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률 vs 정성일 대담 [3]
2006-03-30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정리 : 오정연

정성일: <당시>에 이어 <송사> <원곡>이라는 3부작을 만들겠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구체화된 계획인가. 3부작을 하나로 묶는 테마는 무엇이며, 3부작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장률: 생각은 거의 끝났다. <당시>처럼 시나리오 없이 찍을 생각이다. 그러자면 투자는 어렵겠지만. 당시, 송사, 원곡은 중국 시의 정신세계에서 큰 변화를 나타낸다. 송사는 당시의 형식에서 약간 벗어난 형태고, 원곡은 몽골 유목민의 힘으로 그게 다시 변한다. 송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문란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송사를 염사라고도 한다. 제일 문란한 시가 바로 송사다. 남녀상열지사를 표현하는 그림도 그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요즘의 중국도 굉장히 문란하다. 제일 먼저 흐트러지는 게 바로 성(性)이다. 그것은 꼭 영상으로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곡은 뮤지컬. 재밌는 영화 한번 찍고 싶다. 아무 데서도 본 적이 없는 뮤지컬이 될 것 같다.

타향의 이방인에겐 자신의 전통이 중요하다

정성일: 중국에선 ‘망종’이라는 말이 어떤 뉘앙스를 갖는가. 한국에선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말로, 절기상으로 초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때만 사용한다. 혹은 말 그대로 보리를 거두고 벼를 심는 계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장률: 중국에서 농민 혹은 농촌을 아는 사람은 망종을 다 안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시기다. 지금 중국 인구가 14억명인데, 그중 대다수가 아직도 농민이거나 농업과 관계된 사람들이다. 한국은 이미 발전해서 그렇지 않지만 중국은 아직도 농업과 밀접하다. 그래서 망종이라고 하면 금방 의미가 통한다.

정성일: <망종>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중국에 200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명 중 200만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흐트러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정성일: 최순희는 아들에게 열심히 한글을 가르친다. 중국에서 조선족 부모가 자식에게 조선말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가 궁금하다. 지금 이 모자가 살고 있는 곳은 지린성도 아니고, 그 동네는 조선족을 만나기도 힘든 곳이고 최순희가 정체성을 고민하는 지식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갈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창호가 한글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문자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순희에게 교육은 무엇인가.

장률: 타향에서 권력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자신의 전통과 스타일이다. 그것까지 없어지면 더 불안한 거다. 그래서 항상 보면, 조선족뿐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외국에 나가면 마찬가지다. 항상 중국말 하라고 그러고. 아이가 그것을 할 수 있든 없든 강조는 계속한다. 베이징에서 집사람도 그렇다. 정체성이든 뭐든 생각도 안 하는 사람이, 딸에게는 계속 조선말하라고 가르친다. 집사람이든 나든 한국말 잘 못하는데, 우리에게 배운 애들의 한국말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될 정도다. (웃음) 그래도 어쩌다가 애가 조선말을 한마디 하면 기쁘다. 공통적으로 소통하는 또 하나의 길이 생기는 것이니까.

정성일: 최순희와 함께 사는 매춘부 두명이 한밤중 거리에서 벽보에 적힌 글을 읽는다. ‘망종 때가 다가오니 동네방네 모든 이들이 곡식을 거둬들이는구나. 건강에 신경쓰고 사전예방에 힘쓰라. 망종 망종. 한해 중 가장 바쁜 때이거늘 올해도 찾아왔구나. 어서 고향에 가야지’라고. 나는 이 대목이 영화에서 가장 슬펐다. <망종>에는 고향에 가지 못하는 자들의 향수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당신에게는 두개의 고향이 있는 셈이다. 옌지가 하나의 고향이고, 아주 먼 고향은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었던 한국. 당신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

장률: 중국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이제 막 어색하게 이동하고 있는 단계다. 아버지가 농촌에 있거나, 아니면 삼촌이라도 농촌에 있는 등 모든 사람이 농업사회와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중국 유동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 출신이고. 창녀들도 대부분 시골에서 온다. 고향이 항상 그리운 건 창녀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돌아가자는 그 계절이, 항상 망종이다. 고향이 그리운 것도 있고, 고향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제일 어렵고 바쁘고 힘든 시기가 그때다. 창녀만 그런 게 아니라 베이징에 있는 가정부도 망종 때는 주인 집에 얘기하고 1주일이라도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온다. 고향을 생각하는 것도 있고, 사람들이 원래 사는 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기에 확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내 생각에 고향이라는 건 지역보다는 기억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다른 전통처럼 기억도 이어진다. 할아버지의 기억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전해진다. 제일 소중한 게 기억 아닌가. 그것까지 잊어버리면 더 아플 것 같다. 나의 기억에 충실하고 싶다.

