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발견! 여성감독 기대주들 [3] - 송혜진 감독
2006-01-13
글 : 오정연
<원피스> <안다고 말하지 마라>의 송혜진 감독

느리지만 확실하고, 부드럽지만 강한 시선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순간에 담긴 안타까운 과거일 수도 있고, 자꾸만 움직이고 흘러가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감정 혹은 관계일 수도 있다. 송혜진 감독은 그것이 전달되는 가장 올바른 길이 가장 현란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고 믿는다. 흑백의 스틸사진으로만 만들어진 그의 단편 <원피스>는 감독 자신이 버스 안에서 눈길을 줬던, 가판을 지키는 여인을 기어이 카메라 앞에 불러 세워, 본인도 인식하지 못했을 과거와 욕망을 재현한 영화다. 2002년 국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거듭 상영됐던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절대로 소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촌동생 장철과 그 누나 장주가 결국은 서로에게 희미하지만 굳건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장담하건대 두 영화 모두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감독 스스로 혹은 주변인들이 쉽게 확신할 만한 프로젝트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관적인 순간과 그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것은 영화보다는 소설이 적당할 수도 있고, 익숙하지만 장황한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영화로 옮겨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혜진 감독은 자신이 애초에 표현하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영화를 통해 그것에 다가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완성된 영화는 미묘한 무엇인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릇임이 밝혀졌다. 감독의 (현장) 장악력도 마찬가지다. 송혜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것을 스탭들이 동의하도록 만들 때” 발휘된다. 이는 종종 신념과 오해되는 단순한 고집이나, 이른바 카리스마로 오인되는 성깔과는 다르다. 감독마다 다른 방식으로 얻게 되는 그 능력을 송혜진 감독 역시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숨을 고르는 그의 말씨는 자신이 만든 영화를 닮았다. 그것은 느리지만 확실하고, 부드럽지만 강하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영화학교 졸업작품 <안다고 말하지 마라>를 완성한 뒤 4년이 흘렀다. 인터뷰 요청이 망설여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영화들을 만들었는지 여전히 궁금했고, 지금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우연히 이 ‘뜬금없는’ 인터뷰는 그가 다시금 출발선에 선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그는 졸업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눈과 입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2001년 이전에 만든 영화는 없나요.
=<원피스>와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2학년 마치고, 1년간 휴학한 뒤에 만든 거예요. 그 전에 만든 건, 단지 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를 때 만든 거라서.

-휴학기간 중 많은 일이 있었나봐요.
=특별히 한 건 없는데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막연한 맘으로 영상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뭘 가지고 영화를 만들지, 무슨 영화가 좋은 건지도 몰랐거든요. 만드는 영화마다 반응도 안 좋고, 스스로도 부끄럽다고 핍박하면서 2년 동안 열등생으로 다녔죠. 모든 게 바닥난 상태에서 휴학을 했어요. 그리고는 면허도 따고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읽다가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어떤 소설을 읽었나요.
=주로 일본 근대소설, 프랑스 현대소설 등 읽고 싶은 대로 읽었는데 다 도움이 됐어요. 예를 들어, 나치에 희생된 소녀의 흔적을 따라가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도라 브루더>. 300페이지 되는 소설인데, 마지막 몇 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와요. 별짓을 다해도 도라 브루더가 단 며칠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고. 그런데 그 시간이 그에게는 해방기였다고. 이게 정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는 걸 느꼈어요. 영화도 마찬가지 같더라고요. 거대한 게 아니라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거 하나를 표현하는 거, 그것만 해내면 된다고. 휴학 이후에는 모든 게 좋아졌어요. 일종의 점프 혹은 전면 재조정의 느낌.

영화란 표현하고 싶은 하나만 표현하면 되지 않나요

-첫 번째 학교를 졸업한 해 영상원에 들어갔는데, 이전부터 준비했던 진로였나요.
=아뇨. 첫 번째 학교에선 그저 외롭고 공허했어요.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고 이것저것 배우고, 영화도 보러 다니긴 했죠. 그렇게 4학년이 됐는데, 해놓은 것도 없고 취직은 하기 싫었어요. 마침 <씨네21>을 봤는데 영상원 특집이 있더라고요. 우와, 진짜 이런 학교가 있나 싶었어요. 당시에는 붙으면 그냥 하라는 얘기라고 생각했죠. 표현욕구 같은 건 전부터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일기를 심하게 썼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우울증이었어요. 2년이면 좋았는데 4년씩이나. 그 시절도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겠죠.

-휴학 이후 만든 첫 영화 <원피스>는 실제로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머릿속에 스친 짧은 단상을 그리고 있죠. 직접 본 순간을 재현한 것 같아요.
=당시에 원래는 서로 다른 3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 3개를 관통하는 핵을 못 찾겠더라고요. 못 찾은 채로는 찍을 수가 없었죠. 그러다 버스 안에서 그 아줌마를 본 거예요. 한여름에 아줌마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가래떡이랑 쥐포를 팔고 있었는데, 인상이 특이했어요. 가판 주인인 게 분명한데, 거기서 한 걸음 반 정도 떨어진 곳에서 딴청 피우듯이 서 있는데 옛날에는 무척 고왔을 것 같았어요. 한때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졌던 분인데, 지금 서 있는 곳은 원했던 곳이 아니고, 근데 해결할 수도 없고, 그런 느낌. 그걸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는데, 모티브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면서도 에피소드가 필요할 거라고 하더군요. 근데 그러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그 아줌마를 찾아가서 캐스팅 동의를 구했죠.

