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률 vs 정성일 대담 [2]
2006-03-30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정리 : 오정연

정성일: 한국 감독 중에서도 조선족 동포로는 첫 번째 감독이고 중국 감독 중에서도 첫 번째 조선족 감독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찾아봤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장률: 생년월일부터 시작하면 되는 건가? (웃음) 1962년 5월30일 옌지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돈화라고, 옌볜인데 한족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았다. 조선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어머니가 세 누이와 나를 데리고 문화혁명 시절에 그곳에 살았다. 다시 옌지로 이사한 다음에도 조선말을 모르니 계속 한족학교를 다녔다. 대학까지 옌지에서 다녔는데 그때부터 자유주의분자였다. 공부를 거의 안 했고, 졸업 뒤 학교에 남았지만 그때도 일은 별로 안 했다. 1989년부터 베이징에서 글을 썼다. 십몇년을 집에 있으려니 마누라에게도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어서, 글을 쓰는 척했다. (웃음) 십몇년간 마누라 월급으로 애 키우고 장 보면서 열심히 살았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되지 않는다. 사람이 바쁘게 살다보면 1주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고 싶은 시기가 있지 않나. 순 그런 심정으로 쉬었는데, 10년이 지나간 것이다. 항상 마누라한테 감사하는 마음이면서 한편으로는 마누라는 왜 이렇게 놈팡이 같은 남편과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분석을 해보니, 권력과 연결되더라. 어느 가정이든 누군가 돈을 벌면 권력을 가진다. 어차피 돈을 못 버는 사람이 눈치를 보게 되고. 권력자는 항상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그것도 낙이다. 아내도 이 남자, 말 잘 듣는구나, 이러면서 살았을 거다. 그런 걸 보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자가 왜 여자한테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 찍는 게 행복하냐고 묻는데, 난 하나도 행복할 게 없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게 결국 권력 때문이고, 영화를 찍는 건 그 반대에 서자는 것이지만 영화의 제작과정은 또 힘으로 진행된다. 그게 제일 싫다. 스탭들이 모두 함께 고생하고 좋은 생각도 많이 하는데, 결국 감독 혼자 잘났다고 결정하고, 나중에 좋은 결과도 다 감독의 몫이 된다. 하지만 영화를 찍다보면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하니까 너무 힘들다.

세뇌를 할 수는 있어도, 입맛은 그렇게 못하지 않나

정성일: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

장률: 평범한 직장을 다니시던 평범한 분들이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시고, 어머니는 지난해에 돌아가셨고, 성실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2세.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태어나셨다.

정성일: 1962년생이라면,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 문화대혁명을 맞았고, 10대 전체가 그 시기였던 셈이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절을 보낸 문화혁명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장률: 지금처럼 분석하지 않고 그냥 생각할 때는, 내 가족의 일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감옥에 들어가서 5년인가를 계셨다. 감옥 들어간 사람들의 가족은 도시에 살 수 없어서 시골 중에서도 시골, 초등학교에 전구조차 없는 곳으로 보내졌다. 생활이 다 달라져버린 거다. 그곳에서 이방인처럼 지낸 셈인데도, 이상하게 정이 더 간다. 어린 시절이니까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물론 그래도 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나, 내가 그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거다. 문화혁명이라는 건 결국 우리 가족의 생활을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요즘에도 무슨 운동이 벌어진다, 고 하면 가족에게 뭔가 변동이 생긴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성일: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 것은 언제쯤의 일이었나. 그걸 깨닫게 된 계기라든가 그 순간에 가졌던 심리적인 변화 같은 건 어떤 것이었나.

장률: 정확히 계기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다. 우리는 한족 마을에 사는데 집에서는 어머니랑 누나들이 조선말을 했고. 누나들도 몇년이 지나니 중국말과 조선말을 섞어서 하고. 부모님도 그걸 꼭 강조했고, 부모님의 습관은 나도 모르게 닮아가더라. 특히 음식. 음식이 제일 영향을 준 것 같다. 사람 머리를 세뇌할 수는 있어도, 입맛은 그렇게 못하지 않나. 이를테면 우리 집에서 김치를 먹다가 한족이 들어오면 이게 무슨 냄새냐고 난리다. 하지만 그 좋은 냄새를 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그러다보니 김치 냄새가 너희 냄새보다 더 좋다면서 고집도 생겼다. 그런 식으로 차차 다름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커서 분석을 하려 들면, 문제가 생긴다. 그전에는 그저 피부로 느낄 뿐이었는데, 분석을 하면서 자기 것을 찾겠다고 들면, 오히려 진짜 내가 가려는 길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래도 결국 남는 것은 음식 같다.

