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발견! 여성감독 기대주들 [2] - 박은영 감독
2006-01-13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배반> 의 박은영 감독

사소함에서 절대성을 발견한다

살다보면 거창한 모험이라도 한 듯 감정의 진폭이 커지는 어느 날이 생기곤 한다. 그저 포기하거나 놓아버릴 수도 있던 무언가에 매달리고 집착하여, 찢어진 마음이 바닥을 헤매다가,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 박은영 감독이 영상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Rendez-vous>는 돌이켜보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그 순간만은 절대적이었을 시간을 발견하고 느끼는 영화다. 초여름 햇살에 달아오르고만 젊은 여인. 새로 산 원피스를 비닐봉지에 넣어 흔들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햇살을 타고 치마폭 밑으로 살그머니 새어들어간 열정이 눈물로 폭발하기까지 그녀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떠다닐 수밖에 없다. 마치 그 거리를 함께 걷고 있는 듯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회오리를 일으키는 절묘한 순간을 잡아낸 <Rendez-vous>는 어디든 나가고 싶어하는 이십대 초·중반의 여자, 은주의 반나절을 담은 영화다. 그녀는 친구를 따라 엉뚱한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혼자 쇼핑도 하지만 틈틈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졸라댄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도 사이코라고 욕해도 이미 들떠버린 은주의 마음을 잠재울 수는 없다.

박은영 감독이 <Rendez-vous> 이전에 만든 영화 <배반>도 누군가의 뒤를 따르며 파열하는 순간을 그대로 잡아올린 듯하다. 이 영화는 아마도 이십대 중반을 막 넘긴 듯한 세 여자의 이야기다. 이공계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서영은 따로따로 친구 선주와 민희를 만나고, 그들이 서로에 대해 혹은 그들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다가 염증을 느낀다. 그들은 왜 서로에게 그토록 무자비한가, 어째서 귀를 틀어막은 듯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가. 그리고 어느 저녁 참고 참았던 서영의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작은 짜증이 쌓이다가, 마찬가지로 작은 파국을 맞는, 작은 이야기. 졸업을 하고 나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박은영 감독은 그처럼 가슴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도 삶은 이전처럼 별일 없었다는 듯 차곡차곡 흘러갈 것이다. 그럼에도 새옷을 차려입고 애인을 만나러가는 은주의 발길은 뿌듯하고, 술기운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택시 좌석에 몸을 묻는 서영의 눈길은 적막하다. 박은영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다시 떠올리기가 싫어서 팽개쳐두었던 어느 하루를 문득 챙겨주고 싶어진다.

-<Rendez-vous>는 매우 사소한 순간에 주목하는 영화인데요. 처음 이 영화를 떠올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요.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웃음) 2004년에 영상원 졸업작품으로 찍기는 했지만 시나리오는 몇년 전에 써두었거든요. 봄에 팔랑팔랑 돌아다니는 여자 이야기를 그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깊게 고민하진 않았어요. 이게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볼 수 있는 영화인가 싶긴 했죠. 시나리오를 몇장 써봤는데 도저히 영화가 될 것 같지 않아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에피소드 한두개나 대사는 고친 데가 있지만 거의 그대로 찍었어요.

-<마담 보바리>를 인용한 자막으로 영화가 시작되던데요.
=원래 그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주제를 집약한 문장은 아니더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마디가 있었으면 했어요. <Rendez-vous>가 그렇게 선명한 영화는 아니잖아요. 그건 어느 거지가 하는 말이에요. 마담 보바리가 마차를 타고 남자를 만나러 다니는데, 그녀를 향해 말한 건지는 정확하지 않아도, 놀리듯 말하는 거예요. “화창한 날의 후끈한 열기에 못 이겨 젊은 아가씨는 사랑을 꿈꾼다네.” 봄바람 때문에 여자가 바람이 난다는 뜻이죠.

-은주를 맡은 배우는 영화를 거의 혼자 끌어가는데도 연기가 자연스럽고 편안하더군요. 어떻게 캐스팅했나요.
=같은 학교 미술원에 다니던 친구예요. 주인공이 혼자 영화를 끌어가니까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 돌아다니다보니 그 친구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친한 친구와 함께 봤는데, 배우로 괜찮겠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용기가 없어 말을 못 걸었어요. 그렇게 몇번을 보면서 말을 못 하다가 마침내 부탁을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을 처음 본 친구로 착각했더라고요. 그 오해 때문에 캐스팅한 거죠. 은주는 일단 얼굴이 매력적이어야 했고요, 꼭 예쁘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계속 전화를 하니까 목소리가 좋았으면 했어요. 들으면 믿음이 가는 목소리가 있잖아요. 마침 그런 친구를 찾아서 다행이었어요.

나 자신을 관찰하는 편이에요

-깨끗한 흑백 화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흑백이 더 영화 같잖아요. 컬러 화면은 너무 생생하고 현실감이 눈에 다가오니까. 제일 큰 이유는 한번쯤 흑백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거예요. 좋아하는 영화 중에 흑백영화가 많거든요. <Rendez-vous>는 학생이 만든 영화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가진 장점이 무엇이고 이걸 어떻게 보여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고, 내키는 대로 찍었어요.

