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기의 소년, 희귀한 배우 봉태규 [1]
2006-02-16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눈물>의 노랑머리 소년이 뾰족한 눈으로 세상을 쏘아볼 때,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 캐스팅된 생짜 신인배우의 미래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가능성을 눈여겨본 사람일지라도 그 소년이 어느 날 무색무취의 단정함과 또렷한 욕망을 오가는 연기를 해보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바람난 가족>). 봉태규는 여러 오락프로그램의 인기 게스트이기도 한 가수 MC몽과 콤비를 이뤄 친근한 재치도 부렸고(<논스톱4>) 투정과 애교 섞인 순정으로 연상 여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광식이 동생 광태>). 골목 어귀에서 광장 한가운데로 뛰쳐나온 아이. 배우가 가진 살얼음 같은 기운은 곧잘 비딱하고 희귀한 매력으로 탈바꿈한다. 류승범이 그랬고, 그 때문에 초기 시절 봉태규는 비교당하곤 했다. 이제 봉태규는 자기만의 캐릭터 스펙트럼을 갖고 20대 배우 자리에 서 있다. 3월 중순 개봉예정인 학원코미디물 <방과후 옥상>의 이석훈 감독은 허약하고 소심한 고교생 주인공 남궁달 역에 봉태규 외에 최적 캐스트를 떠올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5월 중 개봉예정인 영화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은 애절하고 깊은 사랑을 품은 소년 캐릭터에 봉태규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썼다 한다. 또 한명의 길거리 소년의 배우 성장기와 비기(秘技), 좀 궁금하지 않은가?

외모, 독특함이 품은 다양한 표현영역

“마스크가 되게 괴상한데 아주 귀엽기도 하고, 천하지 않은 귀한 끼가 있는 얼굴이라고 봤다. 천박한 십대 악동을 연기해도 일정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_임상수 감독(<눈물> <바람난 가족>)

“태규를 맨 처음 본 건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다. 특이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우선 일반적인 꽃미남은 아니었고, 나중에 알아보니까 미술을 좀 공부했다고 하더라. 그럼 예술적인 감각도 있을 테고, 막연히 얼굴 잘생겨서 주위에서 ‘너 배우나 한번 해봐라’ 하는 얘기 듣고 ‘그래볼까’ 그런 사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_최종수 PD·MBC 드라마국장(<한강수타령>)

배우의 독특한 외모가 감독의 표현 의지를 북돋을 때가 있다. 봉태규의 얼굴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작은 눈, 긴 코, 약간 돌출됐고 큰 입, 옴폭한 뺨, 굵직한 윤곽. 일일이 뜯어보든 하나로 합쳐보든 평범하지 않은 그의 얼굴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독기, 살기, 분노, 야성, 공격성, 반항심, 억울함, 비굴함, 소심함, 나약함, 처연함, 비극, 희극, 넉살, 뻔뻔함. 데뷔작 <눈물> 때 봉태규의 실제 성격은 반항과 오기를 눌러담고 사는 창보다도 따뜻한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자란 한(한준)에 가까웠지만 외모가 창에 가까웠기 때문에 봉태규는 창 역을 부여받았다. 잔머리 잘 굴리는 철딱서니없는 고교생 수동(<품행제로>), 청량리 뒷골목의 깡패(<정글쥬스>), 주먹으로 거울을 깨고 제 아빠를 ‘그 새끼’라 표현하는 부잣집 아들, 형한테 막말하는 동생(<안녕! 유에프오>), 시종일관 까불거리는 대학생(<논스톱4>)이 다 그 궤 안에 있다. 2월9일 개봉하는 영화 <썬데이서울>에서도 봉태규는 늑대인간 소년으로 캐스트 0순위였다. <품행제로> <S 다이어리> <새드무비>의 프로듀서를 거친 박성훈 감독이 되묻는다. “늑대같이 안 생겼어요? 눈빛보면 좀, 음흉하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인다. “중요한 건 입 있는 데예요. 그런 생김새가 많지 않아요.”

