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콘, 16mm 카메라 제작까지
누군들 제 능력을 맘껏 펼쳐보고 싶지 않겠는가.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촬영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충무로에서 그의 꿈이 영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카메라 고쳐주고 얻은 수입만으로도 짭짤했다”는 그가 1980년대 들어 CF 촬영을 주업으로 삼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계라는 게 복잡한 거 같지만 실은 간단해. 자연처럼 암수로 짝지워져 있다는 단순한 원리만 몸으로 깨달으면 되거든. 거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깨달은 이치를 밑천삼아 “응용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타올랐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돈이 조금 모이면 남대문과 청계천을 돌아다녔어. 공구와 부품 사모으는 데 모조리 쏟아부었다고.”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는 일종의 모니터였던 비디콘과 16mm 무인카메라를 만들어 CF 현장 등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재주만으로 밀고 나가는 건. “10번 시도하면 8, 9번은 실패야. 그건 당연한 건데, 나한테는 그걸 버틸 여력이 없었던 거지.” 각종 대형 프로젝트 입찰에서 연달아 떨어지면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았다”는 그는 한동안 “술로 밤을 지샜고” 돈 때문에 방위산업체 촬영에 나서기도 했다. 특수촬영에 몰두했던 1990년대 들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헬기를 이용한 무인카메라를 만들려고 덤볐던 일은 그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돈을 꽤 들였는데. 안 되더라고. 헬기를 띄우는 것도 어렵고, 항체 평형을 유지하는 장치도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지.”
충무로에 비빌 언덕이 있었다면, 그는 이미 회귀해 정착했을지 모른다. 상품 광고를 찍으면서도 그는 번번이 충무로 근처의 다방을 기웃거렸다. “맺은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돌아가고 싶었다”. 더이상 필름으로 상품 광고를 찍지 않게 되자, 충무로로 돌아와 몇편의 영화에서 제작부 일을 스스럼없이 맡기도 했던 그였다. “필름이라는 게 묘한 매력이 있어. 그 세계는 심오하거든. 사실 먹고살려고 영화 일을 시작했지만 먹고살 생각만 했으면 다른 세계로 갔겠지. 막노동을 했어도 더 받았을 테니까.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감수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왜 중도에 영화 포기한 사람들도 많잖아.”
“설악산의 사계를 찍고 싶다”
허씨는 스스로를 ‘돌연변이’라 부른다. “태어날 때부터 외골수”였다는 그는 지금껏 혼자 살아왔다. “지금도 주위에서 좋은 사람 있다고 해서 만나보라고 하지만 부담주기 싫어 결혼은 생각 안 해봤다”는 그는 5년 전 서울 이태원에서 이곳 인천으로 이사왔다. 허름한 연립주택, 그것도 빛이 좀처럼 들지 않는 반지하방이지만, “지난 세월 1년에 2, 3번씩 이사 다녀야 했던” 그에게 이 집은 50년 만에 얻은 튼튼한 요새고, 아늑한 둥지고, 무엇보다 넉넉한 연구실이다. 침대 대신 프로젝터와 카메라가, 식탁 대신 밀링과 선반이, 컴퓨터 대신 암실이 자리한 이 집은 방마다 각종 렌즈가 가득하고,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촬영기자재와 현상용액이 쌓여 있다.
“세상이 싫어 카메라에 더욱 빠져들었는지 모른다”는 그는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집까지 공개하며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던 이유를 뒤늦게 털어놓는다. “내가 이 일 하면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는 게 가장 힘들었어.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기술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일러주고 싶어서 나선 거라고. 얼마 전에 나한테 사진 배운 친구가 있어. 식당하는 친군데, 자신이 찍은 사진을 팔아서 불우이웃 돕겠다고 하더라고. 나도 덤으로 좋은 일 하는 거지. 그거랑 비슷해. 디지털 세상이라고 하는데, 세상 원리는 영원히 아날로그일 거라고. 이론보다는 경험으로 익힌 내 기술들은 그래서 쓸모가 있을 거라고 믿는 거지.”