-드라마틱한 소재가 아닌데도 지루하지 않은 건 은주의 감정이 매 순간 변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변화가 모호해서 속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요.
=은주가 남자친구를 만나야만 하는 각기 다른 이유가 계속 생기는 거죠. 토요일인데, 만나줄 것 같던 남자는 약속이 있어 가버리고, 날씨는 너무 좋고. 은주가 왜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어하는지 차곡차곡 길을 쌓아가려고 했어요. 조금은 이상한 길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사랑하면 하는 거지 꼭 만나야 하는 거냐고 답답해하더라고요. 하지만 나는 은주가 남자친구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무언가 쌓여오다가, 그 순간 열정이 터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 나중에 남자친구가 마지못해 만나자고 할 때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나, 후회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웃음)

-이런 영화는 시작보다 끝이 더 힘들 것 같아요. 어디서 이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지. 어떻게 결정을 했어요?
=은주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장면도 찍기는 했어요. 전화로 들리는 목소리와 다른 배우이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 이 상태로 끝내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어요. 이렇게 저렇게 편집을 하다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원래 편집을 오래 하는 편이고, 그때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계속 매만질 수 있었어요.

<배반>

-일상에서 채집한 듯한 대사가 좋더군요.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문어체가 되기 쉬울 텐데, 어떤 식으로 대사를 다듬었어요?
=오히려 문어체 대사를 못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으면 재미가 없는데, 뉘앙스가 들어가면 좀 달라지더라고요. 이십대 여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시작은 내 경험이 들어갔지만 꼭 일기 쓰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쓰진 않았어요.

-영화를 보면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아요. 실제는 어떤가요?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투른 성격이어서 여러 명이 모이면 정신이 없어져요. 내 정신 수습하기에도 바쁘니까 다른 사람을 관찰할 여유는 없고, 나 자신을 관찰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유머가 있는 영화가 좋아요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영상원에 들어갔죠? 원래 전공은 어떤 거였어요?
=94학번으로 공업화학과를 졸업했어요. 어릴 적에 흰옷 입은 과학자에 대한 판타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열심히 했지만 갈수록 적응이 안됐어요. 그러다가 방학 중에 인턴 사원 비슷한 걸 했는데, 점심시간이 되니까, 똑같이 하얀 연구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거예요. 2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시 몰려 들어가고. 그걸 보니까 이런 일은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다시 과학에 흥미가 가요. 공부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교양과학서나 SF를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혹시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도 SF영화의 영향 탓은 아니었을까요?
=아마, 거의. (웃음)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 <닥터스>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생각해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근사한 이유를 갖다붙였지만, 시작은 <닥터스>였던 것 같아요.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영화를 택하는 건 아니죠. 특별히 영화를 좋아했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영화광이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극장에 가고, 평범하게 영화를 좋아한 관객이었죠. 뭔가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엔 글을 못 쓰고, 화가가 되기엔 그림 실력이…. (웃음) 이상하게 영화는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영상원이 있다고 했고 먼저 들어간 사람에게 물어서 책을 몇권 읽으며 시험 준비를 했어요. 그게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웃음)

-어떤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영상원에 들어가고 나선 누벨바그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취향이 바뀌고 있고, 내가 예전엔 이런 영화를 좋아했었지, 하고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어요. 전엔 <토토의 천국>처럼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유쾌하게 뒤섞은 영화가 좋았어요. 지금은 유머가 있는 영화가 좋아요. 알렉산더 페인이나 찰리 카우프만처럼.

남자영화 많은데 저까지 찍을 필요 없잖아요

-미래가 걱정되진 않던가요? 졸업할 무렵에야 영상원 진학을 결심했다면 갑자기 불확실한 길로 뛰어든 것이었을 텐데요.
=그런 걱정을 했어야 맞다는 걸 요즘에야 깨달았어요. 애가 늦돼서 그런 건지. 미래를 설계해서 차근차근 준비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남들도 그런 줄 알았는데 다들 뭔가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영상원 졸업하고 줄곧 백수로 살다보니 뒤늦게 걱정을 하게 된 거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연출부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휴학을 하면서까지 연출부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졸업작품을 찍을 돈도 없고, 시나리오를 공모전에 낼 때마다 계속 떨어지니까 신경질이 나서요.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데. 침체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경주와 춘천에서 한달씩 영화를 찍다보니까 작은 도시 하나를 알아간다는 느낌이 좋았어요.

-신인감독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부산영화제 NDIF(New Directors in Focus)에서 <4차원 소녀>(가제)로 LJ 어워드를 받았었죠. 그 영화도 <Rendez-vous>나 그전에 만들었던 <배반>처럼 당신 또래 여성이 주인공이고요. 어떤 영화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아직은 쓰고 있는 중이어서 나도 어떤 영화가 될지 모르겠어요. 그냥 성격이 안 좋은 여자가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 해두죠. (웃음) 꼭 여자를 주인공으로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주인공에겐 감독이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그런가봐요. 아직 남자주인공은 소화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많은데 저까지 그런 영화를 찍을 필요는 없잖아요. (웃음)

사진 최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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