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핑크영화의 산증인, <당한 여자>의 시모모토 시로
2005-12-05
글 : 김수경
사진 : 오계옥

시모모토 시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그가 핑크영화에 340편이나 출연한, 그것도 “살인마, 강간마” 등의 이름으로 맹활약한 “변태 전문배우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 1948년 8월14일 오사카에서 태어난 시모모토는 <아르바이트 제2호>라는 핑크영화로 은막에 데뷔했다. 그의 영원한 술친구 다카하시 반메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이번 메가박스일본영화제에 출품된 두 사람의 영화 <당한 여자>는 선술집을 배경으로 한다. 지난 11월12일 메가박스 근처 카페에서 만난 시모모토는 “영화 속 술집은 둘이 드나들던 선술집과 똑 닮았다”고 설명했다. 상영이 끝난 뒤 감회를 묻자, “이 영화를 보는 것도 24년 만이다. 일본사회에서는 이미 잊혀진 존재인 핑크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는 것 자체가 가슴이 벅차다”라며 기뻐했다.

그는 핑크영화의 산증인이다. “내가 출연할 당시는 핑크영화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라고 시모모토는 설명했다. 한창때는 1년에 36편, 평균적으로는 1년에 15편을 출연한 빽빽한 그의 필모그래피가 이를 입증한다. “300만엔에서 320만엔의 예산으로 사나흘 만에 정신없이 영화를 찍던 시절”이라고 그는 기억했다. 사실 시모모토는 <당한 여자>의 젠처럼 착하고 우수에 어린 서민적인 역을 맡은 적은 별로 없다. 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야쿠자나 ‘마’(魔)자가 뒤에 붙는 엽색 행각을 벌이는 악한”이 그의 몫이었다. 핑크영화와 V시네마를 포함해 600여편에 달하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렇게 선량한 얼굴과는 정반대의 악행 연기로 새까맣게 채워졌다. 인터뷰에 동석한 데라와키 겐 문화청 부장은 그를 “다카하시 반메이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귀띔한다. “다카하시 구미(組)는 일종의 공동체 혹은 가족”이라는 시모모토의 설명처럼 둘은 평생 영화와 술을 벗삼아 붙어다녔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조연배우 오스기 렌도 이 공동체 멤버이다. “언젠가 촬영장에 오스기가 500엔짜리 양복을 입고 와서 자랑하더니 다음날 와서 ‘세탁했더니 양복 올이 다 풀려버렸다’고 울상을 짓던 일이 기억난다”며 시모모토는 웃음을 터트렸다.

“<소녀를 덮치다> <기쁜 나머지 소녀를 덮치다> <지하철 레이프> 등의 핑크영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는 시모모토는 핑크영화가 “영화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든 단점, 연출과 기술 파트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인을 발굴, 육성했고 새로운 영화의 실험실 역할을 수행한 장점이 공존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본영화의 중심이 된 수오 마사유키, 이소무라 이쓰미치, 다키타 요오지로, 이즈쯔 가즈유키, 구로사와 기요시 등의 감독이 그와 함께 작업했다. “배우는 항상 무(無)라고 생각한다. 하얀 캔버스라고나 할까”라는 40년차 이 남자배우는 “아내는 도망가고 울어대는 7살짜리 아들만 남겨질 정도로 평생을 따라다닌 빈한함이 가장 힘들었다”고 전했다. 그래도 “배우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죽을 때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행복했다”고 덧붙였다. <호타루>의 다나카 유코, ‘조제’ 이케와키 지즈루가 함께 출연한 다카하시 반메이 감독의 2005년 신작 <히비>에서 우리는 이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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