정성일: <당시>와 마찬가지로 <망종>에도 사스에 대한 공포가 느껴진다. 이 마을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가 바로 역사일 텐데, 그 입구에 직원이 앉아서 체온검사를 하고, 이 상황이 영화 속에서 반복된다. 이것은 사스와 관계된 풍경이라기보다는 지금의 중국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였다.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차단이거나 감시사회의 느낌.

장률: <당시>를 찍을 때는 사스가 가장 기승을 부렸고, <망종> 때는 거의 지나간 시기였음에도 역에 가면 그렇게 검사를 했다. 영화에 나오는 역이 진짜 역이고, 촬영감독이 지나가면 진짜 그렇게 검사를 한다. 감시사회니 뭐니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담으려 했던 건 아니었고, 그저 그 시기의 일상의 풍경이다. 사스가 중국 사람들에게 정말 큰 공포를 줬다. 그런데 사스로 인한 공포가 가장 심하고, 가장 먼저 달아났던 사람들이 바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최하층 사람들은 원래 삶이 그렇기 때문에, 사스가 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에서 그런 검사를 하더라도 묵묵히 검사를 받고 지나간다. 그것이 나로서는 감동적이었다. 아, 저 사람들은 저렇게 꿋꿋하게,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일상을 살아가는구나.

정성일: 경찰서에 최순희가 잡혀갔을 때 공안원 왕씨가 뭔가를 낭독한다. “남녀노소 마을 사람들 모두 모였지. 고기 잡으러 강으로 갔어. 물이 깊어지자 한 여자가 남자의 거기를 건드렸어. 남자는 소리쳤지. 그러자 여자가 말했어. 잡은 놈이 임자지.” 그런데 이 낭독은 그 맥락을 모르겠더라.

장률: 그건 일종의 휴대폰 문자 메시지였다. 요즘 중국에 휴대폰으로 돌아다니는 문자가 전부 그런 이야기밖에 없다. 일종의 음란메일인데, 현장에서 그걸 실제로 받은 사람이 있어서 그대로 사용했다. 그 구절이 또 그의 성격과 맞고. 만날 엉뚱한 생각만 하고 뭘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다. 남들과 좀 다르게 자기 세계에 빠져서 어찌 보면 고독한 사람 아닌가.