정성일: <망종>에는 조선족 최순희가 나오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한국과 관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의 당신에게 한국인의 피를 갖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한편으로는 한국의 피가,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국적이 있는 셈인데, 두개의 매듭을 함께 갖는 게 어떤 의미인가.

장률: 국적은 정치가들이 주는 것이고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 국적도 좋고 중국 국적도 좋다. 하지만 핏줄, 문화의 전통은 내가 살아가는 데 건강한 무엇인가를 준다. 그것은 따라가고 싶은데, 국적과는 관계없이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어디를 응원하겠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축구를 응원하는 것은, 우리 전통을 찾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우리나라, 우리 것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건 너무 싫다. 정치가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조정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정성일: 한국에 처음 온 것이 언제였고, 그때의 첫 느낌이 어떤 것이었나.

장률: 1995년 서울에 처음 왔다. 김포공항에 착륙하는데, 땅을 보니 마음이 진짜 이상했다. 나도 사실 감정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그냥 서울 한번 가볼까, 이런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땅을 보니까 다르더라. 그 뒤로는 한국에 올 때마다 공항에서 땅만 보면 술 생각부터 난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누구한테 술 먹자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정체성이 아니겠나. 그리고 할아버지 고향 경북 의성에 갔는데, 완전히 산골이더라. 할아버지가 거길 떠나서 만주벌판까지 어떻게 걸어갔을까 생각했다. 나는 겪지도 못했던 그 기억이 나와 완고하게 연결되더라. 눈물도 글썽거리고. 난 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참 이상했다.

보르헤스를 읽고 소설을 그만뒀다

정성일: 소설은 천안문 사태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나.

장률: 그전부터 쓰다가 89년 이후에는 아예 그만뒀다. 1986년에 등단했다. 데뷔작 제목을 많이 물어보는데, 필명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친한 사람들도 그건 잘 모른다. 앞으로 영화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게 된다고 해도, 옛날 이름도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소설을 낼 것 같다. 영화 하는 장률이 썼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다. 나는 소설과 영화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영화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문학 하는 사람이 영화를 할 때, 문학은 장애가 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영화를 볼 때, 문학성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아예 보지 않는다. 그러려면 그냥 책을 보면 된다.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그림을 보고 똑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각각의 사람마다 보는 게 다 다른데, 영화는 모두가 같은 걸 본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것, 관객과의 대화가 중요하다. 어색하긴 하지만 관객이 뭘 물어보면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소리를 들었으니까 같이 얘기할 수 있다. 소설은 작가가 책을 쓴 다음에 이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중국에 전종서라고, 노신 이후 최고의 대가가 있다. 소설도 몇편 안 썼지만 아주 잘 썼다. 그러다가 그만두고 최고의 학자가 됐다.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찾아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전화로 한다는 말이, “달걀을 사서 먹었으면 그걸로 끝이지, 알을 낳은 닭은 아무 의미없다”고. 난 문학과 영화가 그렇게 다르다고 본다. 문학을 하다가 영화를 하는 사람은 그 두 장르를 철저히 차단시켜야 한다. 그래서 소설 얘기는 하기 싫어한다.

정성일: 소설을 썼을 때는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었을 것이다. 존경하는 작가는 누가 있나.

장률: <홍루몽>(紅樓夢)의 작가 조설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역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귀족가정의 몰락을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리는 책인데, 한 사람이 느끼는 고독감을 다룬다. 그는 그걸 쓴 뒤, 돈도 별로 없고, 술주정뱅이로 죽었다. <홍루몽>에 그런 구절이 있다. 滿紙荒唐言 一把辛酸沮. “한 페이지 가득 황당한 말들이 적혀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한줄의 쓰린 눈물이 흐른다”는 뜻이다. 서양 작가 중에서는 카프카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글을 그만둔 계기 중 하나는 보르헤스 책을 읽은 것이었다. 이 사람이 다 썼는데, 내가 또 뭘 쓰겠나 싶었다.

