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6 선댄스 영화제 [1]
2006-02-10
글·사진 : 오정연

처음으로 경험한 해외영화제는 작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였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레드카펫 위의 거장과 스타였고,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들의 권위를 재확인했다. 그것은 발견이나 즐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반년 뒤, 선댄스 영화제를 찾았다. 지난 1월19일부터 26일까지, 솔트레이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 파크시티. 영화를 만든 이들과 관객이 주인이 되는 그곳은 축제의 장이었다.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보거나 보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곳곳에서 토론은 벌였다. 황혼이 깃들면 관객과 감독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파티가 줄을 이었다. 그곳에서 ‘저널리스트’는 별다른 소용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 출품영화의 스탭이거나, 배급업자이거나, 필름메이커를 대상으로 포럼을 진행하는 후반작업 회사의 직원 틈에 합승한 이국 땅의 기자는 왠지 모르게 외로웠다. 이를 부추기는 것은 선댄스가 엄연한 미국 영화제라는 사실. 월드시네마 경쟁부문이 지난해에 신설되었다지만, 선댄스의 주력 부문은 역시 (자국의) 다큐멘터리 경쟁부문과 극영화 경쟁부문이다. 이방인의 자격으로 선댄스에 입성한 한국 기자는 결국 열혈 관객이 되어 축제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웰컴 투 윈터 원더랜드! 눈 덮인 파크시티의 거짓말 같은 풍경이 말을 걸어왔다.

‘뿌리로 돌아가자.’(Back to its Root) 이는 25년 전 설립된 선댄스협회, 20번째로 열리는 선댄스 영화제가 내건 올해의 슬로건이다. 어떤 영화가 어떻게 팔렸는지, 어느 무명 감독이 큰손에게 발탁될 것인지가, 얼마나 새로운 영화를 발견했는지보다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애초의 인디 정신이 사라졌다는 내외부의 비판을 의식한 탓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로버트 로드리게스, 폴 토머스 앤더슨, 브라이언 싱어, 케빈 스미스…. 할리우드의 반대편에서, 빛나는 감성과 거리낌없는 발칙함으로 미국영화의 희망이 되어준 이들의 목록은 더욱 길어질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올해의 선댄스는 영화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경쟁부문의 급진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프리미어, 스펙트럼 등의 비경쟁 섹션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때문인지 영화제 기간 내내 미국과 유럽의 배급업자들은 경쟁부문에서 사들일 만한 수작이 없다는 불만을 늘어놓았고, 라이온스 게이트, 폭스 서치라이트, 워너 인디펜던트 픽처스, 미라맥스 등 ‘인디 메이저 혹은 메이저 인디’ 배급사들의 관심은 경쟁부문 밖에 있었다. 1천만달러라는 최고가로 팔린 <리틀 미스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은 인정받은 감독의 최근작과 최초로 상영되는 기대작으로 선정된 프리미어 섹션에 자리하고 있다. 판매가로 두 번째를 기록한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Science of Sleep) 역시 마찬가지. 막내딸을 어린이 미인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한 콩가루 가족의 로드무비를 그린 <리틀 미스 선샤인>이나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사랑스러운 <수면의 과학>을 향해 관계자들은 “엄밀한 의미의 선댄스 영화는 아니”라고 말한다.

<리틀 미스 선샤인>
<수면의 과학>

그런 의미에서 근 몇년 사이 선댄스의 새로운 심장으로 떠오른 것은 다큐멘터리. 제프리 길모어 집행위원장은 “5, 6년 전만 해도 누가 다큐멘터리가 독립영화계의 중심으로 부상할 거라고 생각했겠나.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18편의 다큐멘터리가 1백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제에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동일한 비중으로 상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상영관에서 만난 한 기자는 “선댄스를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소개될 만한 기회가 거의 없다”며 다큐멘터리 성장에 기여한 선댄스의 공로를 강조했다. 지난해 이곳에서 소개된 다큐멘터리 <펭귄: 위대한 모험>이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믿을 수 없는 성공신화를 이룬 사실은 여전히 생생하다. 참고로 올해 상영된 다큐멘터리 중에서 바이어와 관객에게 고른 사랑을 받은 영화는 낱말 맞추기 퍼즐을 향한 미국인들의 강박관념을 다룬 유쾌한 작품 <워드플레이>(Wordplay)였다.