최하층 사람들에겐 사회가 멀다

정성일: <당시>는 카메라가 내내 방에 있으니 몰랐는데, <망종>을 보면 카메라가 인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그 멀리 떨어진 카메라가 단 한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서서 바라보는 카메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설정할지 원칙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장률: 최하층 사람들에게 그만큼 사회가 멀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해도 꼭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내 눈에 보이는 그 거리가, 내 감정에 맞아떨어지더라. 주류사회의 움직임과 변두리 사람의 움직임이 다르다. 그리고 최순희의 성격도 그렇다. 그는 항상 참고 산다. 감정이 터지려면 많은 일이 필요하다. 카메라가 가만히 있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뭔가 감정은 생기는데, 계속 참는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행동을 한다. 그 장면을 가장 먼저 찍었다. 항상 고민한 것이 영화의 마지막이었다. 계속 떠오르지 않다가 헌팅하는 첫날 떠올랐다. 스탭들과 베이징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변두리로 차를 몰고 갔다. 그러다가 큰길 옆에 작은 길이 나오기에, 한번 들어가봤는데 최순희의 집이 나왔다. 사람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이었는데, 그걸 보니 이상하게 마음에 감정이 들어가더라. 그리고는 혼자 대합실 넘어서 갔다. 그게 최순희의 마지막 길이다. 근데 역 저쪽 멀지 않은 곳에 보리밭이 있더라. 거기까지 나가서 보리밭을 보니까 마지막 장면, 최순희가 나가는 그 모습이 확 떠올랐다. 그 장면이 떠오르니까, 이제 됐다, 이제 이 영화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순희 집 앞에서 기다리던 스탭들에게 그냥 여기서 찍자고 했더니 촬영감독이나 미술감독이나 다 미쳤다고 하더라. (웃음) 그 뒤에도 최순희가 어디로 갔는지를 고민했는데, 그가 다시 다가와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사운드를 그렇게 처리했다. 암전 뒤에 자막이 올라갈 때, 사운드가 좋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그리고 관객이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 참아준다면 아마 알 수 있을 거다. 최순희가 떠나는 소리가 점점 그 방향으로 작아지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다시 돌아온다. 사람들이 최순희가 어디에 갔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돌아와서 우리 옆에 있다고 말한다. 그 영화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건, 진짜 내 감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정성일: 멀리 세워진 카메라가 항상 물끄러미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신과 숏이 대부분 일치한다. 롱테이크 스타일은 아닌데 신과 숏을 일치시켰다. 당신에게 숏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혹은 숏을 나누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장률: 그 감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자를 권리가 나에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사람들은 모르는데 자르는 것은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 도움도 못 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을 보는 게 제일 싫다. 그냥 차라리 가만히 있을 것이지, 신경질나지 않나. 컷을 나누면 내가 꼭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정성일: 하지만 조선쪽 김씨를 최순희가 두 번째로 만나는 장면은 이례적으로 한신 한숏으로 끝내지 않고, 네컷으로 쪼갰다. 나는 그 일관성을 깰 때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률: 그 장면은 두 번째 만남이 아니라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대화가 없이 노인이 당시를 읽을 때, 김씨가 멀리서 보는 것이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변화한다. 그런 감정의 변화는 한컷으로 보여줄 수 없어서 네번으로 쪼개서 보여줬다. 일관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너무 형식적인 것 같다. 그렇게 컷을 쪼개서 최순희의 뒷모습과 김씨가 자전거를 탄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최순희의 고독감이 보인다. 그것도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정성일: <망종>의 많은 장면에서 인물의 등이 보인다. 숏을 분할하지 않는 당신의 영화에서 등을 본다는 건 등이 하나의 표정이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이 가급적 서 있는데, 통상 영화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상상선 때문에 인물을 45도 각도에서 찍게 마련이지만 당신은 항상 정면을 찍는다. 초상화 같은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장률: 노신 시대 중국의 유명한 산문가 주자청(朱自淸)이 쓴 산문 중 <뒷모습>(背影)이 있다. 유학 가는 자식을 위해 담을 넘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의 일상에 대해서 묵묵히 서술하다가 아버지가 뒷모습을 보이는데, 거기에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흐른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을 관찰할 때 낯을 보면 별로 깊게 못 들어간다. 얼굴에는 표정이 있지만, 뒷모습은 이상하게 더 감동을 받는다. 초상화처럼 찍은 것에 대해서는, 그 문제 때문에 촬영감독과 항상 말이 많았다. 그는 45도로 찍자고 하고, 난 그런 것도 하나의 관습이니 그걸 다 버리고 정면으로, 마주 보는 앵글로 찍자고 하고. 최순희가 김치 판매 허가를 받으러 가는 공상국(공업과 상업의 허가를 내주고 관리하는 기관)을 찍을 때, 촬영감독이 또 45도로 찍으려 하더라. 그날은 기분이 좀 나빴음에도 그게 아니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건물이 결국은 권력을 뜻한다. 천안문, 특히 베이징은 길이나 건물이나 남북 동서로 뻗어서 질서가 있다. 뭐랄까 중후함과 위압감, 장중함을 준다. 권력이라는 게 항상 그렇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쳐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촬영감독을 그 이야기로 설득했다.

정성일: 카메라는 서 있고 인물이 움직인다. 그리고 인물들이 서 있거나 걸을 때 거의 연기하지 않는다. 대사를 할 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걸어다닐 때 정상적인 속도보다 훨씬 늦게 걷는다. 느릿느릿한 것이 리듬을 만든다. 보고난 뒤 생각해보니 모든 등장인물이 장례식에 와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한 설정은 연출로서는 모험일 수 있다. 자칫하면 보는 사람과 끈을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장률: 서울에서 사는 사람과 베이징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촬영지에 사는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모두 다르다. 물론 어느 정도 연출은 개입됐겠지만. 황폐화된 공업환경에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게 실제로 그렇다. 특히 최하층 사람들의 삶에는 표정이 없다. 마음이 그런 사람들은 표정이 적을 수밖에 없다. 물론 생동감있게 연출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러면 내 감정과 그들의 감정을 혼돈할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을 그런 각도에서 바라보고, 표현하면 그것이 좀더 그 사람들의 일상과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변두리의 풍경 속에는 실제로 사람도 별로 없다. 10년 전 남쪽의 시골을 버스 타고 지나간 적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멍청하게 있는 닭과 똑같더라. 그걸 보는데 마음이 찡했다. 그걸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정성일: 영화가 시작한 뒤, 대사는 한참 있다 등장한다. 첫 번째로 들리는 목소리는 창호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노래라기보다는 베이징 오페라를 하는 느낌이다.

