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연습, 시트콤과 정극연기의 도전
“태규가 나를 무서워하긴 하더라. 일부러 걔만 혼내고 했던 것은 아닌데. 우리 드라마는 남녀주인공 두 사람의 드라마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가는 드라마였다. 강수(봉태규)도 강수 나름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태규의 연기가 그에 비해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친구가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굉장히 강해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를 항상 의식하고 연기하는 것 같더라.” _최종수 PD·MBC 드라마국장(<한강수타령>)
첫 촬영날.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상대배우 이윤지와 대사를 주고받다 애드리브를 했다. “애드리브라기보다는 대사를 내 입에 맞게 바꿨어요.” 최종수 PD가 그를 불렀다. “태규야, 너 지금 하고 있는 게 60부작 드라마인데, 이제 1부 찍고 있으면서 나중에 드라마 내용이 어떻게 될지 다 아냐.” 배우는 모른다고 답했다. PD는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네 입에 맞게 바꾼다고 한 이 대사 하나가 60부작을 어긋나게 만들 수도 있다.” 배우는 충격받았다. “그전까지는 조금이라도 제 입에 안 맞는 대사가 있으면 그건 아니다라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항상 자기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살 순 없잖아요. 건강상 균형도 안 맞고. 연기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짐을 했다. 60부작 다 마칠 때까지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대사해보자. 나한테 얻어지는 게 뭘까, 두고보자.
시트콤 촬영장에서 날고 기고 붕붕 솟던 자신의 두 발목에 모래주머니가 채워진 기분이었다고 한다. 주 4일 촬영에 3일 밤을 혼났다. 매주 그랬다. “미치겠는 거예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배우가 연기 못해서 혼나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해요. 학생이 공부 못한다고 혼나고 와서 친구들한테 ‘야, 나 오늘 공부 못한다고 혼났다, 인생 힘들다’ 그러면 그걸 누가 들어주겠어요.” 밥은 먹었어?라는 대사 하나를 뱉기 위해 하루 종일 고민하는 습관이 생겼다. 혼나는 게 가장 두려웠다. 위축된 그 와중에도 봉태규는 자신의 캐릭터에 아이디어를 보탰다. 강수는 혈혈단신 서울에서 셋방 얻어 근면히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봉태규는 드라마 촬영을 다 마칠 때까지 옷 다섯벌로 버티기로 했다. 강수 옷은 드라이크리닝하지 말고 물세탁해야 한다고 스타일리스트에게 부탁했다. “미용실도 안 갔어요. 집에서 머리 감고 바로 촬영장 가고 그랬어요.”
“기본이 없는 프리스타일은 언젠가 무너지는 모래성이다”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극도로 자제하게 된 것도 <한강수타령>에서 겪은 혹독한 훈련 때문이다. <논스톱4> 시절에는 촬영 전날 노느라 잠을 못 잤지만 <광식이 동생 광태>을 하면서는 걱정이 돼서 잠을 못 잤다. “제가 촬영장에서 하도 생각을 많이 하니까 김현석 감독님이 심지어는 ‘광태는 아무 생각없는 애니까 너 생각 좀 그만 해라’ 그러시더라고요.” 두발의 모래주머니를 다 떼고, 봉태규는 자율적인 수축이완체계를 익히기 시작했다.
책임감, 98점 이하로는 오케이 내리지 말아달라
“굉장히 성실하고, 감독을 믿고 가는 스타일이다. 시나리오도 많이 보지만 감독을 만나서 얘기를 많이 한다. 솔직히 귀찮을 정도로 전화도 자주 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제 어떤 만화를 봤는데 거기서 무슨 캐릭터가 재미있더라, 무슨 영화를 봤는데 뭐가 재미있더라. 그렇게 사전 준비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열심히 한다. 그런 면에서 감독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우다.” _이석훈 감독(<방과후 옥상>)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배우다. 자신의 캐릭터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 캐릭터들까지 생각한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받쳐주고 자기가 주위 사람들을 받쳐줘야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친구라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하고 자주 모여서 얘기하곤 했다.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안다. 잔머리를 잘 쓰는 거다. (웃음)” _박성훈 감독(<썬데이서울>)
단편 <순간접착제>를 만들었던 이석훈 감독의 장편데뷔작 <방과후 옥상>에서 봉태규는 단독 주연을 책임지게 됐다. 자기 연기에 대한 의심이 갈수록 깊어지는 봉태규는 데뷔작을 찍는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리면 의심의 눈초리로 되받아치곤 했다. 진정 맘에 들어한 건지, 더 잘할 순 없겠다는 판단에 오케이를 내린 것인지 분간해야 했다. “98점 이하로는 오케이 내리지 말아달라고 그랬어요.” 주연배우가 오케이 사인을 못 믿는 것은, 데뷔작 찍는 감독 입장에서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촬영이 1/3쯤 진행되고 나서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았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훨씬 수월하게 흘러갔다.
