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률 vs 정성일 대담 [1]
2006-03-30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장률 감독은 한국과 중국, 두개의 국가에 속한 동포감독이고, 소설에서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긴 과거를 지니고 있다. 경계에 선 존재는 아무래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씨네21>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 <당시>가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2년 전, 아시아 동포감독 중 한명으로 그를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뒤 한국에서 개봉한 <당시>는 실로 참담한 관객 수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그의 영화인생은 그때부터 본격화된다. 비슷한 시기 장률 감독은 <망종>을 들고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을 찾았고, 그해 <망종>을 상영한 부산영화제는 뉴커런츠상을 안김과 동시에 그의 세 번째 장편 <두만강>을 부산프로모션플랜(PPP)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오는 3월24일 개봉을 앞둔 <망종>은 장률 감독이 첫 번째 단편부터 일관된 철학과 스타일을 우직하게 밀어붙인 흔적이 역력한 영화다. 그의 두 번째 영화가 좀더 많은 관객과 한결 수월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정성일 영화평론가와 장률 감독의 긴 만남을 준비했다.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된 애정어린 질문과 성실한 대답은 아직은 낯선 감독의 영화를 맞이할 이들에게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장률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된 순간에 대한 회고부터 앞으로도 계속될 그의 필모그래피를 향한 기대로 이어지는 정성일의 글을 함께 싣는다.

평론가 정성일이 <당시> <망종>의 감독 장률을 만나고 싶어진 이유

영화란 무엇인가

그때 내가 장률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아무 준비가 안 된 상태였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며, <당시>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많은 영화를 심사하는 자리였고, 그때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김동원 선배가 12년간 준비한 다큐멘터리 <송환>이었다. 영진위에서 매년 하는 디지털영화 프린트 지원 사업심사에서였다. 이런 자리는 부주의해지기 쉽다. 나는 심사에 대해서 동료들에게 일종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영화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나는 거기서 진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속는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놓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번 영화를 향한 내 눈과 귀를 열기 위해 이리저리 다시 몸을 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테마, 서로 다른 화법, 서로 다른 교양을 갖고 세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은 결국 세상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한다. 그 무례함, 그것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질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대신 그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혹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고 싶다. <당시>는 보자마자 그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21세기 영화의 마술사 리스트에 장률을 넣자

<망종>

내 경험적으로 좋은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무언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술 같은 것을 부린다. 마치 마술사가 그의 손짓을 움직이자마자 즉각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그 손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 차라리 그 손짓이 시선을 훔쳐낸 다음 자기 멋대로 부린다는 말이 옳다. 그래서 거기 없는 것을 정말 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데사 계단에 선 어머니가 놓친 유모차에 멈추어선 혁명,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폼페이 화산의 미라가 된 연인의 숭고, 남의 호주머니를 훔치는 텅 빈 손 안의 증발해버린 영혼, 과년한 딸을 시집보낸 다음 텅 빈 집에 와서 쳐다보는 부엌 저편을 찾아온 죽음. 그 영화들은 무엇으로 나를 환대하는가? 영화 안에 무언가를, 지혜를, 깨달음을, 역사를, 눈물을 혹은 웃음을, 사유를 훔치러 온 일개 영화평론가인 나를 기꺼이 환대하면서, 하지만 내가 절대로 훔쳐갈 수 없는 배움을, 오직 배울 수만 있는 깨달음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펼쳐놓고 보여주는 영화들. 지난 세기가 거의 끝나갈 때 영화도 끝났다고 세르주 다네는 유언처럼 말했다. 물론 위대한 영화들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들이 나왔다. 이를테면 21세기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만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왕빙, 소피아 코폴라, 안드레이 즈비야긴셰프, 무랄리 나이르, 에릭 쿠(아마도 나는 많은 이름을 놓쳤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장률을 포함시키고 싶다. <당시>는 시작하자마자 자기가 만들어낸 세상에 스스로 버티어 선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원래 그런 영화가 있었던 것처럼.

작은 아파트 안에 세상의 모든 사건을 품은 <당시>

솔직하게 심사에서 처음 <당시>를 만났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왜 대한민국 영진위 돈으로 중국영화를 지원 사업 명단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이 영화는 중국어로 진행되고, 중국 배우들과 중국 스탭들과 중국에서 찍었고, 중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심사 서류를 보니 한국에서 촬영을 하는 최두영씨가 제작했고(이 사람은 김응수의 <달려라 장미>를 찍었고,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 마지막 대목에 사채업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감독이 조선족 옌볜동포라는 설명이 있었다. DV로 찍은 <당시>는 장률의 첫 번째 영화이다. 이제는 손목을 못 쓰는 중년 남자 소매치기와 그를 스승으로 여기는 젊은 여자 소매치기는 일종의 뚜쟁이와 창녀 사이와 비슷하다. 남자는 여자를 뜯어먹으면서 지내고, 여자는 그에게 상납을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남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넘지 않으려고 한다. 감정과 배움, 여자와 남자, 제자와 스승. 영화는 시종일관 그 작은 아파트 방 안에서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이 방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환유이다. 여자의 작은 동작,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린 제스처,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 안에서 무언가 읽어달라고 간절하게 하소연하는 눈짓,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아주 가끔씩 건네는 대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모던한 조명. 멈추어선 카메라. 띄엄띄엄 검은 자막 위에 떠오르는 당시(唐詩)의 사무치는 시 구절. 막 이사를 왔거나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처럼 텅 빈 이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된다. 장률이 하려는 이야기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이 방은 동시에 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10분 동안 갑자기 마술이 벌어진다. 아, 이제까지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당시>는 두 번째 볼 때 전혀 다른 자리, 전혀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이야기의 구도, 힘의 방점의 이동, 배치의 재설정, 변경에 앉아서 자기의 자리를 중심으로 오해한 비극 안의 익살, 연약한 믿음의 부서짐, 심각하게 걱정했던 관심의 소스라치도록 갑작스러운 사소함. 그 안에서 주인의 자리로부터 사실상 보잘것없는 이웃에로 물러나는 초라함이 거기에 있다.