장률: 그게 바로 이태백이 쓴 당시다.

정성일: 그 다음에는 거리의 매춘부가 유행가를 부른다. 그 다음은 최순희가 김치를 파는 옆에서 노인이 책을 낭독한다.

장률: 그것도 당시다. (웃음)

정성일: 그때까지도 영화 속에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영화 안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아이들의 당시, 유행가 그리고 할아버지의 낭독이 일종의 리듬을 이룬다. <당시>에서 화면에 떠오르던 시처럼. 대사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것을 배치했을 땐 어떤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장률: 대사는 언어로 그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근데 가난한 사람의 경우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말하는 걸 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최순희를 쫓아다녀야 한 마디든 두 마디든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순희는 앞부분에선 말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에 만났을 땐 말이 적지 않나. 알수록 말도 늘어나고 소통도 하게 되고.

정성일: 첫 번째 대사는 영화 시작 뒤 6분, 열세 번째 숏에 첫 번째 대사가 나온다. 관객은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야 첫 번째 대사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대사는 항상 아주 간결하다. 할 수만 있다면 대사없이 영화를 진행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경험적으로 소설가였던 감독의 특징은, 영화가 수다스럽다는 것이다. 때로는 대사에 목숨을 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하지만 당신의 영화에는 대사가 극단적으로 미니멀하다. 문학을 했던 당신이 대사를 못 쓸 리가 없다. 그리고 대사가 적어지면 해석은 다양해질 수 있겠지만, 의미는 불투명해진다. 그것을 각오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장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원래 말이 적다. 이건 내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저 바보 같은 놈이 장가나 제대로 가겠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게 굉장히 오래 갔다. 그 시기는 지옥이었다. 사람 만나는 게 지옥이고. 그때는 사람들이 말없이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런 것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요즘 막상 그게 없어지니까 말이 많아지고 나도 내가 싫다. (웃음)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정성일: 당신의 영화에는 황폐함의 정서가 있다. 공간 역시 미니멀하다. 이를테면 최순희의 집은 거의 가구가 없어서 마치 세트장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볼 때, 세트에서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상소도 마찬가지로 하얀 벽에 덩그러니, 책상만 하나 놓여 있다. 노래방에 가면 모니터만 한대 있다. 조선족 춤 가르쳐주는 곳에 갔더니 방금 칠한 것처럼 눈부시게 하얀 벽이 있었다. 거리를 걸어갈 때는, 등장인물 외에는 거리가 텅 빈 느낌이다. 말하자면 당신은 영화 속에서 공간을 비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적인 느낌도 준다.

장률: 그렇게 사는 사람들, 그들의 환경이 사실상 그것과 가깝다. 최순희의 집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잠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가구도 필요없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깨끗하게 산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거리가 왜 그렇게 깨끗하냐고 묻는다. 첫째 이유는 원래 그 장소들이 황폐하기 때문이다. 스탭들은 여기에 뭔가 더 넣는다고 하고, 나는 뭔가 더 빼라고 하고. 그리고 영화는 꼭 삶과 같은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영화를 할 필요가 없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정성일: 최순희가 공상소에서 노점상 허가증을 받을 때, 여자 직원이 최순희에게 조선족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실제로 가르쳐준다. 그리고 카메라는 둘이 목욕탕에 가는 장면까지 쫓아간다. 서로 잘 모르는 두 사람이 목욕탕에 함께 간다는 것은, 친밀감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동성애적 친밀성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장률: 동성애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둘 중 한명은 권력이 있고, 한명은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 여자 중 한명은 나머지 한명을 도와준다. 거기에서 나아가 사람끼리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춤이다. 무용도 예술 아닌가. 일상에서 예술이 개입되면, 권력을 떠나서 잠시라도 둘이 소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용을 한 다음에는 땀이 많이 난다. 집사람이 무용을 해서 잘 안다. 그렇게 땀 흘린 두 사람이 함께 목욕탕에 몸을 뻗고 있는 거다. 가면을 다 벗고 옷을 벗고 앉아 있을 때는 소통이 좀더 잘된다.

