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의 전설, 허남진 [1]
2006-02-08
글·사진 : 이영진

누구는 손에 꼽을 고수(高手)라고 했다. 디지털로도 불가능한 일을 눈대중과 손재주만으로 해낸다고 했다. 누구는 그저 그런 범인(凡人)이라고 했다. 별것 아닌 기술을 밑천으로 갖고 있을 뿐이라 했다. 허남진. 어쨌든 들어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의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도 불안을 떨치진 못했다. 전설의 고수가 맞긴 한 걸까. 그의 종적은 안개 속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단번에 보증하는 이는 없었다. 그를 고수라고 칭한 이는 그의 과거를 몰랐다. 그를 범인이라고 부른 이는 그의 현재를 몰랐다. “손재주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뭐하는지 몰라.” 얼마되지 않는 동료들도 애매모호한 답변을 남겼을 뿐이다.

대면 외엔 방법이 없었다. 부천 지나 부개역.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일단 남쪽 방향 출입구로 나오라고 한다. 본 적 없는 그이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모가 특이한 분이에요.” 전날 통화했던 이재한 감독은 1년 반 전 딱 한번 그를 만났지만, 독특한 외모만큼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는 50대. 안경을 썼고, 키는 작고, 앞니가 두개 정도 빠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청바지를 입었고, 몇 가지 공구가 든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고 했다. 주워들은 정보를 하나씩 떠올려 엉성한 몽타주를 붙여가고 있는데, 국방색 점퍼를 걸친 한 중년 남자가 지하철 입구로 다가온다. 멀리서 ‘씩’ 웃는데,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앞니가 ‘쑥’ 빠져 있다.

“어떻게 나를 알았어요?” 그가 먼저 궁금해했다. 그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최초의 제보자는 소설가 김영하였다. 지난해 여름. <씨네21>의 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영하는 청계천의 카메라 고수가 아니었다면 그가 각색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제때 개봉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후반작업 당시 <내 머리…>의 이재한 감독은 슈퍼35mm의 스퀴즈(squeeze) 작업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2.35:1의 화각을 사용하는 슈퍼35mm 방식은 촬영 때 사운드트랙 부분까지 이미지를 기록한 뒤 후반작업 과정에서 스퀴즈를 통해 축소, 복사한다. 문제는 이 스퀴즈 과정에서 스크린에 담겨야 할 이미지까지 모조리 잘려나간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복구도 신통한 처방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초점은 맞지 않았고 심지어 이미지가 찌그러졌다고 한다. 현상소 직원들을 붙잡고 망연자실해하던 이재한 감독이 허씨를 만난 건 기적이었다. “현상소에 갔는데 젊은 감독이 있더라고. 가만 들어보니까 해볼 만해. 필름 축소하고 확대하는 기계를 뜯어서 렌즈를 손보면 될 것 같아서 나선 거지.” 만남을 청한 이유 대신 <내 머리…>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허 씨는 엊그제 일이라도 되는 듯 성에가 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려가며 기억을 차근히 복구해낸다. “현상소쪽에서 렌즈 청소하면서 핀이 틀어진 적이 있어. 미국에까지 보냈는데 별로였어. 그쪽에선 대충 맞춰줘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때 한번 뜯어서 핀 맞춰주면서 구조를 봤으니까 자신이 있었어.”

3일 동안 렌즈를 5번이나 깎고 맞춘 뒤에서야 “선명한 영상을 볼 수 있었다”는 그는 <내 머리…>의 국내외 흥행 성적이 좋았다고 하자 자신의 일처럼 좋아한다. 애쓴다고 수중에 돌아오는 것 하나 없는데도 “지 까짓 게 뭐라고…”라는 주위의 눈총까지 감수하며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고가의 장비를 건드렸다가 까딱 잘못 되기라도 하면 괜한 오해를 받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인연이잖아. 그냥 후배니까 해준 거야. 전에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그 친구도 영화 좋아하고, 나도 카메라 좋아하고, 그럼 된 거지. 그냥 기술만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그 감독 심정을 안다고. 구도라는 게 창작자의 느낌을 담아놓은 거잖아. 근데 그 구도가 깨지면 감독 마음이 어떻겠어?”

<내 머리…> 스퀴즈로 인한 영상 문제 해결

짐작할 수 있듯이, 허씨는 충무로 현장 스탭 출신이다. 1954년 서울 장충동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살이 되기 전부터 장사를 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하고 따로 살았어. 성격이 안 맞아서. 그래서 일찍 돈을 벌어야 했지.”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맨 먼저 뛰어든 일은 화장품 도매업이었다. “뒤에 네온사인 만드는 일도 했어. 공장에서 먹고 자고 그랬는데, 어느 날 에너지 파동이 터진 거야. 더이상 일이 안 들어오니까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1973년 석유파동과 함께 “실업자가 된” 그는 같은 동네 살던 김창호 조명감독에게 이끌려 충무로와 인연을 맺는다. “어릴 적 영화촬영 하는 걸 좀 봤어. 장충동이 거리나 골목이 깨끗했거든. 그게 전부야. 처음엔 이름 외는 배우가 한명도 없었다니까….”

