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의 조우
<유년기의 끝> 아서 C. 클라크 저/ 정영목 역/ 시공사 펴냄
아서 C. 클라크가 쓴 몇편의 SF소설들은 수많은 할리우드 SF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작가가 상상하는 공간과 미래의 모습은 때로는 피폐하고, 때로는 너무도 따뜻하고 자연적이기까지 하다. 그중에서도 <유년기의 끝>은 SF소설의 고전으로 통한다.
이 책은 2050년 미국과 소련이 우주개발을 위해 서로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미 2000년을 훌쩍 넘겨버렸지만, 소설을 처음 읽었던 10여년 전만 해도 2050년은 나에게 아득한 미래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소설 시작 부분에 작가가 묘사한 2050년의 모습에는 미-소간의 갈등과 전쟁 등 현실 세계를 염두에 둔 암시들이 진하게 배어 있다. 역사는 인간들의 실수와 오만에 의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지구를 덮는 수많은 우주선이 도착한다(이 대목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우주선, 그 안에 타고 있던 ‘오버로드’라는 초지성적 존재들에게 인간이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1년, 2년… 10년, 20년… 100년. 그 사이 인간들은 편견, 전쟁, 범죄에서 구원된다. 범죄를 일으키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초지성적 존재에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대신 오버로드들은 인간들 밑바닥에 자리한 허무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은 끊임없이 묻는다. 자유롭지만 끊임없는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 것인가? 혹은 획일화될 것인가?
<유년기의 끝>은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으로 인간들의 제2의 진화과정을 그려낸다. 이 책의 제목은 인간들의 역사가 시작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은유다. 인간들의 삶이 지속돼온 차원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사라짐. 그것이 유년기의 끝이다. <유년기의 끝>은 실존과 상상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우주에 관한, 그 우주 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존재에 관한 책이다. 이 한권의 책 속에 담겨 있던 우주와의 조우를 결코 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영화 만들기는, 선택이다
<선택> 스펜서 존슨 지음/ 형선호 옮김/ 청림출판 펴냄
가끔 어떤 프로듀서가 좋은 프로듀서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말문이 막혔던 적이 있다. 스펜서 존슨의 <선택>을 읽고서 이제야 감히 좋은 프로듀서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감독이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루에 100가지 이상의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프로듀서는 투자·배급 환경 등 외적인 요소까지 포함해서 어쩌면 더 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편의 영화를 이끄는 선장의 역할이랄 수도 있는 프로듀서의 크고 작은 결정들은 촬영현장의 효율성은 물론 영화의 성공 여부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중요한 선택이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어떤 투자자와 파트너십을 함께할 것인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톱스타를 캐스팅할 것인지 아니면 모험적으로 신인을 기용할 것인지, 프로덕션 과정에서 작게는 오락가락하는 일기예보에 맞추어 촬영을 취소할 것인지 아니면 감행할 것인지까지. 크게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예산을 초과할 것인지, 초과한다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아니면 예산에 맞추어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까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과연 올바른 결정을 해왔던 것일까. <선택>은 결정의 원칙에 관한 책이며 바른 결정은 우리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정보를 모아 선택의 폭을 넓히고 미리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가? 결정을 내릴 때 내가 느끼는 것은 압박감인가, 편안함인가? 두려움인가 열정인가? 두려워하며 결정을 내렸을 때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이미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버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기는 더 나은 결과를 약속해준다. 매 순간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선택>의 ‘예스/노 시스템’을 메모하고 실천해보려고 한다.
궁중사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김용숙 지음/ 일지사 펴냄
<조선조 궁중 복식사 연구>는 10년 전 근무했던 방송국에서 대하드라마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가 발견했다. 처음에는 수발이나 화장법을 찾기 위해 참고로 봤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재미있고 다양한 내용과 표현에 감탄하며 점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하기 때문에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왕의 생활, 즉 조정대신들과 국정을 논하고 신하에게 명령하는 알려진 모습을 넘어서서 왕의 개인적인 생활과 특별한 기본 업무나 항상 동행하는 사람들과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도 <조선조 궁중 복식사 연구>는 풍성하게 담아내고 있다. 의생활, 식생활, 성생활, 생리적 모습마저도 포괄하는 이 책의 장점은 추론에 의한 논리 전개가 아닌 우리나라 마지막 상궁들의 실제 증언을 빌려 사실적으로 서술했다는 것이다. 주로 복식을 중심으로 논하는 <조선조 궁중 복식사 연구>는 고증에 입각한 궁궐에서의 다양한 머리 모양이나 화장법에 관한 다양한 양식들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흔히 보고 알던 고정된 복식이나 수발 및 화장법 스타일에서 고증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추구하는 것이 사극을 표현할 때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하는 도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특정한 의식이나 상황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뛰어넘어 리얼한 당대의 생활상을 표현해야 하는 영화작업이다. 따라서 책이나 자료에 정리돼 있지 않은 상황까지 상상하고 예측해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사극에는 더 많은 공부와 검토가 필요하고 종국에는 현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사극이나 시대물의 분장은 상상력과 고증이 공존해야 하는 분야다. 그런 면에서 분장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조선조 궁중 복식사 연구>의 심층적인 표현과 묘사는 많은 공부와 동시에 자극이 됐다. 사극은 무엇보다 특정한 일부만 파악해서는 전체를 표현하는 데 위험하고 어려운 요소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궁중사극을 준비하는 영화인이라면 <조선조 궁중 복식사 연구>를 미리 읽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989년, 청회색 청춘의 동반자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살림출판사
1989년 나에게는 태양서점이란 낙원이 있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일정한 시각에만 들르던 드문 손님들과 비좁은 공간에 한없이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며 포만감을 느꼈다. 아침에 출근하고 청소를 할 때마다 콧노래가 절로 났다. 재수생이던 나는 아르바이트와 함께 사민청(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 산하 정치학교를 다니고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우울한 20대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송 말미에는 항상 시를 읊어주던 <FM 25시>는 그렇게 편중됐던 독서에 균열을 일으켰다. 어느 날 라디오로 처음 기형도의 시 <전문가>를 들었다. <전문가>는 지금도 내가 유일하게 외우는 시다. 다음날 서점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유고 시집을 찾아내고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수많은 이를 존경했던 그 시절, 내가 늦은밤 술에 취해 길을 걸을 때 나를 지배했던 사람은 기형도였다. 가장 진지했고 혼자였던 그 시간은 언제나 그와 함께였다. 1990년 그의 유고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발간됐다. 책장이 헤지도록 읽었던 <짧은 여행의 기록>은 이등병 첫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 날에도 내 품에 있었다.
입대 직전 나는 <짧은 여행의 기록>처럼 홀로 여행을 떠났다. 망월동에 도착한 늦은 오후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가 가졌던 양심의 우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내가 느낀 그의 얼굴은 시대의 우울함이었다. 그의 글에는 언제나 특별한 용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슬픈 내면의 초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짧은 여행의 기록>은 지난날 그렇게 무력했던 나를 위로해준 친구였다. 기형도의 문학적 성취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그의 책과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1989년 그는 극적으로 생을 마감했고 그 시기에는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던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죽어갔고 치열한 열정은 갈 곳 없이 꿈틀거렸다.
지금도 레코더 앞에 앉아 혼자서 촬영현장의 소리를 듣노라면 그가 떠오른다. 붐마이크가 하나하나 소리를 잡아내듯이 정처없이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원고지의 빈칸들을 머릿속으로 채웠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 책만 읽던 그 시절에도, 행복하게 현장에서 녹음 일을 하는 지금도 기형도와 <짧은 여행의 기록>은 홀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나와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