나체의 남자는 힘이 없다. 바보같고

정성일: 영화에는 이 밖에도 옷을 벗은 장면이 두번 더 있다. 하나는 조선족 김씨와 최순희의 불륜장면이다. 남자가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게 일반적인데, 이 장면에서는 남자가 옷을 벗는다. 그런데 조선족 김씨의 몸은 정말 초라한 느낌이다. 게다가 곧 섹스를 해야 하는데 발기하지 않은 남자의 성기까지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이 남자는 굉장히 초라해 보인다. 또 하나는 공안당국에 최순희가 잡혀갔을 때, 공안원 왕씨가 최순희를 겁탈한 다음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겁탈 뒤의 초라함을 보여줄 때는, 여자의 벗은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예외적으로 왕씨가 벗은 몸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느낌을 대신한다. 말하자면 두 장면에서 남자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여자의 몸을 보여주는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연출한다.

장률: 일부러 처음부터 여자는 벗기지 말고 남자만 벗기자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스탭들은 여자도 벗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냐는 말도 했다. 여자를 벗기면 안 된다는 고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영화 속에서 벗은 여자들 보는 걸 좋아한다. (웃음) 근데 거기서는 내 마음이 그렇게 못하겠더라. 그렇게 어렵게 살아온 여자를 벗기기까지 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된다는 생각, 하여튼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옷을 입고 있으면 다 사람 같다. (웃음) 그런데 옷을 벗겨놓으면 다들 멍청하고 바보 같다. 가면을 벗으면, 그것도 자기가 벗는 게 아니라 여자가 가면을 벗기는 건데, 나체로는 남자들이 힘이 없다, 바보 같고. 그래서 항상 사랑과 맞설 때 여자들은 용기있다. 거기에 집착하고 단순하게 들어가는데 남자들은 복잡하다. 금방 달아나고 도피하고. 그리고 경찰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의 정면도 보이지 않는다. 김씨가 정면으로 나온 이유는, 멍청하지만 최순희가 옷을 벗길 적엔 그 안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라하긴 해도 사랑이 있다. 근데 경찰은, 절대 최순희가 그의 옷을 벗길 리가 없다. 경찰이 최순희를 벗겼을 것이고, 자기가 혼자 옷을 벗었을 것이고, 일이 끝난 뒤 밖으로 나오지 않나. 그게 바로 최순희의 시선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나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장면을 찍었냐고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 뒷모습이 초라하다기보다는 너무 교만하다.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한다 함은, 사랑이 있으면 그 앞에서 옷을 벗고 입는다. 하지만 아주 무시할 때는, 옷을 덜렁덜렁 들고 저쪽 차로 가버린다. 그 뒤에 경찰이 약혼녀와 함께 김치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피해를 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게 괘씸하고 아파서 그렇게 보여줬다.

베이징은 회색의 도시, 공장들은 푸른색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은 영화를 보고나서 읽으십시오)

정성일/(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주의)<망종>은 중국영화 중에서 색감이 매우 특별했다. 대부분의 중국영화가 붉은색을 기조로 썼다면 이 영화는 푸른색이 기조를 이룬다. 이를테면 시작할 때 창문틀, 창호의 트레이닝 바지, 시종일관 최순희가 입고 있는 청바지, 방에 놓인 선풍기의 푸른색, 밤에 거리에서 번쩍거리는 형광등의 푸른색, 그리고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창호가 황금인어연을 푸른색으로 칠하면 그 다음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질문은 두 가지다. 중국에서 푸른색이 주는 정서는 무엇인가. 황금인어연을 푸른색으로 칠하는 창호의 행동, 죽기 전 마지막 그의 행동에는 문화적으로 뭔가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

장률: 그 영화는 실상 베이징에서 찍은 것 아닌가. 베이징에서 40분 떨어진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베이징의 기본 컬러가 회색이다. 회색이 어울린다. 중국 전통 건물도 그렇고, 만리장성도 회색이다. 전통적으로 기본색감이 돌 때문에 회색이다. 붉은색은 항상 권력을 의미한다. 천안문도 붉은색 아닌가. 하지만 일반적인 집들은 다 회색이다. 내가 촬영했던 장소, 공업화되다가 계속 이어갈 힘이 없어 폐쇄된 변두리 지역은 다 그렇다. 도시 안에는 그 힘이 계속 받쳐주는데, 변두리는 이내 그게 무너지고 공장이 파산되고. 근데 거기에 공장들이 푸른색이다. 푸른색으로 지어진 건물은 공업과 관련있다. 그 색은 결국 공업화 혹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원래 회색에서 뭔가 컬러를 찾아보자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보고 푸른색을 선택했다. 이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지만, 마음속에는 그래도 뭔가 변화하자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이 사회가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하층민들에게 실제로 좋은 걸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비극을 가져다준다. 창호와 같은 아이들은 꼭 그런 것을 흉내내고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 연을 처음 칠한 게 아니라 다른 데서부터 하잖나. 아가씨의 화장실이나 닭처럼. 그래서 연에까지 색을 칠한다. 그리고 연에 푸른색을 칠한 다음 아이는 죽는다. 그것도 역시 희망인 줄 알았던 변화가 비극을 낳은 경우다. 상징보다는 일종의 징조인 셈이다.

