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에 시나리오를 받아서, 6시까지 읽고 6시 반에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하고 싶다고, 해야겠다고. 무엇보다 단번에 읽힌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내가 까불고 껄렁댄다고, 광태에 더 가까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광태는 자신 없었다. 사실 여자들에 대한 광태의 마음이, 사랑은 아니지 않나. 내가 광식이에 공감한 것은 여자를 대하는 광식이의 방식, 그런 힘든 사랑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언젠가 짝사랑을 할 때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하는 내 모습을, 영화로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짝사랑은 사랑하는 마음이 정점에 이른 채로 끝나는 것이다. 상대에게 실망할 일도 없고, 시들해질 일도 없다. 사랑만 가득한 마음이 바로 짝사랑의 본질이고, 그래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된다. 광식이 세대의 삼십대 관객이라면, 그런 연애, 그런 정서를 이해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연기를 하면서, 범주를 넓혀가는 게 정답인 것 같다. 남 보기에는 ‘그게 그거’일 수 있지만, 조금씩 다른 역할들을 해왔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한 건 없는 것 같다. (웃음) 다만,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에 취해 사는 경향은 있다. 나와 가장 다르다고 생각되는 <프라하의 연인>을 찍으면서는 생활 자체가 껄렁해진 것 같다. 요즘 <광식이 동생 광태> 홍보를 하면서, 소심한 모습으로 돌아가려니, 영 적응이 안 된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모습들을 찾아, 내쪽으로 역할을 당겨오는 편이다.
<세이 예스> 끝난 뒤에, 내가 이 영화로 주연을 했으니까, 이제 또 주연을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생각으로 살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걸 나중에 알았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열심히 하면, 그게 잘하는 거겠거니, 그렇게만 믿었다. 그 이후엔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 <프라하의 연인>으로 보여주는 관심, 물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달 지나면, 누가 기억이나 하겠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걸 점점 더 절감한다. 끝이 안 보인다는 점에서, 연기는 짜증나면서도 매력적인 일인 것 같다.
주혁이 동생 태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생이다. 난 욕심이 별로 없고, 있다 해도 별로 드러내는 편이 아닌데, 태규는 연기에 대한 욕심도 많고,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다. 호흡이 잘 맞아서, 대사 칠 때 정말 편했다. 특히 사우나 끝내고 내복 차림으로 계란 까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 원신 원컷으로 찍었고, 정말 좋아했는데, 최종본에서 잘려나가 안타깝다.
태규 형 주혁이
주혁이 형 연기를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 특히 과장되지 않게 수위조절하는 법에 대해서. 난 맘대로 감정가는 대로 하는 스타일이어서 힘들 때가 있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고 치밀하지가 않으니까. 근데 형 연기를 보면 어떤 신에서는 정말 별것 아닌 작은 표정변화에도 느낌이 확 온다. 둘이 함께 출연하는 분량에선 호흡이 잘 맞아서 별것 아닌 장면에서도 시너지 효과가 느껴졌다. 워낙 주혁이 형이 리액션이 좋잖나. 배우들은 그렇게 리액션을 받으면 재밌어하고 연기도 좋아진다. 광태가 광식에게 잘못을 고백하는 침대신 같은 경우도, 덕분에 광태가 광식에게 바싹 다가가는 제스처가 추가되면서 더 좋아졌다. 주혁이 형한테 부러운 점? 글쎄…. 키? (웃음)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소속사에 알리지 않고 바로 하겠다고 연락했다. 일단은 내가 광태를 연기하면, 여태껏 영화에서 본 적이 없는 바람둥이 캐릭터가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재를 한두살 연상이라고 설정했는데, 항상 자기 전에 30분씩 누나들 앞에서 재롱을 떨었던 게 도움이 됐다. 이럴 때 여자들이 좋아했었지, 라는 걸 떠올리면서. 누나만 둘인데, 중3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나한테 큰소리냈다가 뺨 맞고 귀가 먹먹했던 이후로, 누나들이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었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게 바로 순정이다. 광태도 순정파다. 한 여자와 12번 자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잖나. 나이가 들수록 연애가 힘들어지는 건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연애의 방식도 달라진다. 그래서 광태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항상 먼저 고백하는 편이었다. 설사 거절을 당해도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된 거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러다 거절당하면? 쿨한 척, 약간 싸늘한 척 대하는 게 중요하다. 고백한 뒤 며칠 동안은 절대 연락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연락해서는 별말 안 하고 끊고. 그러면 상대가 알아서 다시 전화를 한다.
사실은 차분한 캐릭터를 할 때가 제일 편하다. 하지만 광태 같은 역은 원래 목소리보다 한두톤 높여야 되고, 매번 어떻게 웃길까 고민해야 하는데 정말 힘들다. 침대에서 폴짝 뛰어서 쓰러지는 장면이나 OECD 운운하면서 경재에게 수작 거는 장면 등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리허설 때는 동선을 맞추는 수준에서 해보고, 첫 테이크를 노린다. 감독님한테 “지금 재밌는 거 생각났는데 한번 보세요, 이상하면 얘기해요” 이러면서. 외국 드라마를 보면, 평범한 바스트숏에서도 배우들이 어깨나 손 등을 많이 움직이는 게 좋아 보였다. 이 영화를 하면서 동작을 많이 연구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컷을 나눌 경우 연결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것.
A형이라서 그런지 정말, 정말 소심하다. 인터뷰 기사, 영화 관련 기사 모두 다 챙겨보고 절대 안 잊어버린다. 요즘은 기자분들이 자꾸 “만년 조연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을 쓰시는데, 사실 난 데뷔작에서도 주연이었다. 얼마나 소심하냐면, 현장에서 오케이 사인도 못 믿는다. 왜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오케이를 했을까, 내 연기를 포기한 건가, 이러면서. 이런 성격에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