진심인 양 생각케 된다. “연기를 하면서부터 예전 어렵게 살 때의 생각들, 고민들, 주변의 리얼리티들이 새록새록 몰려온다”는 정재영의 기본 자세 또한 그런 ‘착각’을 거들고 있을 터. 하지만, “쌍문동에서 효자동으로, 다시 미아리, 천호동, 가락동, 일산, 그리고 구리까지” 옮겨다닌 정재영 자신의 정서가 아무리 녹아들었다고는 하지만 캐릭터와 배우가 궁극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건 정재영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공감의 동심원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얘기일 게다.

“이견이 있으면, 상대방을 설득시키거나 설득당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만약 내가 용납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과연 어떻게 그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나를 위해서나 작품을 위해서나 좋다고 생각한다.”

어눌함이나 여백이 엿보이는 정재영의 캐릭터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연기가 순간적 감흥에 의한 것이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성보다는 직관을, 계획보다는 감을 믿을 것 같은.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다. <웰컴 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은 “연기가 즉흥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작업을 함께 하면 아주 논리적이다. 굉장히 치밀한 계산이 있는 사람 같다. 어떤 신을 설명하면 앞의 상황과 이렇게 저렇게 맞냐에 따라 정확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슬프다고 하면 그 슬픈 정도를 적절한 수준에서 끄집어낸다”고 말한다.

게다가 정재영은 원칙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에 동의할 수 없다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배우다. 그가 촬영 때마다 감독과 각 장면에 대해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감독이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한다면 그는 ‘잘못된 타협’보다는 ‘올바른 대립’을 택한다. 그토록 절친한 장진 감독과도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을 정도로 이 원칙은 그에겐 절대적이다. <나의 결혼원정기>의 우즈베키스탄 촬영 중 빡빡한 일정 때문에 모니터 확인조차 못한 채 빠르게 촬영을 진행했을 때, 그는 다음날 촬영장에서 감독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무조건 감독님이 시키는대로 할테니 알아서 하라”며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숀 펜 같은 배우들의 영화를 보고 또 보며 연구를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더라. 거기선 얻을 게 없었다. 차라리 저기 앉아있는 사람을 유심히 보는 게 낫다.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실제로 재난을 맞은 사람들의 표정과 동작을 보는 게 더 도움이 된다.”

그 대책없는 원칙주의의 배경이 된 것은 배우로서의 자존심이었고, 그 자존심을 뒷받침해준 것은 나름의 자신감이었다. 그의 배우 이력을 말하자면, 기자나 연출가가 되려다가 교사의 ‘꼬임’에 넘어가 연극반에 들어간 뒤 첫 공연에서 동랑청소년연극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일이며, 서울예대에 들어가 수업을 듣고 장진, 황정민 등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스스로 인정하듯 그가 진짜 배우가 된 것은 학교를 졸업한 뒤다. 프로 무대의 경험이야말로 그가 지속적인 자극과 욕심을 갖게 한 동인이다. 그의 열정은 이상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영화 오디션마다 떨어져 빈둥거리던 20대 중반, 그는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해 방 안 맞은 편에 켜놓곤 혼자서 “미친놈처럼” ‘모노드라마’를 찍었다. “나름대로 캐릭터를 설정해서 혼자서 막 연기하다가, 카메라 밖으로 숨고, 다시 다른 캐릭터로 마구 주절거렸다. 나중에 그 테이프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결혼 전에 완전 폐기처분했다. 애드립은 그때 다 연구한 것 같다.”

그 엄청난 ‘출연’ 경험과 관련이 있는 건지, 많은 사람들은 그의 특별한 강점으로 리액션을 꼽는다. “리액션은 배우로서 살아있다는 증거다. 액션이 주어진 것, 이미 결정된 것이라면 리액션은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액션을 정확하게 받아내는 것 뿐이다. 그러니 매순간 긴장을 놓칠 수가 없다”는 정재영은 <귀여워> <웰컴 투 동막골> <나의 결혼원정기> 등에서 리액션이 주가 되는 캐릭터를 맡았고, 절묘하게 소화했다. “재영이 형은 상대 배우가 너무 편하리만큼 리액션을 잘 해준다. 내가 액션을 잘못 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장면이 설정한 목적에 맞게 가도록 리액션을 한다”는 신하균의 말처럼 그의 리액션은 장면과 상대 배우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한 리액션이 최고로 좋은 배우”라는 장진 감독의 말 또한 같은 맥락에 자리한다.

“이제 막 본격적인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한 단계일 뿐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고갈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내가 쌓아둔 것을 보여줘왔다면 이제부터는 모험이다.”

정재영이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의 계보를 잇는 대배우로 발전할지,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그의 품이 아직 다 펼쳐지지 않았기에 잠재력을 가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는 외양만 보여주는 껍데기 연기나 내면의 열기를 한꺼번에 불살라 소진시키는 연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보다 다양한 캐릭터와 만나는 동안에 그런 연기의 자극성에 취해버릴지도 모른다. 이 와중, 어디에선가는 그가 비슷비슷한 캐릭터만을 스스로에게 끼우려는 것 같다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정재영에게 앞으로의 작품은 모두 큰 고비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재영이 우리의 기대감을 빨아들이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이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가진 배우와의 만남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저야 뭐 비오면은 그냥 맞고요. 뭐 슬플 때는 거울도 보고, 뭐 야속하면은 그냥 웃기도 하고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씩 웃는 <귀여워> 속 머시기의 표정은 우습지만, 헛헛한 적적함을 담았고,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다 자빠뜨려버려”라고 절규하는 만택의 표정은 애절한 사랑과 함께 가난한 자들의 고단함을 머금었다. “<아는 여자>에서 따뜻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냉소적인 매력을 담아냄으로써 이면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었다”는 선배 송강호의 이야기는, 강한 연기를 하면서도 나약함을 드러내고, 온화한 연기를 하면서도 쌉쌀한 느낌을 전하는 정재영의 ‘무언가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성향’, 즉 ‘삐딱함’에 대한 찬양이리라.

이제, 정재영의 모험은 시작됐다. 그 모험이 <나의 결혼원정기>의 대사처럼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성과를 이룬다면, 우리는 제대로 곰삭아 달콤쌉쌀시큼털털해진 정재영의 연기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의상협찬 스타일리스트 신래영·의상협찬 휴고보스, Comodo, 폴로, British Knights, Interc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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