<당시>

그런 다음 나는 이 사람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졌다. 그는 인터뷰 어디에선가 <당시>가 <송사>(宋詞), <원곡>(元曲)으로 이어지는 3부작 중 첫 번째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그 다음은 <명소설>(明小說), <청극>(淸劇)까지 아예 5부작을 찍으시지, 라고 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영화 제목이 어마어마해지면 좀 웃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혹은 거기에 허영이 있다고 지레짐작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중국과 북한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을 두고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두만강>을 만들겠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 사이에 <당시>가 개봉하였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 영화는 ‘전국에서’ 268명이 보았다. 이런 게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현실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번째 영화 <망종>을 보게 되었다. 소포모어 징크스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 그런데 장률은 그걸 그냥 간단하게 뛰어넘었다.

그 어떤 삶의 흔적도 없는 쓸쓸한 무대 <망종>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은 영화를 보고나서 읽으십시오.)

이야기는 좀더 복잡해지고, 인물들은 내내 바깥을 돌아다닌다. 거리에서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여자 최순희는 아들 창호와 함께 거의 무너질 듯한 집에서 하루 팔아서 하루 먹고산다. 최순희는 미모를 가졌고, 남자들은 남편없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공장노동자 조선족 김씨는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그녀의 몸이다. 자꾸만 친절을 베푸는 공안원 왕씨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최순희를 시간 날 때마다 찾아온다. 아들이 찬 공이 유리창을 깬 집의 주인인 음식점 남자는 그녀에게 자기 식당에 김치 납품을 제안하면서 대신 자기에게는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불륜 현장을 목격당하자 아내에게 저 여자는 매춘부라고 거짓말을 한 조선족 김씨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를 공안원 왕씨는 동료들이 술 마시러 간 사이에 문을 닫고 겁탈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아들 창호의 죽음이다. 다시 거리에서 김치를 파는 최순희에게 공안원 왕씨의 약혼녀는 그녀의 결혼식에 쓸 김치를 부탁한다. 최순희는 정성을 다해서, 그 결혼식에 가져갈 김치에 쥐약을 잔뜩 맛나게 버무려서 배달한 다음 천천히 집에 돌아온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역으로 홀린 듯이 걸어간다. 지금은 보리를 거두고 벼를 막 심어야 하는 계절, 망종이다.(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의보를 해제합니다.)

장률 영화에서 모든 사람들은 더이상 침묵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을 때에만 말한다. 대사는 간결하고, 인물들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서 있거나 거의 멈추어서 있다. 그러나 더 특별한 것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걸어다니는 속도이다. 너무 삶이 힘에 겨운 듯이 슬로모션처럼 가까스로 걸어다니는 인물들 속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것은 텔레비전이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선풍기뿐이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공간들은 마치 세트장에 온 것처럼 황량하다. 거기에는 어떤 삶의 흔적도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혹은 사뮈엘 베케트의 무대와도 같은 쓸쓸한 그 동네에서 32살의 조선족 여자 최순희는 11살 난 아들 창호를 키우기 위해 그래도 매일 김치를 팔기 위해 거리에 나가야 한다.

세상 밖으로 나간 장률, 그를 알고 싶다

<망종>

여기서는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하나는 방 안에서 거리로 나간 장률의 이동이다. 시종일관 화창한 늦봄 날씨의 거리에서 더 많은 인물들과 만나고, 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여전히 조용하고, 잔인하며, 쓸쓸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장률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정치적, 윤리적 선택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산문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한다. 물론 그것은 내가 보고 또 본 다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질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최순희는 <(<당시>의) 손을 못 쓰는 소매치기보다 더 말이 없다. 절망의 끝에까지 밀려난 32살 조선족 여자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 ‘여자’라는 세 겹의 매듭이 있다. 그 매듭은 우리에게 문화적 번역을 요구한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경계 사이에 비스듬히 서서 우리를 돌아보면서 중국에 발딛고 서 있는 삶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앎이란 거기에 산다는 문제와 만날 때 얼마나 빈곤해지는가? 나는 장률이 만나고 싶어졌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환대는 그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것뿐이다. 그 대답 안에 스며든 삶의 육신. 그것을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맹렬하게 노력하는 것. 장률과의 대담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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