상대배우들과의 호흡도 봉태규에게는 큰 과제였다. 그들은 또래이지만 연기 경험에서는 거의 신인들이다. 노련하고 절친한 배우들과 작업한 <광식이 동생 광태> 때 느끼지 못한 어려움이었다. “영화 전체의 90%를 제가 책임져야 해요. 호흡을 맞출 때도 저만 살자고 할 수가 없어요. 얼마나 지겹겠어요, 강약이 있어야 하는데. 상대배우에게 리액션을 정말 잘해줘야 하고, 어느 신에서는 상대배우가 저에게 잘해줘야 하거든요.” 이 한편을 마치고 나니 자기가 앞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들의 주연배우들이 죄다 존경스러워진다고 그가 덧붙인다. “연기를 잘한다 평가받는 배우들이건 그렇지 않건, 영화 한편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만약 저같은 애랑 했으면, 패죽였을 거예요. (웃음) 애가 통제가 안 되잖아요.”
<품행제로> 때부터 친분을 이어온 박성훈 감독의 <썬데이서울>에서는 거의 대사없이 감정만으로 연기를 이어가는 숙제를 치렀다. 반에서 놀림대상인 도연이는 어느 날 부모로부터 “우리는 늑대인간이야. 만 열여덟이 되었으니 너에게도 곧 늑대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야”라는 말을 듣고 만다. 몸의 변화가 시작된다. 사지가 쑤셔서 괴롭고, 아프고, 그러잖아도 반에서 놀림감인 자신이 더욱 외톨이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두려워진다. 도연이는 눈물과 침과 땀으로 범벅되어 화장실 구석에 숨어든다.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은 늑대인간 소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린다. 그 순간 봉태규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얼굴 위로 그간 쌓아온 내공을 덧입힌다.
빈손, 아직도 칼을 갈고 있는 배우
“비폭력, 무저항의 간지라고 해야 할까. 열정적으로 세상과 싸워나가기보다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복종하지도 않는 얼굴. 태규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눈에서 슬픈 기가 보인다. 아무리 웃고 까불고 해도 태규한테는 항상 슬픈 기운이 있다. 내 편견으로 배우는 좀, 우울하고 비장함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태규에게서 그런 것들이 보일 것 같다.” _김태용 감독(<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은 조근식 감독을 경유해 봉태규를 알게 됐다. 4년여 전 처음 본 배우에 관해 그가 갖고 있는 첫인상은 여타 감독들의 것과 다르다. 슬픈 아이의 느낌. “그 느낌이 좋아서 그때, 나중에 영화 꼭 같이 하자고 했었다. 시나리오 쓰면서 태규를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소심한 남자아이의 캐릭터다.” 배우는 새로운 연기를 하고 싶어했고 감독도 그 새로운 점에 애초부터 이끌려 배우를 선택한 터다. 김태용 감독은 ‘내가 세상을 보는 눈’보다 ‘세상이 나를 보는 눈’에 더 예민해지기 시작한 배우를 안심시키고 격려했다. 곁에서 지켜본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봉태규는 지금 제2기를 준비하는 때다. <방과후 옥상>의 이석훈 감독도 비슷하게 말했다. “정통극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바람난 가족>도 그 축에 속했지만 좀더 차분한 극연기. 본인이 넘어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봉태규는 빈손에서 시작했다. 그때 가진 것은 오기가 전부였고 지금도 오기가 그에게 전부다. 봉태규는 자기가 아직도 칼을 갈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남았어요. 아직까지 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 사람들까지 다 인정시키고 난 다음에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싫어요.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대받지 않은 상태에서 잘했을 때 효과가 더 크거든요. (웃음)” <눈물> 때, 그저 생가죽 같았던 봉태규는 지금도 생가죽 같다. 앉아서 연기해야하는 리딩에 학을 떼고, 쑥스러워 못하겠다고 테스트 촬영 때마다 얼굴이 벌개진다. 세팅이 완료되고 카메라가 눈앞에서 돌아가야만 연기가 시작된다. 그 순간부터는 될 때까지 매달린다. 봉태규의 비기? 닳을 수록 멋스러워지고 왠만해선 찢어지지 않는, 냄새 진한 생가죽의 근성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