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발걸음 앞에 놓인 산, CG
고사가 끝난 뒤 장흥 읍내에서 제작발표회, 축하공연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음에도 임권택 감독은 이날 오후 다시 주막 세트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영화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동호가 수십년 만에 주막을 찾아오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임 감독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눈빛을 번득이며 주변을 둘러봤고, 조재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자, 한번 테스트해보겠어요.” 임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밀어넣는다. 가뜩이나 황량한 분위기인데 황사까지 하늘을 뒤덮어 더욱 스산한 풍경. “조재현씨,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들어오는 거예요!” 임 감독 목소리에 힘이 붙는다. 제작진은 지난해 봄 인서트 장면 몇개를 찍었으나 사실상 테스트 촬영에 가까웠고, 전날도 몇 장면을 찍었지만 그 또한 비슷한 차원이었다. 그러니 이날 촬영이야말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감독이 “레디, 고”를 외치자 조재현이 주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잠시 뒤 임 감독은 “캇, 오케이”를 선언했다. 이날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찾은 <장군의 아들> 조감독 출신 김영빈 감독이 앞장서 박수를 치자 이내 우렁찬 박수 소리가 촬영장에 퍼진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촬영분은 현장을 찾은 “기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제작진을 위해 임의로 만들어진, 이를테면 ‘서비스 컷’이었지만, 하여간 시작은 시작 아닌가).
가볍게 첫 발걸음을 뗐지만, 앞으로 <천년학>이 넘어야 할 고개는 꽤 높고 험해 보인다. 기술적으로 가장 큰 난제는 원작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화면 안으로 옮길 것인가이다. 임 감독 스스로 “<서편제>를 만들 당시, <선학동 나그네>의 내용을 포함하려 했으나 기술적으로 구현이 불가능할 것 같아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로 <천년학>에는 정교한 CG 기술이 동원돼야 한다. 영화의 설정상 과거 이 주막 주변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산 그림자가 물에 비쳤으나 방파제 공사를 한 뒤로 물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과거 장면에서는 CG로 바닷물을 만들어야 한다. 클라이맥스 대목에선 학이 물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까지 만들어내야 한다. CG를 담당하고 있는 강종익 인사이트 비주얼 대표는 “만들어야 하는 게 물이라서 쉽지 않고, 클라이맥스 대목은 감정이 많이 실려야 하는 장면이라 작업하기 까다롭다”고 말한다. 애초 3월 중순 매화꽃 장면을 찍은 뒤 8월 말에 가서야 촬영을 재개하려다가 4∼5월부터 시작하기로 계획을 바꾼 것도 후반작업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다. 강 대표는 “한폭의 그림처럼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밝힌다.
임권택의 ‘새로운 영화’는 이제 시작
다음날인 3월12일 임 감독을 비롯한 각 파트 감독들이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청매실농원으로 향한 것은 매화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가 운영하는 이 거대한 농원 안에는 또 하나의 오픈세트장이 만들어져 있다. 여기저기 떠돌던 송화는 백사 노인이라는 부자의 첩이 되는데, 이 초가는 송화가 첩살이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촬영될 장면은 매화꽃 이파리가 바람에 흐드러지게 날리는 가운데 송화의 소리를 들으며 노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서편제>에서 남도의 풍광을 눈 시리게 담아냈던 이 장인의 솜씨를 떠올리니,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짠해진다. 사실 <천년학>에서 궁금한 것 중 하나는 비주얼이다. 하지만 정일성 감독은 “색채와 질감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영진위 현상소쪽과 여러 가지 테스트를 끝냈다”고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가 될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제작진은 짓궂은 꽃샘추위 탓에 매화가 아직 제대로 피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스케줄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독 세트장 안마당에 심은 매화나무에만 꽃이 너무 일찍 피어나 “촬영 시점엔 1천여 송이의 종이 매화를 달아야 한다”며 주병도 미술감독이 한숨을 쉬고 있는 와중에 임 감독은 세트장을 빙빙 돌며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다. 전날의 화사한 분위기와는 영판 다르다. 그는 ‘100번째 영화’라는 말이 주는 무게, ‘첫 본격 멜로영화’에 대한 부담감, 그동안 겪어야 했던 투자·제작의 험난함 등을 곱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긴장감을 곧추세우게 한 송곳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을 터. “<천년학>은 <서편제>의 아류여서는 안 되고, 내가 만든 다른 영화들과도 달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그의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한 싸움은 이제 진짜 시작이니 말이다.
슥, 대청마루 저편으로 지나치는 임 감독의 모습이 그의 영화 속 한 캐릭터와 똑 닮아, 순간 착각에 빠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아주 피가 끓습니다.”(<취화선> 중 장승업의 대사)
장흥과 광양의 오픈세트
솔방울 하나, 돌맹이 하나에도 사연 깃든 듯
전남 장흥군 회진면에 지어진 주막 세트는 이 영화의 주공간. 대지 87평, 건평 18평짜리의 조그마한 주막 세트는 <취화선> <하류인생>에도 참여했던 주병도 미술감독이 설계했다. 애초 이 자리는 쓰레기 매립지로 낚시꾼 등의 트럭을 주차하던 공간. ‘휑뎅한 공간에 세워진 건물은 실제보다 커 보인다’는 생각에 주 감독은 애초 계획보다 규모를 줄였고, 날아가던 학이 쉬어갈 법한 커다란 소나무도 심었다. 이 소나무에는 곡절도 많다. 장흥군 내 어느 문중 소유의 땅에 있던 소나무의 범상치 않은 모양새에 반한 주 감독은 세트장 옆으로 옮겨 심으려 했지만 문중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장흥군이 나서서 겨우 옮기게 됐지만, 워낙 부피가 커 터널을 통과할 수 없었다. 결국 인부들이 굵은 가지 몇개를 잘라내고 나서야 이곳에 심을 수 있었다. 또 세트가 자리한 공간이 평소 바람이 심하고 태풍 피해가 잦았던 탓에 주 감독은 주춧돌을 깊숙이 박고 여기에 구멍을 뚫은 뒤 기둥을 꽂았다. 그런 덕인지 지난해 초 완성된 세트는 1년 동안 별탈없이 보존되고 있다. 주막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자재는 모두 옛 가옥에서 사용한 것 그대로다. “일제강점기쯤에 지어진 모양새면 좋겠다”는 임 감독의 뜻에 따라 주 감독은 오래된 자재를 사용했고, 녹슨 양철지붕을 붙였다. 돌담에 쓰인 돌은 이청준씨 생가 부근에서 가져왔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청매실농장 안에 지어진 대지 약 300평, 건평 23.85평의 초가집 세트는 송화가 백사 노인의 첩 생활을 하며 묵는 공간. 오로지 매화 꽃잎이 날리는 가운데 백사 노인이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세트 역시 고가옥에서 나온 자재를 사용해 만들어졌으며, 이름난 목수가 짜맞추었다. 이곳의 축대와 돌담에는 상당한 양의 바위와 돌이 사용됐는데, 모두 10여km 떨어진 인근 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 감독은 “포클레인으로 작업하면 돌에 생채기가 나기 때문에 일일이 로프로 묶어서 옮겨야 했다. 그런데 그게 지난해 겨울이었다”라며 고충을 토로한다. 장흥 세트장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거의 모든 벽을 뗄 수 있어 다양한 앵글로 촬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농원 안에 있는데다, 촬영 시점도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매화축제 기간 중이기 때문에 제작진은 벌써부터 치밀한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전남 진도와 제주도에도 오픈세트가 지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