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해롤드 핀터의 작품세계 풀이 소사전 [2]
2005-11-04
글 : 이종도

<위트>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엠마 톰슨의 아버지역으로 출연한 해롤드 핀터

핀터의 연극은 불안의 연극이다. <생일파티>는 핀터의 불안이 어떤 불안인지를 잘 말해주는 작품이다. 갑자기 주인공도 모르게 생일파티가 준비된다. 하지만 그 생일파티는 고통과 폭력의 축제이다. <귀향>은 안락한 집으로의 귀환이 아니라 형제들과 아버지가 아내를 호시탐탐 겁탈하고 창녀로 만들려는 지옥으로의 복귀다. 이런 예기치 못한 긴장이 핀터의 작품에 젊음과 활기를 준다.

그의 연극은 짝의 구조로 되어 있다. <생일파티>는 메그와 피티라는 하숙집 주인 부부, 골드버그와 맥캔이라는 청부살인업자로 이루어져 있다. 메그는 젊은 남자에 대한 환상으로 살고 피티는 아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골드버그는 명령하고 비난하며 맥캔은 거기에 순응한다. 이 구조를 2명의 구조로 축소하면 <관리인>과 <벙어리 웨이터> 그리고 <정부>의 구조가 된다. 다시 늘려서 남녀 커플로 확대하면 <배신>이 된다. 핀터의 연극 속 한쌍은, 한 인물의 의식과 무의식, 안정과 혼란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짝패는 대개는 권력에 있어서 큰 편이 작은 편을 내리누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긴장이 생긴다.

짝패 가운데 한쪽은 길들이려 하고 한쪽은 그것을 거부한다. 한쪽은 복종과 인정을 요구하며 힘으로 누르고, 다른 한쪽은 배신과 불복종 또는 침묵으로 되갚는다. <관리인> <배신> <벙어리 웨이터>는 그런 불편한 긴장 관계만으로도 극에 팽팽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체제에 깊이 순응하고 있는 극중 인물들은 무기력하게 폭력을 당한다. 최후는 그래서 더욱 허망하다.

핀터의 연극은 마치 안개와 운무처럼, 바닷가의 파도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처럼,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간다. 좀처럼 쉽게 손바닥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작품과 다르다. 핀터의 상황은 여느 부조리극보다 구체적이며 대사는 일상으로부터 건져올린 구어체이다. 핀터의 대사는 면도날 같이 날카롭고 시적이며, 그는 휴지부를 잘 이용할 줄 안다. 긴 칼이 아니라 단도 같은 대사들. 그리고 반복과 말장난을 통한 효과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배우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떤 대사에 관객이 침묵하는지 안 하는지 자기는 알고 썼다고 했다(<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1961)).

<귀향>
<배신>

그러나 핀터의 극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방>에서 지하실에 사는 흑인은 누구일까, 왜 남편은 그토록 냉담할까. <생일파티>에서 스탠리를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스탠리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안경이 부서지고 어디론가 납치까지 되는 걸까. 핀터의 극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마치 바닷바람에 부식되는 건축물처럼, 극중 인물들은 폭력 앞에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폭력의 실체는 안개 저편에 있다. <벙어리 웨이터>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방>에서 지하실에 머물렀다가 갑자기 찾아온 흑인의 정체는 끝내 알 수가 없다. 이런 모호하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작가는 불친절하게 방치한다. 극중 인물들도 그 분위기를 이겨낼 힘은 없다. 친자식 같은 스탠리가 납치되는 것을 보면서도 <생일파티>의 피티는 무기력할 뿐이다. 스탠리에게 집착하는 아내가 자기가 어제 스탠리 생일파티의 여왕 같았다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안개를 걷어내고 들어가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핀터의 구조물은 단순하다. 복도나 창은 없고 덩그러니 방만 있다. 그 방은 벌거벗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누추하며 빗물이 새고 대단한 가구도 없고 온기와 따뜻한 식탁도 없는 그런 방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그렇다고 이 불안하고 어두운 방을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밖은 더 캄캄하고 어둡고 폭력과 무질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일파티>에서 스탠리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지만 하숙집 방을 벗어나지 못한다. <관리인>에서 60대 노인은 자신의 증명서류도 찾고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잠시 머물러 있는 방에서 나올 용기가 없다.