<눈물>
<품행제로>

정반대의 성질도 찾을 수 있다. 드라마 <한강수타령>의 강수는 지극히 평범하고 밝고 온유하고 성실하며 건실한 청년이다. 타인에 대해 연민과 포용의 준비를 갖춘 바른 젊은이의 모습도 봉태규의 얼굴에 있다. 봉태규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생김새를 가졌지만 <한강수타령>의 강수는 가영이네 집 마당 빨랫줄에 늘 걸려 있는 빨래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렇게 보면 봉태규는 배우 한 사람의 얼굴이 감당할 수 있는 것치고도 꽤 넓은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한줄로 꿰고 있는 어린 연기자다. 그에게 외모는 한계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약속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 약속을 봉태규 자신이 세상에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오디션,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오디션을 봐서 붙은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바람난 가족> 때까지 제가 나온 영화들이 대부분 인맥으로 한 거예요. <눈물>의 이두만 촬영감독이 <정글쥬스> 하게 되면서 절 추천하셨고, <눈물>의 연출부 형이 <품행제로>의 연출부로 있는 자기 친구한테 날 추천했고, <눈물> 때 스크립터 했던 누나가 <바람난 가족> 조감독으로 가서 제가 그 누나 쫓아다니면서 저 출연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거예요.”

연기 못한다는 이유로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연기 그만두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오디션은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앞뒤 신 하나도 모르고 장면 달랑 하나 주는데, 못하겠어요. 수학 문제를 풀려면 공식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공식 모르고 풀라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주어진 시간도 짧잖아요. 자기한테 있는 재능을 순간에 확 보여줘야 하는데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거든요.” 봉태규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연기자다. 연기 수업을 정식으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깊이 묵상하고 통찰하고 표현법까지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그는 필요로 한다. 6년 전의 봉태규는 잘 알려진 것처럼 미대 입시 준비생이었다. 실기시험 준비 기간 중에 버스를 타고 가다 굴러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입시 준비는 1년 뒤로 미뤄졌고, 재수생 신분이 되어 압구정 거리를 걷다 <눈물>의 연출부에게 명함을 건네받았다. 봉태규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다.

<눈물> 때는 디지털카메라 세대가 다큐멘터리 찍듯 한없이 아이들을 쫓아다녔지만 <정글쥬스>의 촬영장에서는 컷을 나누더니 또 연결을 시킨다 했다. 충격과 혼란을 극복하며 봉태규는 무조건 관찰하고 기억하는 연기 독학법을 터득했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하느냐를 많이 생각해요. 결국 시나리오에 나온 대사라는 건 제가 살면서 한번쯤 다 했던 말들의 종합이거든요. 상대방의 리액션도 많이 관찰해요. 이론적으로 배운 게 없으니까 그나마 방법을 찾은 게 그거예요. 끊임없이 저 혼자서 장면을 만들어봐요.”

맨몸으로 연기를 터득해나가자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졌다. 밖에서는 “인지도가 없다”는 이유로 캐스팅을 사양했다. 인지도가 빈약하기는 했다. <튜브> 이후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을 때 봉태규는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기도 했다. “얼굴이 애매하게 알려지는 거 있잖아요. 어, 봉태규다, 이게 아니고, 혹시, 영화배우 아니세요? 이러는 거. 그러면 제 입으로, 네, 저는 영화배우입니다, 이러기도 뭐하고, 아닌데요, 이러기도 뭐하고. 것도 꼭 다 들리게 얘기해요. 조용히 와서 (나지막하게) 저어, 영화배우 아니세요? 이게 아니라 (버럭) 어! 혹시! 영화배우 아니세요! 어디서 봤는데∼! 이런 거 있잖아요오!”

2003년 가을 <논스톱> 시즌4가 시작했다. 경험해본 적 없는 TV가 영화보다 두려웠지만 봉태규는 출연했다. 인지도 얻고 나서 또 딴소리하기만 해봐라. 시트콤은 봉태규에게 무한 자유를 허락했다. 봉태규는 대본을 거의 보지 않고 촬영장에 나갔다. 90%가 애드리브였고 개인기였다. “신기한 건, 내가 뭘 해도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거예요. 처음엔 의아하다가 나중엔 기고만장했죠.” 6개월 뒤 그는 시트콤을 떠나 영화로 돌아오고자 했다. “이젠 시트콤 속의 이미지가 강해서 배역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시트콤을 더 할 수도 있었는데, 화가 나서 안 했어요. 그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한 거였거든요. 인지도 쌓아라 해서 인지도 쌓고, TV해라 해서 TV하고. 근데 그렇게 하고 나도 안 되니까 에라, 모르겠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해봐야겠다, 하게 됐어요.” <논스톱4>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비중있는 역할들을 다 거절하고 라디오 DJ를 떠맡았다. 그리고 연기를 제대로 수업받겠다는 결심으로 드라마 <한강수타령> 출연을 결정했다.

의상협찬 에디 하디, 아디다스·스타일리스트 황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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