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핀터(1930~)는 사뮈엘 베케트(1906~89) 생전에 많은 시나리오 각색 원고를 보내고 의견을 구했다. 마지막으로 핀터가 베케트를 만난 곳은 파리의 베케트 집이었다. 베케트가 매우 낙담해 집에서 가료를 받고 있을 때, 핀터는 ‘기분 전환을 위해 제가 카프카의 <심판> 시나리오를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중부유럽 유대인 카프카의 정신적 혈연은 파리의 아일랜드 작가 베케트, 그리고 영국의 유대인 작가 핀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부조리한 근대적 삶에 대해 그보다 더 부조리한 웃음으로 맞섰던 핀터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은 뒤늦게 노벨상으로 치하했다. 극작가, 배우, 각색가, 연출가로 여전히 현역이기는 하지만 핀터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인 1957∼65년에 전성기를 누렸다. 불가해하고, 긴장이 넘치며, 느닷없는 ‘위협의 코미디’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가한 그에게 ‘핀터레스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핀터레스크’에 각주를 더한 소사전과 그의 영화세계로 핀터의 세계를 요약했다.
해롤드 핀터는 런던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등을 레퍼토리로 삼는 극단 배우로 연극계에 발을 내디뎠다. 징병을 거부해 감옥에 갈 뻔했으나 다행히 벌금형을 받았다. 나치의 런던 폭격과 런던의 반유대주의는 소년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냈다. 전쟁의 파열음은 소년의 귀에 깊은 틈을 벌려놓았고, 소년은 폭격으로 팬 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외부의 위협에 속수무책인 핀터 초기 연극의 주인공들은 이런 핀터의 경험 속에서 자라난 인물들이며, 그들이 만드는 핀터 특유의 분위기를 사람들은 ‘핀터레스크’라 부른다. 핀터는 1980년대 이후 작품 속에서 정치적 풍자와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최근 그는 미국의 중동정책과 블레어의 이라크 참전을 비판했다. 핀터는 현역이기는 하지만 걸작을 지속적으로 써온 작가는 아니다. 스웨덴 한림원과 관객이 주목할 만한 핀터의 절정기는 1950∼6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일부였다. 다음은 핀터의 이름(pinter)으로 풀어보는 핀터의 작품세계 풀이 소사전.
핀터의 극에서 늘 문제되는 것은 권력의 불균형이다. 평화와 안정이 아닌 불균형과 금방이라도 파국이 찾아올 듯한 권력의 불평등이 핀터의 세계를 구성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쌍욕을 해대며 불화하고(<귀향>), 잠시 몸을 쉴 곳을 찾는 60대 부랑자는 머리를 다친 형과 사업가 동생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박쥐처럼 형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관리인>). 사람을 죽이러 온 폭력배들 사이에서도 늘 위계가 문제가 되며(<생일파티>), 곤궁한 위기에 함께 몰린 동료들간에도 권력의 불평등은 심각하다(<벙어리 웨이터>: 음식을 운반하는 승강기를 이른다).
그런데 그 권력의 실체란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생일파티>의 골드버그는 자신의 권력이 고른 치아에서 왔다며 자신의 입을 세게 쳐보라고 후배인 맥캔에게 명령한다. 이렇듯 핀터의 극에서 외부의 알 수 없는 권력이 가하는 횡포는 매우 부조리하며 카프카적이다. 황당한 권력의 횡포는 가족 사이라고 해서 눈감아주는 법이 없다. <귀향>의 아버지는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몇년 만에 돌아왔는데 ‘악취나는 매독 걸린 잡년’을 데려왔다고 욕을 한다.
핀터는 성에 스며든 권력관계에 대해서도 예민하다. 핀터의 주인공들은 정조 같은 도덕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숨기기, 짝 가로채기 등 사랑 속에 숨은 미세한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사랑은 순수하지 않고, 매력과 기만으로 움직이는 수직의 위계 속에 있다.
핀터의 불안정한 세계에선 언제라도 균형과 평안이 바스라질 듯한 불안함이 있다. 그 불안은 외부에서 불쑥 들어오는 손님들로 표현된다. <컬렉션>의 제임스, <생일파티>의 골드버그, <관리인>의 60대 손님 등 이들은 초대장도 없이 중산층의 삶 속으로 불쑥 들어와 그 삶의 바닥을 통째로 흔든다. 평온한 가정이란 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들 각자도 서로에 대해 별 아는 게 없음이 드러난다.
핀터를 대표하는 ‘위협극’이 내밀하게 작동하는 권력의 분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치정극이라 부를 만한 작품들은 부르주아 가정의 기초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핀터 작품 가운데 한국에서 인기를 끈 작품으로 <정부>를 번역한 <티타임의 정사>가 있다(원제인 ‘the lover’는 남자 정부를 뜻한다). 남편은 퇴근 뒤 돌아와 아내에게 ‘오후 3시의 티타임에 찾아온 정부와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생각도 하느냐’고 묻는다. ‘서류를 검토하는 당신을 생각하며 더 짜릿해진다’고 아내는 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할 바꾸기 게임일 뿐이다. 남편은 젊은 아내의 정부로 변장을 해서 아내를 달아오르게 한다. 무미건조한 껍데기뿐인 결혼생활은 이런 역할극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어서는 듯 보이지만, 이 규칙은 곧 깨져 나갈 운명이다.
<배신>도 부부, 정부끼리의 상호 배신이라는 구조를 통해 부부생활이라는 제도의 허망함을 꿰뚫는다. 남자는 친구의 아내와 7년간 ‘몰래’ 사귀었다고 믿지만, 여자는 벌써 몇년 전에 자신의 남편에게 알렸다. 절친한 친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친구에게 말하지 않은 채 계속 친구 사이로 남는다. 그러나 그 남편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 모두가 서로를 속임으로써 관계를 유지한다. <컬렉션>은 동성애 커플과 이성애 부부의 환상을 다루고 있는데, 남편은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고백을 듣고 아내와 함께 잤다는 남자를 불쑥 찾아간다. 그러나 아내의 말도 남자의 말도 둘 다 믿을 건 못된다.
핀터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이다. 나치의 2차대전 공습 때 런던에서 듣던 야간 폭격음은 핀터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메인테마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핀터는 뒷문을 열면 정원이 불타고 있는 게 보였노라고 회상한다. 반유대주의가 자신을 극작가로 만들었노라고도 술회하고 있다. 그는 밝은 세상에서 온 사람은 아니었다.
핀터의 세계에서 환하고 밝고 따스한 관계는 없다. 모두 뒤틀리고 의심하고 배신하고 근근이 환상으로 현실을 지탱한다. 불모의 관계망만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암울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환기이며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다. 징병 거부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전쟁이 안겨다준 폭력에 대한 염증이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정치극과 비판적인 발언을 해왔다. 1960년대 초기 작품 속에 파묻혀 있던 저항의 목소리가 그 이후 돌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이 주는 진동은 멀리 뻗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