정성일: 몇몇 기사에서, 소설과 이혼하고 감독이 됐다고 말한 것을 읽었다. 일종의 결단처럼 들렸다. 감독이 되겠다는 결정을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내릴 때, 그것이 세속적인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영화의 특별한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영화로 하겠다는 결정 때문이었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장률: 그건 전주영화제에서 <당시>가 상영될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 누군가로부터 문학과 영화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문학과 이혼하고, 영화와 결혼했는데, 지금 여자를 두고 옛날 여자를 이야기하면 이상하다고 농담을 한 거였다. 감독이 된 계기는, 아까 말한 게 있긴 하지만, 모든 일의 원인이 하나는 아니잖나. 또 찾아보면 이런 게 있을 것 같다. 내가 원래 영상기억이 어릴 때부터 특별했다. 어느 정도냐면, 길을 가다가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그 얼굴을 10년 뒤에 어디에서 뽑아낼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언제 어떤 날씨에서 봤던 얼굴이라고. 근데 영화를 시작하고 나니까 그 능력이 점점 없어지더라. 그래서 다른 사람 영화, 이를테면 할리우드영화를 볼 때 즐기는 한편, 머릿속에서 다 뜯어고치곤 했다. 아마 내가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없음에도 할리우드영화처럼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영화는 누구나 찍을 수 있다

정성일: 보도자료에 영화감독을 하게 된 계기가, 영화감독을 하던 친구와 말싸움을 하던 중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영화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쓰여져 있다. 어떤 친구인지 말해줄 수 있나.

장률: 이름을 말하면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했다. 난 영화는 전혀 몰랐지만,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진짜 감정을 써달라는 친구의 말에 설득당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썼더니, 그 친구가 엉엉 울면서 너무 시나리오를 잘 썼다고 하더라. 아마 지금 그걸 다시 보면 문학성이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 보고 울면, 그건 잘못된 시나리오다. (웃음) 그걸 가지고 이 친구가 영화국에 검열받으러 갔는데 그날로 반려됐다. 그랬더니 이번엔 검열에 통과할 수 있게 수정해 달라며 찍을 때는 원래 시나리오로 찍겠다더라. 거기에 또 바보처럼 속았다. 어떤 게 문제냐고 물어보고, 그 방향대로 고쳤고, 통과됐다. 근데 진행되는 걸 보니까, 검열에 통과된 시나리오로 준비를 하더라. 그래서 화가 났다. 그제야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감독증이 있고, 그게 내 밥줄인데, 어떻게 하겠냐고. 아, 중국에선 감독증이 있는 사람만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밥줄은 이해를 하지만 왜 거짓말을 했냐며, 그럴 거면 나를 끌어들이지 말 것이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며 술을 먹고 싸웠다. 화를 내고 욕을 하는데 그 친구는 계속 참고 웃고 있더라. 그럴 거면 내가 먼저 찍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 친구가 반발하면서, 영화는 아무나 찍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건 공부도 해야 하고,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내가 누구나 찍을 수 있다고, 내가 당신보다 먼저 찍어서, 제일 먼저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일어났더니 그 말이 계속 생각나고,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했다. 나도 참 못된 놈인 게, 그렇게 만들어서 그 친구에게 제일 먼저 보여줬다. 그렇게 찍은 게 <11세>. 그 친구는 원래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결국 영화를 완성하지 못했다.

정성일: 지금의 중국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은 세 가지 흐름을 포함한 질문이다. 하나는 장이모나 첸카이거처럼 제5세대라고 불렸던 감독들에 대한 것 그리고 지아장커와 그의 지하전영 친구들, 왕샤오솨이, 유릭와이 등의 감독들 혹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서방세계에서는 지하전영으로 분류되는 왕차오, 왕빙 감독들, 마지막으로 이쪽에도 저쪽에도 포함되지 않는 <귀신이 온다>의 장원 감독과 같은 흐름. 이 세 가지 흐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며 당신은 이 흐름 중 어디에 자리하고 있나.

