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 견문록 [2]
2006-03-14
글 : 김혜리

국경을 넘는 범아시아 프로젝트 <보이지 않는 물결>

푸미콘 국왕이 재위 60년 다이아몬드 희년을 맞는 2006년은 타이 곳곳에서 축제가 꼬리를 무는 ‘타이 대초청’(Thailand Grand Invitation)의 해다. 타이 정부는 영화제 개막 전야인 16일 정부청사 앞마당에서 파티를 열고 ‘타이 대초청’의 축포를 울렸다. 권력 남용과 탈세로 제기된 위헌 심판 탄원이 그날 아침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돼 한숨을 돌린 탁신 친나왓 총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축제의 개막을 선언했다.

개막작 <보이지 않는 물결>
<보이지 않는 물결>의 제작진

왕의 그림자는 영화제 어디에나 일렁였다. 엄밀히 말해 영화제 관객이 맨 처음 본 타이 필름은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개막작 <보이지 않는 물결>이 아니라 모든 출품작 앞머리에 꼬박꼬박 상영된 150억원 예산의 시대극 블록버스터 <나레수완>의 예고편이었다. 차트리찰레름 유콜 왕자가 감독한 <나레수완>은 미얀마에 대항해 아유타야 왕국의 독립을 지킨 왕의 전기영화로, 감독은 타이의 국가적 이벤트였던 자신의 전작 <수리요타이>(2001년, 3억2100만바트 수입)에 도전하고 있다. <나레수완>은 프레스센터 문 위에 배너를 드리웠을 뿐 아니라 상영관으로 통하는 길목 입구에는 아예 테마파크식 성채를 짓고 성문과 망루에 분장한 보초들을 종일 세워두었다. 타이의 영화관과 공연장마다 흐르는 <왕의 노래>도 국제영화제라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첫 상영인 개막작 기자 시사에서 앞줄에 앉았다가 일동 기립하는 장내 움직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기자는, 백성을 보살피는 왕의 덕을 칭송하는 영상과 노래가 흐르는 내내 타 문화를 존중하지 못한 자의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반면, 개막작 <보이지 않는 물결>은 “국적은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온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다국적 프로젝트답게 정주하지 못하는 자의 관점으로 인생과 운명을 그리는 영화였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무심한 카메라 앞에 선 일본의 아사노 다다노부와 한국의 강혜정, 홍콩의 증지위, 그리고 타이의 툰 히라니아섭 등은 자신과 상대방의 언어 때로는 제3의 언어까지 동원해 가까스로, 하지만 진심으로 대화한다. 보스의 여자와 얽히면서 천천히 수레바퀴 밑으로 끌려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달콤한 인생>을 추억하게 했으니 꼭 초콜릿 무스가 영화에 등장해서만은 아니었다. 방향을 잃은 여행자의 혼미한 감각을 재현해냈다는 점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물결>은 먼 이방에서 찾아간 관객에게 개막작으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신작 타이영화를 발표하는 간담회

전문 프로듀서군이 탄탄하지 않은 타이 영화계는 이름을 알 만한 감독들이 서로의 영화를 제작하는 품앗이 풍습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 경쟁부문에 나온 <세 친구>는 <보이지 않는 물결>을 공동제작한 평론가 출신 밍몽쿤 소나쿤이 아디티아 아사랏, 푸민 친나라디와 함께 감독한 청춘영화. 화보 촬영을 위해 섬에 온 10대 모델 마미와 그녀와 동행한 두명의 단짝 친구의 여름날을 현장의 자발성을 수용한 시나리오와 디지털카메라로 따라잡았다. 비디오 다이어리 같기도 하고 연예정보 프로그램 같기도 한 이야기 안에 진실의 사금파리들이 반짝인다. 아시아 경쟁부문의 또 다른 타이 청춘영화 <주석광산>은 <세 친구>와 동시대 영화라고 믿기 힘들었다. 실화에 기초한 베스트셀러를 각색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타이 대표로 출품됐다는 이 영화는 대학에서 제적된 뒤 호주인이 운영하는 광산에서 4년간 노동규율과 인생의 참지식을 터득하는 청년의 ‘도제 시절’을 교육용 산업영화의 필치로 그린다. 1997년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등의 감독들이 ‘타이영화 르네상스’를 일으키기 전까지 시장의 주류였던 타이 청춘영화는 들쭉날쭉하게 진화하고 있었다. 2월21일 짐 톰슨 하우스(타이 실크의 명가)에서 젊은 타이 감독들의 차기작 간담회를 진행한 <방콕 포스트>의 평론가 콩 리트디는 “가장 흥미로운 타이 청춘영화는 인디 진영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날 패널로 참석한 순스카 판시티보라쿤 같은 퀴어 뉴웨이브 감독이 그가 지칭하는 인디 진영의 예. 순스카는 일본, 타이, 영국의 젊은이들이 결성한 밴드의 생활을 그린 <푸통>을 만들고 있으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인티머시>의 촬영을 끝내는 10월에 그를 제작자로 맞아 <핫브레이크 파빌리온>을 찍는다. 이날 간담회에는 판시티보라쿤 외에도 성공한 로맨스 <디어 다칸다>의 콤크릿 트위몰과 <셔터>에 이어 <얼론>- 이 영화는 한국 배우와 로케이션을 쓴다- 을 함께 연출할 반종 피산타나쿤과 팍품 윙품이 상업영화를 대표하는 차세대로 초대됐고, 다큐멘터리스트 산티 타에파니히 감독이 독립영화 진영을 대표해 순스카와 나란히 앉았다. 평론가 콩 리트디는 타이영화에 세대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 세대는 광고계 출신이지만 이들은 영화학교 출신이다. 선배들보다 더 어린 나이에 영화 만들기를 시작했고 덜 무거운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다가오는 1, 2년 안에 어떤 성취를 보여줄지가 타이영화 미래의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이형석의 <공사중>, 아시아 단편영화상 수상