그는 촬영부 스탭으로 참여한 첫 작품을 기억하지 못한다. “안창복 촬영감독이 첫 번째 ‘오야지’(십장)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올라 있는 첫 번째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토지>(1974)다. 촬영감독이 안창복이 아닌 장석준인 것을 보면, 그의 첫 작품은 아마도 <비련의 벙어리 삼룡>(1973)이거나 <수선화>(1973)일 것이다. “그땐 정말 배고팠어. 아마 우성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였을 텐데, 너무 배고파서 스탭들끼리 필름을 팔아서 용돈이랑 차비를 했다고. 지금 세방현상소 김석준 사장의 아버지가 그때 우성영화사 대표였는데 그때 들켜가지고 혼 많이 났지. 그때 인연이 이어져 지금도 세방현상소 일을 도와주고 있는 거고.”

1970년대 충무로는 불황의 내리막길이었다. “너무 많은 시련을 겪어서일 거야. 일부러 잊어버렸으니까 자꾸 캐묻지 마. 마음 아프니까.” 허씨의 기억이 소실된 건 제 살 깎아먹기 바빴던 충무로와 무관하지 않다. 그때 한국영화는 외화수입 쿼터를 따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브라운관에 관객을 뺏긴 충무로에는 우수영화와 국책영화와 추천영화만이 득시글거렸다. 무려 1억7천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던 1969년은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정부는 검열이라는 재갈을 단단히 물렸고, 독약 든 당근을 문 한국영화는 길들여지기 바빴다. “일부 업자만 배불렀던 시절”이었다. 그럴수록 충무로 스탭들의 허기는 더해갔다.

촬영감독 안창복, 장석준 아래서 수학

“그냥 어깨너머로 배운 거야….” ‘꼬르륵’ 소리는 그의 배에서만 난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중앙시장을 들락거리며 “중고 시계와 라디오를 사다가 뜯어보길 좋아했다”는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충무로 근처 카메라점을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무비카메라는 넘볼 수도 없었고. 또 영화의 아버지는 사진이잖아. 아버지를 알아야 아들도 아는 거고.” 배고픔 아래 꼭 묻어뒀던 앎의 욕구가 발동했던 건 그가 모셨던 오야지 덕도 컸다. 장석준, 안창복, 유재형, 김덕진 등 몇편 안 되지만 그가 조수 시절 거쳤던 촬영감독들은 촬영 기자재 제작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이들이었다. 70mm, 입체영화, 테크니스코프 등의 국산화를 시도했던 이들에게서 그는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능력을 시험할 위험천만한 기회는 빨리 왔다. 카메라 렌털 회사 등을 돌며 일본촬영기사협회에서 발간하는 각종 카메라 책을 빌려보는 등 독학에 정진하던 그는 1976년 어느 날, 무모한 사고를 쳤다. 이두용 감독과 함께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떠났던 안창복 촬영감독 몰래 아리플렉스 ⅡC 카메라를 뜯은 것이다. “렌털을 나에게 맡긴 것도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까 내가 하게 됐어. 그런데 하루는 카메라가 고장난 거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저질러보자 그랬지.” 흰 전지 한장에 가득 늘어놓은 카메라 부품을 보면서 그는 현기증을 느낄 만큼 막막했다. “다시 맞춰서 다음날 촬영을 내보냈는데. 밥이 안 먹히더라니까. 별일 없었다고 하는데 랏슈(러시필름) 나올 때까지는 가슴이 조마조마했어.”

입막음을 했지만 소문은 빨랐다. 귀화한 일본 촬영감독인 이노우에 강(한국 이름 이병우)을 놀라게 한 일도 발없는 소문에 채찍을 가했다. 이노우에는 누군가에게 맡겨서 깎아달라고 부탁한 카메라 부품을 직접 간 허씨에게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얼마뒤 허씨는 영국 미첼사에서 연수 기회를 얻었다. “갔는데 둘러만 보고 금방 왔어. 수중에 돈이 있어서 물건을 들여오는 것도 아니고.” 16mm 카메라 한대를 가슴에 품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때 그는 “보수가 좀더 나은” CF쪽 일을 하다 안창복 촬영감독한테 걸린 적도 있었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않고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아리플렉스 ⅢC를 뜯어도 좋으니 봐달라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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