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 견문록 [1]
2006-03-14
글 : 김혜리

“지어라, 그러면 그들이 올 것이다.”

방콕행 비행기 좌석에 비치된 기내지는,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2월17∼27일)가 새로운 터전으로 정한 거대 쇼핑몰 시암 파라곤의 건축 이념을 <꿈의 구장>의 케빈 코스트너가 받은 계시에 빗대고 있었다. 시암 파라곤이 솟아오른 방콕의 라마 1세 대로는 웬만한 백화점 한채 지어서는 아마존 밀림에 나무 한 그루 보태는 격이 될 쇼핑몰 밀집 지역. 두 유통 재벌이 손잡고 150억바트(약 4500억원)를 들인 3년 공사 끝에 지난해 12월9일 개장했다는 시암 파라곤은 8만제곱미터의 백화점과 레저 시설, 복합 상영관을 거느린 쇼핑의 신전이다. 인근 쇼핑몰들의 개축 경쟁을 평정할 코끼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라마 1세 대로에는 벌써 시암 파라곤보다 더 넓은 또 다른 쇼핑몰이 연내 준공을 목표로 망치질이 한창이었다. 하긴 이들의 경쟁 상대는 어차피 서로가 아니라,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이웃 동남아의 쇼핑 도시일 터다. 소비의 신한테 경배할 때만큼은 지상의 번뇌를 잊으라는 듯 시암 파라곤 입구는 공중열차(Sky Train)와 고가보도(Sky Walk)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맥도널드의 일회용 컵을 무릎 위에 두고 보도에 줄지어 앉은 해탈한 얼굴의 어린 걸인들을 지나치지 않고 쇼윈도에 다다를 길은 없었다. 꼭대기 층에 갓 개장한 파라곤 멀티플렉스와 연회장에 입성한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는 마치 이 호화로운 건물의 상량식처럼 느껴졌다.

타이영화연맹의 영화제 보이콧으로 홍역 치르다

거대 쇼핑몰은 사실 방콕국제영화제와 썩 어울리는 둥지다. 4회를 맞은 방콕영화제는 자국 영화계가 아닌 정부의 관광 부서(타이 관광청·Tourism Authority of Thailand 이하 TAT)가 주관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영화제다. 해외 게스트와 언론인을 초청하고 대접하는 데에 많은 돈을 쓰는 반면 대다수 외국영화는 자국어 자막없이 상영된다. 외국 손님의 편리를 먼저 고려하고, 영화를 관광산업 진흥의 한 항목으로 사고하는, 이중의 ‘외부자적’ 시선이 영화제를 감싸고 있다. TAT의 초청으로 방콕영화제를 찾은 많은 해외 영화기자들이 막대한 페스티벌 예산이 타이 영화산업에 실속있게 쓰일 경우의 혜택을 셈하며 한숨짓는 타이 영화인들을 만날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암 파라곤 몰에 걸린 영화제 깃발
기자들을 맞는 안내데스크

근본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제4회 방콕영화제는 개막을 앞두고 몸살을 앓았다. 영화제 재원(<더 네이션>에 따르면, 우리 돈 60억원에서 90억원 사이로 추정.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예산은 54억5천만원)이 문화 예술부처가 아닌 관광청에서 나온다는 점, 결국 타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예산의 운용이 타이영화계를 배제한 채 팜스프링스영화제 출신의 크레이그 프레이터 집행위원장, 제니퍼 스타크 프로그램 디렉터를 비롯해 대부분 북미 출신인 집행부에 맡겨진다는 점이 급기야 타이영화연맹(FNFAT)의 영화제 보이콧 사태를 부른 것이다. 파문은 타이영화연맹 회장인 솜삭 테차라타나프라세트가 이끄는 최대 메이저 영화사 사하몽콘이 4편의 출품을 취소하는 한편, 테차라타나프라세트 사장에게 반감이 있던 파이브 스타, RS필름 등 3개 영화사가 연맹을 탈퇴하며 영화제에 참여하는 분란으로 번졌다. 이를 고려한 판단은 아니겠으나 영화제는 지난 2월24일 시상식에서, 타이 배급권자 사하몽콘사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제작자가 영화제 출품을 강행한 캐나다·인도 합작영화 <물>에 국제 경쟁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선사했다. 제4회 방콕영화제가 상영한 영화는 타이영화 19편을 포함해 50개국에서 온 장편 170편과 단편 30편.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을 마치고 타이로 돌아온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보이지 않는 물결>이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렌트>가 영화제의 막을 내렸다. 영화 제작, 촬영 관련 세미나와 함께 시네필들을 위해 마련된 마스터클래스는 올리버 스톤, 크리스토퍼 리, 테리 길리엄 등 서구 영화인들이 단상을 독점했다. 한편 영화제 개막 3일 뒤 테이프를 끊은 제3회 방콕필름마켓은 50명의 바이어가 등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기자가 머무른 초반 이틀간은 한산했다. 베를린 마켓이 폐장한 지 고작 3일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경쟁시장인 홍콩필름마트를 3월에 앞둔 일정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는 것이 중평. 2월24일치 <스크린 데일리>는, 타이 영화사 파이브 스타, 모노필름, 라이트 비욘드가 5∼6개의 계약을 BFM에서 성사시켰다고 보도했다.

