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리짓 존스가 만난 게이 [2]
2006-02-28
글 : 손주연 (런던 통신원)

예쁘다, 예뻐! 마이크(리버 피닉스)

2001년 12월31일

<아이다호>

모성본능은 참으로 힘이 세다. 괄괄한 성격의 나도 거기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하니. 내가 마이크에 빠졌던 것도 다 망할 모성본능 때문이다.

세번이나 게이와 사랑에 빠졌던 나는, 마이크와 만나기에 앞서 그것부터 확인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터라 3년 전 만났던 내가 사랑한 최초의 게이 봉봉을 대동했다(다행히도 우린 친구 같은 관계가 됐다. 여전히 여장하고 다니는 그가 꼴불견이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데리고 다니기엔 꽤 괜찮은 마스크 아니겠어~). 게이치고, 봉봉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 없으니, 나는 그의 반응만 살피면 됐다.

오호라! 그는 꿋꿋했다. 그렇지. 나라고 만날 게이만 걸리란 법은 없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한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으니, 남자들에게 한번 ‘대주고’ 돈을 챙기는 그의 직업.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꾸, 그가 게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고, 스물아홉까지도 순진했던 나는 믿었다. 내 2001년판 로맨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어려서 어머니와 생이별했던 이야기, 어머니를 찾아 저 멀리 로마까지 갔던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도 어머니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친한 친구’ 스콧과도 영영 이별해야 했던 슬픈 과거사는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에게 다신 슬픈 이별을 경험케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의 눈빛의 작은 흔들림까지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처 입은 건 나였다. 그가 알고보니 게이여서가 아니다(사실 내가 사랑한 남자가 게이였네,가 이젠 그닥 놀랍지도 않다-.-:;). 그의 그 맑은 눈망울 속에 내가 들어갔던 적이 한번도 없어서다. 그가 여전히 스콧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랑했는데도, 상대의 마음에 단 한번도 들어갈 수 없다니. 절망스럽다.

지독한 사랑주의자, 에니스 델 마(히스 레저)

2002년 12월31일

내 연애 자서전을 쓴 지도 올해로 5년째. 그동안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해봤다니, 참 (쪽팔리고) 한심스럽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내 사랑이 올해도 나를 비켜 갔다는 사실. 정말 술·담배라도 끊어볼까?

내게 실연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닌데, 올해도 힘들다. 실연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늘 해왔던 것이니까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가도 될 법한데, 이별의 포스는 언제나 강력하다. 사실 이번엔 될 줄 알았다. 그는 내 지난 짝사랑들처럼 엄청 잘생기지도, 엄청 인기가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았고, 이혼 경력까지 있다. 심지어 그 나이 먹도록 집도 절도 없이 허름한 트레일러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니 출판사에 다니는 젊디젊은 여자의 프러포즈에 안 넘어 오려야 안 넘어 올 수 있겠나, 싶었다. 이번엔 좀 오만방자하게, 선심 쓰듯 다가섰다.

<브로크백 마운틴>

한데 이 남자, 조금의 틈도 없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자신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만 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 나는 끊임없이 그의 트레일러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그의 딸이라는 한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20년 간, ‘가능한 오래, 들키기 않게’ 만나왔다던 마이크의 사랑 이야기는 그를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잭에게로만 향하는 그 불멸의 마음이 샘났다. 비록 세상에서는 인정받진 못했으나 분명 존재하는 불같은 사랑. 나는, 나에게만 찾아오지 않는 그 위대한 사랑에 짓눌려 다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현실의 그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게 어떤 상처도 주지 않았는데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아팠다.

“Oh, Mike!! I wish I knew how to quit you.”

유쾌한 오빠, 루비(우타자와 우라에몽)

2003년 12월31일

지금 내가 애인이 없는 이유는, 멋진 남자들은 이미 결혼했거나, TV 속에 있거나(연애인이거나) 게이라서다. 지난 다섯번의 실연은 나를 이렇게 성장하게 했다. 적어도 이젠 주제 파악 정도는 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도 안 본다. ‘아무리 굶주렸다고 해도 함부로 사랑에 올인하지 않을 테다’, 이게 내 2003년 새해 다짐이었드랬다. 당연히, 나는 올해도 사랑에 빠졌다. 원래 계획이란 깨지라고 있는 법 아니던가.

<메종 드 히미코>

올해 내가 사랑한 그이는, 나와 나이 차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할아버지다. 사랑의 감정이란 참으로 오묘하여 객관적 기준으로는 매력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그인데도 나는 그가 좋았다.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알록달록 몸빼 바지를 입고, 빨간 립스틱에 매니큐어까지 칠한 남자. 어투는 또 어찌나 여성스럽던지, 말하는 모양새만 보면 산들바람에도 날아갈 듯 여려 보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내가 만나본 어떤 남자보다 남성다웠다. 일단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당당히 말했으며(적어도 내 뒤통수를 치진 않았으며), 자신의 작은 행동이 타인에 미치는 영향에도 민감한 부류였다. 그러니 내가 비로소 주제 파악을 하게 됐으며, 이젠 헛된 욕망을 좇지 않아서 그에게 마음이 간 건 절대 아니다.

그에게 끌린 것은 이번에도 모성애 탓이다. 세월도 물들이지 못하는 그의 여린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 비록 굶주렸으나 이번만은 플라토닉 러브를 해보고자 결심했다. 혹자는 큰 희생이라고도 했으나, 나는 행복했다. 스킨십이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면, 영혼의 교류는 사랑을 넓게 만들어준다는 진리를 그가 있어 깨달았다.

이것이 지난 실연의 상처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이젠, 좀 더 당당하게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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