세방현상소에서 가끔 찾는 일이 아니면 그는 점심을 들고선 일과처럼 서울 일대를 쏘다닌다. “나 혼자만으로는 못하는 연구들이 많다고. 그러다보니 광학이나 전자쪽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녀. 아직도 배울 것투성이야. 평생 해야 하는 거지. 전과 다른 건 시간에 쫓기진 않는다는 거지.” 평생 해야 할 숙제를 위해 밀링 작업을 하다 2002년 그는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주인이 허락도 안 했는데 떨어져나간 거 보면 인연이 없었나 봐.” 웃어넘기는 그의 나머지 한손 또한 반창고가 몇겹이다. 설 연휴에 그는 “자신과 기가 가장 맞는다”는 설악산 신선대를 찾을 계획이다. 직접 만든 자동 촬영장치를 장착한 아리플렉스 16mm 카메라를 메고. “영화 일을 다시 하는 건 좀 어렵고. 자연 다큐 한편 완성해보려고. 설악산의 사계를 찍어볼 참이야. 3년 전에 1천자쯤 찍었는데. 이거 완성하는 게 현재로선 가장 큰 숙제지.”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가 고수인지, 범인인지는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긴가민가할 거야. 난 스스로 해결사 정도로 불렸으면 하는데. 어때?” 그가 마지막 인사 대신 던진 말을 되새기며 그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을 꺼내서 보니, 렌즈 모양의 디자인 위에 피너클(Pinnacle)이라고 적혀 있다. 30년 전, 카메라점을 기웃거리며 “한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던 20대 청년과의 인연을 버리지 못해 결국 그에게 사진을 가르쳤다는 대부가 세상을 뜨기 전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정상이라. 낮은 곳에도 봉우리가 있긴 한 걸까. “매일 아침 렌즈에 기를 넣어주는 게 취미”라는 그와의 만남이 다른 누구와의 그것보다 곱절 힘들었던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장석준 촬영감독과 영공사
맨손으로 일궈낸 영화기재 국산화의 선구자
‘눈 뜨면 신세기(新世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선풍기가 나왔고, 자동전화기가 놓여졌으며, 흑백TV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1960년대 풍경은 그러했다. 1950년대 한국사회의 관심이 빈곤이었다면, 1960년대는 기술이었고, 1970년대는 자립이었다. 충무로라고 근대화 열풍에서 빠질 수 없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영화기재의 국산화 바람”은 관객을 TV에 ‘도둑맞은’ 1970년대까지 계속됐다. 1959년 김수용 감독의 <구혼결사대>로 데뷔한 장석준 촬영감독과 미공보부(USIS) 출신으로 청계천에서 영화기재를 제작했던 영공사의 전원춘 대표는 그 중심이었다. 이들은 먼저 1967년 입체영화 카메라를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한대만의 영사기로 상영할 수 있는 입체영화 시네마스코프 촬영기, 프린터, 영사기가 한국 기술진에 의해 발명, 제작되었다… (중략)… 이 ‘팬스코프 3D 카메라’는 렌즈만 제외하고 모두 국산재료로 만들었다.”(<조선일보> 1967. 12. 2,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에서 재인용)
장석준과 전원춘은 이어 70mm 카메라 제작에도 성공한다. 최초의 70mm 영화인 <춘향전>(1971)이 세상에 나오자 언론은 “한국이 세계에서 5번째 70mm 영화 생산국”이 됐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들은 유재형 촬영감독, 이종상 한국천연색 현상소 대표 등과 함께 테크니스코프 촬영기, 현상기 등도 자체 기술로 만들었고, 심지어 홍콩에까지 수출하기도 했다. 물론 외국 기자재를 모방했고, 촬영부터 현상까지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결과가 썩 좋진 않았다. <천하장사 임꺽정> <몽녀> 등의 입체영화 제작은 잠깐의 이벤트로 묻혔고, 최초의 70mm 영화는 건조기가 없어 선풍기로 사운드 필름을 말려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테크니스코프는 1970년대의 유행에 그쳤다. 하지만 맨손의 고수들이 흘린 열정을 통해서 한국 영화사를 되짚어볼 순 없을까. 영공사의 멤버였던 진영사의 나상원 대표는 “장석준 기사는 양복 호주머니에 항상 날카로운 공구를 넣고 다녔다. 그래서 밤마다 그의 부인이 양복 바느질을 해야 했다. 자신의 집에 현상소를 차릴 정도로 광학에 미쳐 있었다”며 그들이 맨땅에서 일군 미완의 영역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