<물>

방콕국제영화제는 국제 경쟁, 아시아 경쟁, 심사위원 선정 신인, 국제 다큐멘터리, 아시아 단편의 다섯 개 부문으로 나누어 골든 키나리 상을 수여한다. 왕족이 참석하기 때문에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소감을 발표하지 못한다는 것도 방콕영화제의 독특한 풍경이라고 한다. 2월25일 발표된 올해의 국제 경쟁부문 작품상은 “종교의 부작용을 시의적절하게 환기한” 디파 메타 감독의 <물>에, 감독상은 <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감독에게 돌아갔다.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자로는 남아공과 영국이 합작한 <초치>의 프레슬리 차웨네야게,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자로는 <트랜스아메리카>의 펠리시티 허프먼이 호명됐다. 아시아영화 경쟁부문에서는 도안 민 푸옹과 도안 탄 은기아 감독의 베트남영화 <침묵의 신부>가 수상했고 이형석 감독의 <공사중>이 아시아 단편상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타이 관광청이 기자들에게 제공한 견학 프로그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방콕영화제는 영화 예술의 현재를 관객, 영화인과 공유하는 과제보다 영화 촬영지와 후반 작업지로서 타이가 지닌 장점의 프로모션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그 또한 영화제가 가질 수 있는 방향성의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모든 국제영화제의 장기적 생명력은 자국 영화산업과 영화 문화의 건강과 풍요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방콕영화제 집행부는 “투자의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하라”는 타이 영화인들의 바람을 좀더 심각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고급스러운 상영시설과 이채로운 문화, 상냥한 시민과 풍족한 관광 요소를 갖춘 도시 방콕의 국제영화제가 정작 작심하고 지어올려야 할 구조물은, 타이 영화산업과 문화의 인프라와 남아시아영화의 독보적 창이 되겠다는 정당한 야심일 것이다. 지어라, 그러면 부르지 않아도 그들이 올 것이다.

태국 최초의 3-D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깐 꾸앙>

조국의 독립을 지킨 왕의 코끼리

영화제를 찾은 기자단의 마지막 방문지는 칸타나 스튜디오의 후반작업 시설과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이었다. 1951년 라디오 방송에서 출발한 칸타나는 영화 및 TV 프로그램 제작, 영상물 후반작업, 애니메이션 제작, 출판, 음반을 사업 분야로 아우르고 있는 멀티미디어 그룹이다. 특히 칸타나가 자랑하는 것은 필름 스캔, 현상, 텔레씨네, 사운드 등 원 스톱 방식으로 후반 작업 전체 공정을 처리할 수 있는 자회사 ‘포스트 방콕’이다. 칸타나 애니메이션과 록슬리 비디오 포스트가 1:1로 출자해 1998년 설립한 ‘포스트 방콕’은 현재 타이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체류비용과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적 장점을 활용해 세계 시장에 구애하고 있는 포스트 방콕이 후반 작업한 장편영화로는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셔터> <메콩의 만월파티> <뉴 폴리스 스토리> 등이 있다.

제작분야에서 올해 칸타나가 기대를 걸고 있는 프로젝트는 태국 최초의 3-D 장편애니메이션 <깐 꾸앙>이다. 칸타나 관계자는 “운이 좋았다. 우리가 마침 창작에 욕심을 품었을 때 타이 정부도 애니메이션 산업에 의지를 가졌다. 일단 정부 지원을 약속받자 그걸 단초로 소니, 타이항공, 방콕 은행 등의 스폰서를 구할 수 있었다.”고 귀뜸했다.

<깐 꾸앙>

80%가 완성된 85분 길이의 <깐 꾸앙>은, 1592년 버마로부터 아유타야의 독립을 지킨 나레수완 왕을 보좌한 코끼리의 일대기다. 아버지 없이 자란 개구쟁이 깡 꾸안은 온갖 모험 끝에 강한 어른으로 자라 코끼리 전투에서 왕의 승리를 돕고 최고의 명예를 하사받는다. 방문한 기자들에게 공개된 <깡 꾸안>의 10여분 분량은, 디즈니적인 영웅 성장담의 스토리 라인을 짐작하게 하는 한편 할리우드보다 단순미를 추구하는 캐릭터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깐 꾸앙>의 정체성에 대한 칸타나 애니메이터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애니메이션 부서 책임자 오차라 키즈칸자나스는 코끼리가 타이 문화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를 언급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타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킬 수 있는 스토리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또 시각적 스타일에 관해서는 “타이의 조형적 전통과 색감을 취했다. 커브와 직선이 어우러진 배합은 타이 문자와 비슷하며 이는 인도나 버마의 보다 복잡한 곡선, 네모반듯한 중국과 한국의 선 사이에 있는 중간적 형태다.”라고 설명했다. <깐 꾸앙>은 타이 메이저 사하몽콘에 의해 올해 5월 자국에서 개봉되고 이후 해외 배급을 모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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