정성일: 영화를 보면 아들이 죽었다는 걸 미루어 알 수는 있지만 그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최순희의 얼굴을 포커스인한 상태에서 아웃하고 지붕을 보여줌으로써 지붕에서 떨어졌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말을 안 하기 때문에 그저 죽음으로만 남겨진다. 이 장면에는 생략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일관된 불친절함이 있다. 말하자면 당신은 영화가 산문적으로 보이길 원치 않는 것 같다.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률

장률: 그것도 내 감정과 관계된다. 사람의 생명이란 건 매우 연약하고 금방 없어진다. 어떻게 죽었는지 원인도 모른 채 사람이 죽는 게 일상이다. 그게 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창호가 죽는 건, 기찻길 옆에서 발견됐고, 하여튼 사고로 죽은 것뿐이다. 최순희가 창호를 봤을 땐 이미 죽은 뒤다. 창호가 어떻게 죽었다는 걸 최순희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걸 보여준다는 건, 관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그저 나도 최순희다, 내가 현장에 갔더니 창호가 죽었다, 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사고가 났다는 건 알게 되잖나. 포커스를 사는 건물, 집으로 옮겼던 건, 그 시선이 창호의 시선이라는 의미였다. 집이라는 건 누군가가 사는 곳 아닌가. 그 장면도 나는 그렇게 포커스 이동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촬영감독은 상식과 맞지 않는다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편집하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이나 촬영감독들 모두 감정이 그렇게 움직인다며 좋아한다. 아들이 엄마의 얼굴을 보고, 또 엄마와 함께 살았던 집을 보는 느낌이다(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해제합니다).

그저 다 빠뜨리지 말고 보시길

정성일: 가장 힘들게 찍은 장면은 어디인가.

장률: 마지막 신. 거기에 기차들이 많이 서 있잖나. 그 너머 보이는 게 식량창고다. 그래서 그 철도에서 마지막 장면을 찍으려면 기차를 없애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국에서 딱 30분밖에 시간을 안 줬다. 게다가 그전 역에서는 며칠 전에 사고가 났다더라. 유난히 긴 한컷을 준비하고 세팅하려니 딱 두 테이크를 찍을 시간밖에 안 남았다. 첫 테이크에는 예상치 못했던 기차가 지나갔다. 나는 원래 카메라에 그 너머 보리밭까지 최순희를 따라 걸어가라고 주문을 했는데 중간에 기차가 지나갔으니….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이, 최순희를 연기한 사람이 기차를 피하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차가 지나간 뒤 건너 보리밭까지 가긴 했는데, 기사가 이내 주저앉아버린 거다. 너무 힘이 들고 긴장해서. 두 번째 장면에선 기차는 안 지나갔는데 역시나 촬영감독이 주저앉아버렸다. 화가 나더라. 나는 계산 다 했는데. 더이상은 시간이 없어서 찍을 수도 없고. 하지만 영화는 원래 다 만족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편집할 때 좀더 일찍 암전하고, 사운드로 표현하니까 훨씬 더 좋더라. 관객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 정도에서 끊어주는 것이 좋다. 어차피 그전까지 느낄 건 다 느꼈다. 거기서 보리밭까지 가면 자랑이다. 운이 좋아서 그런 자랑을 못하게 된 셈이다. (웃음)

정성일: <망종>을 볼 미래의 관객에게 영화를 볼 때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하자면.

장률: 그건 내가 생각도 못하고 답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이 내가 강조한 걸 빼놓지 말라고 하면 다른 걸 빼놓는다. (웃음) 내가 강조한 게 그 사람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저 다 빠뜨리지 말아달라.

통역 도움 도성희·일러스트레이션 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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