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리짓 존스가 만난 게이 [1]
2006-02-28
글 : 손주연 (런던 통신원)

스물여섯이 되던 해부터 엄마의 신년 파티에 불려나갔던 나는, 언제나 영국 최고의 변태들을 만났다. 그때부터 나는 앞으로 이어질 오랜 솔로생활을 감지했었는지, 한해에 한명씩과 사랑에 빠졌다. 물론, 짝사랑이다. 지금부터 공개하는 내 지난 일기들은, 오늘의 나(인권변호사와 연애하는!)를 잊게 한 토대가 됐던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새해 첫날 시작해 그해 마지막 날 이번도 실패했음을 확인하고야 말았던 나는, 그날의 참담함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아, 한해를 눈물로 마감했던 내 지난날이여! 갑자기 숙연해진다. 하지만,동화 끝이 항상 해피엔딩이듯, 나도 마침내 해피엔딩을 찾았다. 이제 내 나이 서른하고 넷. 마크 다시와의 애정전선에는 문제가 없다.

내 지난 아픔을 이제와서 공개하는 것은 아직도 외로움에 떨고 있을 당신들을 위해서다. 힘내라. 당신도 언젠가는 나처럼 멋지구리한 애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력을 좀 해얄지도 모르겠다-.-:; 살도 좀 빼고, 담배·위스키 이런 애들도 좀 멀리하고. 아님, 나처럼 ‘각고’의 시간을 들이든가.

만인의 연인, 봉봉(조니 뎁)

1998년 12월31일

인기 많은 족속들은 애당초 만나는 게 아니었다. 엄청 도도했던 봉봉(이제와 보니 이름도 이상하군)은 시종일관 나를 무시했다. 담배와 술을 좋아라 하는 뚱뚱한 여자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나 뭐라나. 짝사랑에 만큼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내공을 가진 나는 그의 경고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혼자 좋아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비포 나잇 폴스>

그는 참으로 잘생겼다. 단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여장을 즐기는 점. 여장을 할 때면 그는 화장기 짙은 얼굴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걸었는데,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섹시했다. 미니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쭉 뻗은 허벅지를 몰래 숨어 볼 때면 절로 침이 흘렀다. 그가 내게 눈길이라도 한번 준 날엔 성은이라도 입은 양 기뻐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는 단 한번도 날 여자로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게 확실한 ‘No’를 외치지도 않았다. 내가 한발 빼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나를 향해 ‘빵~끗’ 웃어주는 그를 두고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그가 대놓고 싫어하지 않는 한, 조금만 노력하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짝사랑은 그의 성적 취향이 남성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가 오랜 ‘경험(!)’을 통해 엉덩이 속에 이것저것 넣고 운반할 수 있음을 알고 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이젠 안다. 상대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는 짝사랑의 결말은 절대 해피엔딩일 수 없는 것을. 때문에 그와 만났던 이번 한해, 난 정말 큰 상처를 얻었다. 결코 ‘영광’이라 칭할 수 없는 그 상처는 생각보다 쓰라렸다. 브리짓! 앞으론 조심스럽게 사랑하자! 1999년의 신년 계획은 이거다!

괴팍한 예술가,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1999년 12월31일

휴, 브리짓, 이제 그만하자. 세상에 여러 남자가 있지만, 이기적이고 괴팍한 남자만큼 상대하기 힘든 족속은 없어. 거기다 마스크라도 좀 받쳐주면 이 인간의 기고만장에 끝은 없는 것쯤 잘 알잖아.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열여섯의 랭보 따위는 잊어버리자구.

하지만 그의 눈부셨던 첫인상만큼은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잘생긴 데다 어리기까지 한 남자를 언제 또 만나본단 말이야.(훌쩍) 신년 파티 날, 그가 몸에 딱 붙는 깜장 정장에 금발을 휘날리며 나타났을 때 그때 내 심장은 이미 멎었다. 그와 엮이기 위해 피나게 노력했던 지난 1년 동안 나는 간도 쓸개도 다 빼낸 채 살았다.

글장이라는 인간들이 보통 자기 글을 칭찬하는 사탕발림에 한없이 약하다는 말에,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시를 무조건 좋다고만 했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따위의 시를 써댄 그는 자신이 아직 무명인 이유가 시대를 너무 앞서가기 때문이라고 했다(사실 나한테 그런 건 상관없었다구. 그가 내 옆에 있기만 한다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었단 말이지).

<토탈 이클립스>

그게 잘못이었을까. 그는 점점 이기적이며 못된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나, ‘브리짓=돈’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그가 내게 관심이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만날 때마다 그의 밥값과 집값, 옷값을 죄다 지불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아무리 오만방자한) 그라도 날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우리 사랑이 애당초 이뤄지려야 이뤄질 수 없었다는 것을. 그걸 베를렌인지 마를렌인지 하는 작자가 나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니. 내가 좀 둔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나한테 실망한 순간이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던 그 에로틱한 눈빛이라니! 결국 랭보는 벨를렌인지 머시기와 브리셀로 떠났다. 후에 그 작자가 쏜 총에 손을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 참 쌤통이다. 췟.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보영(장국영)

2000년 12월31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 장점 중 하나는 사랑에 그렇게 데여도, 다시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혹자는 이를 줄여 ‘금사빠’라고도 하지). 2000년, 나는 또 사랑에 빠졌다. 엄, 내 눈은 왜 이리 높은 건지, 이번 남자도 잘 생겨주셨다. 심지어 불안정한 소년의 아우라까지 느껴졌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이번에도 쾌재를 불렀다(아무래도 내겐, 잘생긴 남자 얼굴을 뜯어 먹고 살고 싶은 유전자가 흐르나보다).

브에노스 아이레스 여행 때 우연히 만난 그는 매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우울한 영혼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특히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어렸던 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환희와 기쁨을 불어넣어주리라 결심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리라 믿었다. 그를 웃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엄한 데서 실수하는 일은,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내 장기니까! 그렇게 우리 사랑은 시작됐다.

하지만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떠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말은 하지 않지만 무언가 비밀이 많아 보였다. 우린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함께’라는 단어가 주는 그 은밀한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툭하면 먼 산을 향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지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던 이가 있었노라고만 했다. 홍콩으로 돌아가겠다던 그를 잡지 못해 안타깝다고만 했다. 그런 그가 더욱 애틋해졌다. 그의 상처를 내가 치료하리라, 또다시 결심했다.(불끈)

<해피투게더>

돌이켜보면, 내 실수는 그 거다. 이해심이 차고 넘친다는 것. 일방적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나는 보영을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일방적으로 이해했고, 일방적으로 감싸안았다. 보영은 당연시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은 이런 모진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저, 그가 게이만 아니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옛 연인이, 아휘라는 남자임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조용히 물러섰다. 뚜껑이 열릴 뻔했지만, 참았다. 애써. 연약한 우리 보영이가 (나의 폭발에 놀라) 혹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작은 배려였다. 그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였다(그러고보니 나 정말 보영을 사랑했나보다). 그래도 속으론 울었다,가 아니라 욕했다. 이런 된~장! 이런 시~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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