데뷔작 <방>은 이후 핀터의 극이 갖는 구조를 잘 설명해주는 원형이라 할 수 있다. 60대 다정한 아내와 50대 무정한 남편이 동거하는 공간이다. 바깥엔 차갑고 거센 겨울바람이 불어닥치고, 젊은 부부가 자신들이 이사할 방이라며 찾아오고, 지하실에서 낯선 흑인이 찾아온 뒤 아내는 눈이 먼다. 방은 아내가 지키려고 하는 따뜻하고 안정된 공간이지만, 결국 방엔 암흑만이 찾아온다. 여기는 또 하나의 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방으로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은 폭력과 상처를 남긴다. 폭력은 무작위와 반복의 형식을 통해 순환한다. 핀터의 극 전개 방식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돌아가는 상징계 이면에서 불쑥 튀어나와, 현실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실재계의 등장 방식이기도 하다.

각색자 해롤드 핀터

<프랑스 중위의 여자> 등 장편영화만 16개 각색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핀터는 극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영화 각색도 많이 했다. 배우 출신답게 연기도 꾸준하게 했다. 배우인 첫 아내 비비안 머천트는 핀터 작품의 주인공 노릇을 많이 했다.

핀터의 영화 목록은 단편과 장편 모두 합쳐 모두 54편에 이르지만 TV용 영화와 외국에서 판권을 사서 제작한 것들이 포함된다. 장편영화만 따진다면 16개 작품이다. 주로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스콧 피츠제럴드(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마지막 타이쿤>) 등 다른 유명 작가의 소설을 각색했다. 대개 덜 알려지고 상업적인 성공과도 관련이 없지만 높은 평가를 받은 이른바 문예영화들이라 볼 수 있다. TV를 포함해 21개 작품에 출연했는데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위트>에서 에마 톰슨의 아버지로 잠깐 나왔던 것처럼 단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는 네편 연출했다.

장편영화로 최근작에는 앤서니 홉킨스 주연, 카프카 원작의 <심판>(1993), 존 말코비치 주연의 <옛 시절>(1991), 폴커 슐뢴도르프가 연출한 <핸드 메이드 테일>(1990), 폴 슈레이더 감독의 <컴포트 오브 스트레인저>(1990), 제레미 아이언스와 벤 킹슬리가 연기 대결을 펼친 <배신>(1983)(1978년 연극이 원작으로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 등이 있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 작품에서 아나운서와 바람을 피웠던 핀터의 실제 경험을 연기했다.

핀터의 영화목록에서 돋보이는 건 배우들이다. 존 트래볼타(<지하 아파트>) 같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배우나 줄기차게 핀터의 영화에 나왔던 제레미 아이언스, 그리고 존 길거드(<사장된 땅>)와 로렌스 올리비에(<컬렉션>), 앨런 베이츠(<컬렉션> <관리인> 등), 그리고 <사건>과 <하인>에 출연한 더크 보가트 같은 선 굵은 배우 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배우로서 핀터의 작품에 가장 많이 얼굴을 내밀었으며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아내였던 비비안 머천트이다. 주요 연극 작품의 주연뿐 아니라 <귀향> <정부> 등 핀터가 자기 작품을 각색한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핀터 자신도 자기 작품에서 중요한 배우였다. 1985년엔 그의 출세작을 영상으로 옮긴 <생일파티>에서 악당 골드버그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생일파티>는 1968년에 윌리엄 프리드킨이 연출하기도 했다.

아마 각색자로서 그를 가장 널리 알린 것은 1982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오른 <프랑스 중위의 여자>(존 파울즈 소설 원작)일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제공 REX,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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