-처음부터 스틸로만 이루어진 영화로 만들려고 계획했나요.
=원래는 16mm로 촬영을 했어요. 하지만 아줌마가 연기를 하는 분이 아니라서 간단히 서 있는 것도 어색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스를 가지고 편집실에서 괴로워하다가 스틸로 찍으면 연기를 못해도 방심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겨울에 재촬영했어요.

-<원피스> 전에 준비한 영화를 접은 것이나, 그 영화를 다 찍어놓고 재촬영한 거나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과 함께 그게 불가능해졌을 때 다른 것을 찾는 융통성은 대단한 능력 같아요.
=음, 그건 영화를 하면서 생겼어요. 2년을 뭐가 뭔지 모르고 학교 다닌 뒤 휴학을 하고 돌아왔을 당시에는 뭐랄까, 스스로 진정성 과잉 상태였죠. 아주 작은 거 하나라도, 제대로 못한 것을 그냥 과제랍시고 제출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찍다가 영 모르겠으면 일기를 다시 읽어봐요

-<안다고 말하지 마라>도 개인적인 직접 경험에서 출발했겠죠.
=실제 사촌동생과 있었던 일이죠. 전체적으로 그를 보면서 느꼈던 것, 주로 일어났던 일은 실제예요. 사촌동생과의 일은 일기에 썼던 내용이에요. <원피스>의 그 아줌마 때도 일기를 썼는데. 영화를 찍다가 영 모르겠으면 일기를 다시 읽어봐요. 그래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웃음) 장철이 주인공인 장주에게 신뢰를 느끼게 되는 순간에 대한 굉장히 긴 일기가 있어요.

-강한 캐릭터가 존재하지만 전형적인 인물도 아니고, 이처럼 미묘한 이야기를 30분짜리 졸업작품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막상 시나리오를 쓰려고 보니 명확한 모델이 있어서 민감한 데다가, 대사도 많고, 내레이션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고민이 되고, 이게 단편인지 중편인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지도교수였던 홍상수 감독님께 이게 단편에 어울리는 이야기 같냐고 물었더니 적당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은 대로, 나오는 대로 시나리오를 쓰면 된다고 그러셨어요. 많은 힘이 됐죠.

-연기 연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한번도 안 해본 거라서 공포스러웠는데 리허설을 해보니까 안 두렵더라고요. 가장 신경쓴 게 대사의 속도와 타이밍, 간극이었는데 배우들이 너무 잘해줬거든요. 마지막 리딩 때는 듣다가 제가 웃었어요. 이 정도면 머릿속에서 그렸던 느낌의 대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장철이 화장실에서 나와 장주의 방에 들어가고, 마루에서 빨래를 개던 장주가 동생에게 빨래를 넘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등, 4명의 인물이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일상적이지만 분명 기능은 있고, 이들의 움직임도 자연스럽고. 그런 디테일과 동선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나요.
=물론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그 디테일이 다 기능이 있어요. 장철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하는 말은, 그의 말투를 따라 하는 장주의 버릇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했어요. 장주가 동생에게 빨래를 건네는 건, 장철과 장주가 계속 나오지만 이 집에 다른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말해주고. 그 모든 걸 편안하게 설명하면서 리얼리티도 얻을 수 있고, 그 신 때문에 다른 신들까지 편안해지는 것 같았어요.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요.
=장주가 장철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장철이 장주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장주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는 느낌이 가장 강하죠. 그래서 제목도, 장주가 장철을 처음 본 뒤에 “이 아이한테 영향을 미치고 싶어졌다”는 내레이션을 한 직후 후루루룩, 놀리듯이 뜨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장주가 한 말에 대한 화답이었어요. 원래 그건 가제였어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막 쓸 거야’라는 심정에서, 모니터에 굉장히 큰 폰트로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쓰고 시나리오를 시작했거든요. 나중엔 ‘말라’와 ‘마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말라’는 무슨 십계명 같아서 지금의 제목이 됐어요.

언해피엔딩 멜로를 쓰고 있어요

-영화학교 졸업 이후 꼭 일을 해야 한다면 대개는 연출부를 하는데, 장편 시나리오를 3개나 썼네요.
=당시에는 나에게 생산능력 자체가 있는지도 회의가 들었고, 일해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졸업 뒤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연출부를 먼저 하기로 했는데 그 영화가 연기돼서 <인어공주> 시나리오의 초고를 다듬게 됐죠.

-연출부와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모두 경험했는데, 어떻게 다른가요.
=연출부는 자괴감이 없어요. 기능적인 단순업무인데도 떳떳하죠. 그런데 시나리오는 돈을 받고 저에게 있는 능력을 파는 거잖아요. 제가 쓴 시나리오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하면 할수록 계속 같은 데만 긁어먹고 사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하는데 스스로 드라마가 센 작가는 아니니까 자꾸 캐릭터 플레이를 하게 되고. 물론 이전까지 장편 시나리오를 한번도 안 써본 상태에서 공부는 많이 됐죠. 올해 인디포럼 때 <초롱과 나>의 노동석 감독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했어요. 노 감독은 그 사이에 <마이 제너레이션> <나무들이 봤어>, 인권영화까지 만들었는데 저는 완성한 영화가 없었어요. 이젠 내 영화를 만들 때가 온 걸 확연히 느껴요.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 얘기가 오고 가는 영화사가 있나요.
=아직 트리트먼트도 없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충무로에서 찍는 35mm 장편이 될지, 디지털 장편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디지털이라고 생각할 때의 편안함으로 마음대로 쓸 거예요. 중반 정도까지 쓰면 어떤 게 좋을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얘기는… 언해피엔딩 멜로. (웃음) 정해진 게 별로 없어서 말하기 어렵네요. 무엇이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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