포스트 9·11 그리고 이라크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LA 시내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폭탄이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물로 추정된다면. 아침에 시내로 떠난 아내 걱정에 속이 타들어가던 당신은, 화학물을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아내가 막상 집 앞에 찾아온다면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바로 당신의 문 앞에>(Right at Your Door)는 애틋한 사랑도, 이웃을 향한 신뢰도, 나아가 동시대를 향한 이성적인 판단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로 둔갑한 ‘테러’앞에서 무기력해진 현대 미국인의 초상을 그린다. 거대한 폭발 장면을 간단히 생략하는 효율적인 촬영, 편집과 연기, 사운드만으로 숨막히는 긴장감을 재연한 이 영화는 기분 나쁠 만큼 영리하다. 다소 과장스러운 결말을 지닌 이 영화는 물론 걸작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대의 증후를 영화로 끌어들인 예민함과 대담함은 주류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바로 당신의 문 앞에>
<진실의 땅: 살인이 끝난 뒤에>

삼엄하기로 이름난 미국 입국심사를 거쳤던 까닭일까. 프로그램을 뒤적이며 볼 영화를 체크하는데 9·11과 이라크전, 혹은 그 이후를 다룬 영화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이라크에서 살인을 행한 일반군 역시 전쟁의 광기 속에 말 못할 아픔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진실의 땅: 살인이 끝난 뒤에>(The Ground Truth: After the Killing Ends), 이라크인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본 <파편 속의 이라크>(Iraq In Fragments) 등 두편의 다큐멘터리가 경쟁부문에 올랐다. 이중 <파편 속의 이라크>는 편집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호세 안토니오 구티에레즈의 짧은 삶>(The Short Life of Jose Antonio Gutierrez). 이라크전에서 희생된 최초의 미국 군인으로 영웅시된 젊은이의 짧은 인생은, 그저 당당한 미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라틴계 미국 이민자의 것으로 드러난다. 계속해서 주변으로 밀려나던 가난한 청년은 죽음 이후에야 빛나는 미국인으로 전당에 모셔졌지만 그런 속보이는 게임에 이용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호세 안토니오 구티에레즈의 짧은 삶>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섰다가, 출품된 다큐멘터리의 음악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관객을 만났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올해 선댄스에서 많은 다큐멘터리를 봤다. 정말이지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저 두려울 따름이었다.” 물론 미국이 그렇게 무섭게 돌변한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면을 알게 된 관객이 얼마나 다른 행동을 보일 것인지 역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진실을 외치는 목소리가 주류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다.

선댄스로 간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

성장영화는 선댄스에서도 통했다

선댄스 영화제 집행위원장 제프리 길모어는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피터팬의 공식>을 보자마자 제작사인 LJ필름측에, 선댄스 월드시네마 극영화 경쟁부문의 초청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조창호 감독을 개인적으로 소개받아 자신의 소감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것은 물론이다. 아직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을 이국 관객에게 선보일 기회를 가지게 된 조창호 감독에게, 길거리와 파티장 곳곳에서 관객이 감독에게 인사를 건네는 선댄스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되어주었다. 영화를 제대로 접할 수 없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생전처음 극장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본 뒤에 감독이 될 결심을 다졌다는 그는, 로버트 레드퍼드와 초청 감독들의 조찬 모임에서 레드퍼드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조창호 감독을 가장 뿌듯하게 만든 것은 파크시티 내에서 3번에 걸쳐 이루어진 일반상영 당시 관객이 보여준 생생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지난 1월24일 오후 9시. <피터팬의 공식> 첫 번째 일반상영을 찾은 관객은 266석 규모의 이집션 극장을 가득 채웠고,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남아 감독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유망한 수영선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수영을 때려치운 고등학생 한수(온주완)의 특별하고도 쉽지만은 않은 성장담을 지켜본 일반 관객은 “완벽한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의 첫장면에서 주인공의 아이 같은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명했다”는 등의 개인적인 평가와 소감을 표현했다.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한국 관객과 달리 사춘기 소년 한수의 엉뚱한 행동이 보여지는 장면마다 적극적인 웃음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은 영화에 감독 개인의 경험이 얼마나 반영됐는지, 다소 난해한 영화의 제목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궁금해했다. 시종일관 낮고 느린 말투로 말을 이어간 조창호 감독은 이 영화를 “‘수영을 매우 잘하는 소년이 아무 이유없이 수영을 그만두었다’는 문장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질료삼아 만들었다고 설명했고, “성장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통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특별함이 반영된 이 영화로 여러분과 소통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덧붙였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을 했던 조창호 감독의 연혁을 접한 한 감독 지망생은, 대화가 끝난 뒤 무대에서 내려온 조창호 감독을 기다려 조감독 경험이 감독 데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개인적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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