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모두들, 괜찮아요?> 촬영현장 [2]
2005-10-19
글 : 남은주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나는 성실한 인간이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의 촬영현장에서는, 여기 있는 남자들은 모두 극중 상훈 같은 인간들이라는 괴담이 떠돌았다. 일일이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과연 이순재가 본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찍던 날, 본처 자식들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 쉬는 시간에 나누던 이야기를 엿들은 바는 이러하다.

성악가 임정현(큰아들 역): 너는 진짜 남선호 감독이 한량이라고 생각하냐?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지?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계수단이라고는 없는데, 예술을 하겠다고 몇년씩 집요하게 매달리면 노는 거냐? 놀지는 않고 돈만 못 번 거지.

배우 박영신(둘째딸 역): 돈이 되는 노동이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노동이 있잖아. 누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노동을 하고, 누구는 창작행위는 못하고 먹고살기 위한 노동만 해야 하니까 말이 안 되지.

배우 김요진(셋째며느리 역): 그리고 남편이 예술 행위를 할 때, 아내는 부담이 훨씬 더 커. 가사일도 해야 하잖아. 예술한다고 집안일 안 할 수 있는 여자는 몇이나 되냐?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오기민 PD의 생각은 이렇다. “신인감독한테 마누라 등쳐먹고 살아온 이야기 이상으로 절절하고 구체적인 체험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제작을 결정했는데, 처음에 이 영화의 제목을 <영화감독이 되는 법>으로 하려고 했다가 <모두들, 괜찮아요?>로 바꿨잖아요. 한 여자에게 철딱서니 없는 세 남자가 매달려 피빨아먹고 등골 빼먹고 사는데 영화감독이 되고 안 되는 게 뭐 중요하냐는 거죠. 처음부터 초점을 남편, 아버지, 아들을 매달고 사는 그 여자에게 두기로 했지. 그러다보면 해피엔딩 속에서도 가슴 뭉클한 느낌이 남고.”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하필 코미디 형식의 영화로 만든 오빠, 남선호 감독의 최후진술은 이렇다. “집에 있었다고 놀았던 건 아니지.”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거짓말쟁이지만 성실한 인간이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어렵고, 고생하는 건 성실한 내 마누라다.”

가족은 성장의 토양이다

“현대의 가정은 전형성도 잃었고 그렇다고 새로운 합의도 없는 채 저마다 떠돌고 있어. 모두 다른 결혼들이지.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이 되는 거야.” 가족간의 사랑을 강조한 건 남자들이었다고 소설가 전경린도 쓴 일이 있다. 사랑 때문에 여성이 자기 역할에 합의한 것처럼, 인간적인 조처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남자들의 수작은 결혼한 여자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에서 결과적으로는 한 여자를 노예처럼 부렸던 세 남자가 그 대가로 여자에게 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놈의 사랑. 가출해도 꼬박꼬박 딸에게 돌아오며 아버지는 대문에서부터 ‘우리 공주’를 불러젖힌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남편은 사랑뿐만 아니라 이해까지 요구한다.

아버지에게 딸이 처음으로 대드는 장면. 사위가 장인을 감싸지만 딸의 눈에는 그도 남보다 나을 게 없는 가족일 뿐이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흐트러진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제창규 촬영감독은 “아버지라는 과거의 유물, 남편이라는 결혼의 짐을 모두 지고 가는 민경이 이 영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 한국사회 가부장제의 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다고 촬영이 끝난 소감을 밝힌다. 남선호 감독은 가족관계에 대한 수다한 문제제기를 굳이 가장 웃기고 한심한 에피소드로 끌어내는 전술을 택했다. ‘심각해지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단다. 심각한 이야기일수록 슬쩍 웃기며 털어놓는 방식은 평소 오빠의 화법이다. 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희화화하고 싶을 만큼 왜 가족은 그리 힘겹고 답답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만 집을 떠나지 않는다. 결혼하고도, 더 나이들어서도 떠나기도 한다. 가정에서 벗어나 내가 짊어진 일상의 무게를 구체적으로 직시할 때 성장이 시작된다. 한참을 생각해본 감독의 대답은 이렇다. “이 영화는 절대 그런 영화가 아닌데.” 난 그래도 한사코 이 영화가 성장영화였으면 좋겠다고 고집한다. 왜냐하면 성숙이 좌절되어 행여 그 자리에 자폐가 생겨날까 염려하며 오랜 시간 오빠를 지켜봤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제 갓 태어난 핏덩어리 같은 자신의 영화를 안고 세상으로 나서는 그에게 삶이 더욱 명료한 성장의 대가를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기 위해 집을, 가족을 갖는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의 세 연기파 배우들

춤꾼이 된 대발이 아버지_ 이순재(원조 역)

“영화는 역시 기다림의 예술이야.” 18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이순재의 한마디다. “예전엔 밤새 신성일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요즘엔 마음에 드는 컷을 뽑느라고 한나절을 기다리지. TV처럼 후딱 만들어 치우는 게 아니야.” 한국영화가 정밀해진 데 놀라면서, 후배들이 참신한 데 흐뭇해하면서 <모두들, 괜찮아요?>의 빡빡한 촬영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참이었다. 무게감 있는 목소리만큼이나 존재감이 강한 배우. 영화 속 실제 인물들을 알고 있는 나는 원조 역의 이순재를 보며 가장 실제 인물에 가까우면서도 그 이상의 풍채를 빚어내는 솜씨에 감탄했더랬다. “원조는 춤이 도락적 경지를 넘어서 전문가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야. 젊을 때 외도할 목적으로 추다가 본가에서 퇴출당하고 딸에게 얹혀 살지.” 가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노인 역을 맡았지만 실제로는 아흔 넘은 어머니와 외손주까지 거느린 다복한 ‘가장’이다.

이 남자가 살아남는 법_ 김유석(상훈 역)

아침에는 커피 마시고 저녁에는 차 마시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인 이 생활.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바로 여러 해 전 자기 모습이 아니던가. 러시아 셰프킨대학에서 배우 수업을 받고 와서 영화 <강원도의 힘>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그 ‘진공의 시간들’을 보낼 때 상훈처럼 부인에게 얹혀 살았더랬다. 그래서 캐릭터와의 일체감이 누구보다 강하다. “<토지>의 구천이나 <왕의 여자>의 임해군처럼 캐릭터 강한 역할보다 우유부단하고 착한 남자를 연기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괜찮아요?>에서는 저만이 이해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자산으로 삼기로 했지요. 생각해보세요. 누가 가장 괴로운지. 상훈은 내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매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페이소스에 젖을 여유도 없다. 그 시간에 집안일, 육아에서 서바이벌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래서 김유석표 이 영화의 부제는 ‘이 남자가 살아남는 법’이란다.

가족의 발견_ 김호정(민경 역)

이렇게 소박한 작품이 영화가 될 수 있는 걸까? 나라면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왜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성깔있거나 분위기 있거나 하면서 인상을 남겨온 배우 김호정에게 이 영화는 온통 의문이었다. “배우 이외의 생활은 없어요. 그때그때 맡은 캐릭터로 인생을 들여다봐요. 지적이고 차갑거나 비극적인 역할을 주로 한 덕분에, 내가 생활에는 약했구나 싶었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도 나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찍었습니다. 영화를 찍다보니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사는 데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아주 작지만 스스로에 대한 희망도 생기고요.” 본래 섬세하고 열정적인 이 배우가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난생처음 모든 스탭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정도로 자상해진 것은 민경 역에 완전히 동화된 덕분일까? 그래도 장면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인 김유석과의 연기 대결이 치열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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