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시리아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지 클루니에게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시리아나>는 <크래쉬> <뮌헨> <굿 나잇 앤 굿 럭> 등 2005년을 정치와 사회적 이슈를 다룬 할리우드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70년대를 방불케 하는 한해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대규모 석유회사의 합병과 오일필드 굴착을 둘러싼 석유회사와 산유국, 미 정부 사이의 암투를 다룬 이 작품은 수년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켜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리아나>의 제작을 맡은 스티븐 소더버그는 “스티븐 (개건)이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석유는 세계의 마약과도 같다고. 그의 이런 생각 때문에 로버트 베이어의 <악마는 없다>를 영화화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란 걸 단숨에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프로듀서를 겸한 클루니는 <시리아나>가 “현 부시 정부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지난 50년간 중동지역에 대한 잘못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했다. 베넷 홀리데이 역을 맡은 제프리 라이트는 이 영화의 타깃 관객층이 누구냐는 질문에 “차에 기름을 넣어본 사람이라면 다 해당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시리아나’란 실제 워싱턴 수뇌집단(Think-Tanks)이 사용하는 용어로 중동지역을 새로운 형태로 바꾼다(reshaping)는 가설을 뜻한다. 즉 한 개인/정부가 다른 지역/국가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로 개조할 수 있다는 그릇된 망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견제 또는 억제되지 않은 야심이나 자기과신, 제국에 대한 판타지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는 것. 스티븐 개건 감독은 “타이틀을 이렇게 정한 것은 누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은 중동과 일을 하려면 기본적인 인권존중 등 미국과 어울리는 기본적인 발전을 요구하고,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는 좋은 생각 같지만, 로마의 세계 정복 때와 똑같은 반쪽 이론이며, 부시 정권에서 갑자기 나온 생각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야기
대부분 평론가들의 연말 톱10 리스트에도 올랐으나, <시리아나>가 미국에서 <트래픽>처럼 공전의 히트를 하지 못한 이유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와 소재라는 의견이 가장 많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쉬워질 수도,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석유회사와 CIA, 산유국 사이의 탐욕스러운 공생관계를 70명이 넘는 캐릭터로 복잡하게 그렸지만, 더 자세히 보면 결국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에 대한 이야기다.
<시리아나>의 이야기는 크게 4파트다. 중동의 암살 전문 베테랑 CIA 에이전트 봅 바네스(조지 클루니), 에너지 분석가로 산유국 왕자에게 고용되는 바이런 우드맨(맷 데이먼), 석유회사 대합병을 돕는 야심찬 변호사 베넷 홀리데이(제프리 라이트), 산유국 내 미국 석유회사에서 일하다 오일필드 드릴 판권이 중국으로 넘어가 졸지에 실직자가 되는 파키스탄 이민자 살림 아메드 칸과 아들 와심 등이 각각 파트의 중심인물이다.
중동의 한 산유국 왕자 내서(알렉산더 시디그)는 오일필드 드릴의 권리를 오랫동안 맡아온 미국 대규모 석유회사인 ‘코넥스’에서 가격을 높게 부른 중국 회사로 바꾼다. 국민을 위한 집권자가 되고 싶어하는 내서 왕자는 자신의 저택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우드맨을 에너지 분석가로 고용해 새로운 정권을 펼치려 한다. 한편 이 때문에 코넥스는 카자흐스탄에 오일필드 계약을 갖고 있는 소규모 미국 석유회사 ‘킬렌’과의 합병을 추진한다. 합병을 돕는 것은 워싱턴DC 최대의 법률회사 ‘슬론 와이팅’. 회사대표 딘 와이팅(크리스토퍼 플러머)은 홀리데이를 담당 변호사로 지목한다. 한편 테헤란에서 무기 암거래상을 암살하려던 바네스는 미스터리한 파란 눈의 이집트 남자에게 스팅어 미사일을 빼앗긴 뒤 CIA 본부로 돌아가지만, 상관의 지시에도 불구, 미사일의 행방을 계속 뒤쫓아 물의를 일으킨다. 코넥스의 직원이던 살림과 와심 부자는 오일필드 판권이 중국으로 넘어가 실직한 뒤 이민자에 대한 심한 차별을 감수한다.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 어린 와심은 이슬람 사원을 찾고, 여기서 파란 눈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이슬람 성직자를 만난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가졌지만 <시리아나>의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자관계다. 오랫동안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한 바네스는 어느새 대학생이 된 아들 앞에서 이방인이다. 내서 왕자의 저택에서 사고로 아들을 잃은 우드맨은 남은 가족을 보듬기보다 왕자의 금전적인 제안을 받아들인다. 출세를 꿈꾸는 홀리데이는 자신의 직업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의 이미지를 상사인 와이팅에게서 찾으려 한다. 직장을 잃은 뒤 자포자기 한 아버지를 보며 가슴 아파하던 와심은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돼간다. 국민들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려던 내서 왕자는 미국 정부와 석유회사의 압력을 받은 왕의 결정으로 친미주의자인 심약한 동생에게 왕위계승을 빼앗긴다.
조연이라도 좋다, 프로젝트에 끼워만 다오
클루니는 “언젠가 석유는 고갈되며, 언젠가는 대체연료나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단의 왕족 출신인 시디그는 “<시리아나>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 할리우드가 중동국가들에 악수를 청한 거라고나 할까. 필요한 대화를 시작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다른 나라의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우리나라를 존중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프리 라이트는 “미국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위대한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이 아이디어를 내놓은 리더들은 모두 노예를 가진 농장 주인이었다”며 “위대한 아이디어와 미개함. 우리는 아직도 그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경제적인 동물이 아직은 더 우세하지만, 이번 세기에서 미국이 살아남으려면 진보적이고 리버럴한 ‘미국의 정신’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리아나>에는 조지 클루니와 맷 데이먼을 비롯해 제프리 라이트, 크리스 쿠퍼, 크리스토퍼 플러머, 윌리엄 허트, 알렉산더 시디그, 팀 블레이크 넬슨 등의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스티븐 개건 감독의 탄탄한 스크립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조지 클루니는 귀띔한다. ‘중년 아저씨로의 변신’과 프로듀서의 역할을 소화한 클루니 역시 스크립트와 함께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들이 “조연이라도 좋다, 프로젝트에 끼워만 다오”라며 부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편 미국 공상과학 시리즈 <스타트랙: 딥 스페이스 나인> 고정 출연도 했던 시디그는 “현재 중동에서 세력을 잡기 시작한 세대가 대부분 MTV 제너레이션(일부는 <스타트랙> 세트를 방문할 정도의 팬이라고)이라, 기존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기대해본다”고 덧붙였다.
11월23일 미국 내 개봉된 <시리아나>는 최고 1775개 스크린이라는 소규모로 소개돼 현재까지 약 5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3월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