타이 전통가면극 곤과 시암 니라미트

거대함과 미세함의 비교체험 극과 극

<곤>
<시암 니라미트>

제4회 방콕영화제 포스터에는 힌두교와 불교권 문화에 전해오는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의 악인 토차칸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기자단은 라마야나를 형상화한 타이 전통가면극 곤(Khon)을 통해 토차칸의 ‘실체’를 볼 기회를 누렸다. 천상의 신 비슈누와 락시미가 인간계로 내려와 라마 왕과 시다 왕비로 태어나고, 악인 토차칸이 왕비를 납치하자 선과 악의 군대가 대결한다는 줄거리였다. 무지한 이방인은 토차칸이 변신술로 시다를 유괴했다는 점에서 예술 행사의 마스코트가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곤의 형식은 다층적이다. 악단의 연주와 함께 두 남자 가수가 번갈아 양식화된 발성으로 인물의 대사를 전달하고 배우들은 음악에 딱 맞는 것도 따로 노는 것도 아닌 동작으로 연기한다. 종교제의의 제스처에서 비롯됐다는 미묘한 손발과 관절의 꺾임에는 모두 의미가 있고 한 땀 한 땀 수공한 눈부신 의상의 문양과 색상은 인물의 속성이나 지위를 엄밀하게 지시한다. 관객의 감각을 고도로 예민하게 하는 정중동의 극치가 ‘곤’이라면, 다른 날 관람한 시암 니라미트 공연은 이와 상반되는 ‘규모의 미학’을 과시했다. 드라마 없이 시암 왕국의 역사와 풍광을 무대에 재현하는 이 퍼포먼스가 이루어진 창 극장은 광장에 가까웠다. 살아있는 코끼리를 포함한 150명의 배우들은 폭 65미터 깊이 15미터의 광활한 파노라마 무대는 물론 15미터의 날개 공간과 객석 복도까지 뛰놀았다. 급기야 무대 위로 강이 흐르더니, 거기로 배가 지나가고, 잠시 후에는 폭우가 쏟아지며 꽃까지 피어났다. 너무 거대해서 ‘자연’처럼 보이는 무대는 연극적이기보다 영화적 공간이었다. 공연은 배우들의 손에 이끌린 관객들이 무대 위 강에 촛불을 띄우면서 막을 내렸다. 곤과 시암 니라미트에 결계처럼 등장하는 숲 공간을 보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숲을 떠올렸고, 세트에 칠해진 노을빛을 보며 위시트 사사나티엥 영화의 색감을 생각했다. ‘비교체험 극과 극’이라 할 만한 두 공연은 타이 영화의 미감이 뿌리를 대고 있는 더 큰 맥락에 흥미를 느끼게 했다. 관광 도시의 틀 안에서 영화제를 고민하고 이미 게스트들을 공연예술에 초청하고 있는 방콕국제영화제인 만큼 한 발 더 나아가 이 주제를 논의하는 장을 영화제의 구색으로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