장률: 사실 이건 질문을 받으니까 이제야 생각하는 거다. 장이모, 첸카이거가 지금과 같은 길을 간다고 많은 사람들이 욕한다. 지금 그 사람들 영화 중 좋아하는 것도 없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잘못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허우샤오시엔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 그와 같은 대만 감독과 중국 5세대 감독을 비교할 때, 대만 감독들이 오히려 훨씬 더 중국적이라고. 중국 5세대는 세계로 나가버렸고. 그 뿌리가 대만보다 훨씬 얕은 것 같다. 그러자 허우샤오시엔이 자기 분석으로는, 대만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항상 전통은 변방에서 지키는 것이지, 중심에서는 오히려 다 사라진다. 5세대는 어느 시대에 비유를 맞추고 그것을 따랐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건 대만 감독들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일관성이 있다. 파동은 있지만 그 질이 떨어지지 않고 그 수준에서 계속 나아간다. 6세대 감독 중 제일 중요한 감독이 지아장커라고 본다. 그의 초기작 두 작품 <소무>와 <플랫폼>을 아주 좋아한다. 이 감독이 앞으로 어떻게 나갈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영화를 안 보게 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계속 관심이 간다. 그 시기의 감독들 중 예술가라고 할 만한 이들은 내 생각에 장밍과 로우예가 아닌가 싶다. 어떤 감독들의 영화는 그런 게 전혀 안 보이고 오히려 소설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데, 영화로 나를 감동시키는 건 그들의 영화였다. 왕빙의 <철서구>는 놀랄 만한 작품이었고, 아주 잘 찍었다. 지금의 6세대랑 어떤 면에선 비슷한 데가 있는데, 그 비슷한 게 썩 좋은 것이 아니다. 대만 감독들 보면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의 영화와 그들이 다루는 세계가 전혀 다르잖나. 최근에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한 두 감독의 영화를 봤다. 6세대와는 전혀 달랐다. 하나는 리홍기 감독의 영화였고, 하나는 전주영화제에서 상을 탔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 부문에 초청된 리우 지아 인의 <우피>다. 이 두 감독의 영화를 보고 아주 기뻤다. 냄새가 다르더라. 중국영화가 이랬으면 좋겠다. 비슷하면 재미가 없다. 자기 색깔이 필요하다.

예술영화의 영향? 전혀 못 받았다

정성일: 특별히 영화 교육을 학교에서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영화를 통해 영화를 배운 셈이다. 특히 마음에 남거나 영향을 받은 영화와 영화감독이 있다면.

장률: 영화를 하기 전에는 예술영화는 한편도 못 봤다. 그러니 영향을 전혀 못 받은 거다. <11세> 전에는 할리우드영화밖에 몰랐다. <11세>를 찍고 나서, 차차 예술영화들을 찾아봤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가 무슨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 웃었다. 그게 언제 적 영화인데, 그걸 이제 봤냐고. 요즘은 영화를 보면 식은땀이 난다. 내가 이 사람들 영화를 진작 봤더라면, 영화를 시작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헝가리 감독 중 미클로시 얀초라는 감독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처음 영화를 봤는데 정말 놀랐다. 지난해 말에 또 다른 헝가리 감독인 벨라타르의 영화를 봤다. 고래를 잡아서 차에 싣고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것도 놀라웠다. 그들은 큰 영화제에서 상도 못 탄 감독들인데, 상을 받은 영화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화였다.

정성일

정성일: 영화를 하다보면 힘든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이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떠올리는 그런 사람이 있나.

장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11세>를 찍을 때 조감독이 영화학교 졸업생으로 젊고 박식한 친구였다. 현장에서 내가 촬영감독에게 이렇게 찍자고 말을 할 때면, 나를 도와준다는 게, 이 장면은 타르코프스키라면 이렇게 찍었을 거라고 살짝 말을 하는 거다. 근데 난 당시 타르코프스키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게 너무 싫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걷어치우라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얘기하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 찍으라고. (웃음) 그래서 유명 감독의 이름만 들으면 나한테 불리한 것 같고, 짜증이 났던 경험이 있다. 그렇게 영화를 다 찍은 다음에 그 친구를 찾아가서 물어봤다. 그때 말했던 감독들이 누구였냐고. 그래서 다시 찾아봤더니 진짜 위대한 감독들이더라. (웃음) 그때 본 영화가 <노스텔지아>였다.

정성일: <11세> <당시> <망종>의 프로듀서인 최두영씨는 아마도 지구상 최고의 장률 팬클럽 회장이 아닐까 싶다. 그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장률: <11세>의 색보정과 후반작업을 한국에서 했다. 중국에서 후반작업을 하려면 역시나 일정한 수속이 필요했고, 돈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걸 들고 한국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이라곤 이창동 감독뿐이었다. 그와는 글쓸 때 알게 된 사이다. 한국에 오면 그의 집에서 잘 정도로. 그때는 그 사람이 영화를 찍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현장에 놀러오라고 해도, 영화는 왜 하나 싶었다. 내가 <11세>를 할 때, 그는 <박하사탕>을 끝내고 유명한 감독이 됐더라. 그래서 단편을 들고 찾아가니까, 당신이 왜 영화를 찍었냐고 묻더라. (웃음) 하여튼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유명한 감독이라니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최두영씨를 소개해줬다. 그가 <박하사탕> 색보정을 했다더라. 그는 참 열정적이고, 나에게도 아주 잘해줬다. 영화 이야기도 함께하고. 그래서 <당시> <망종> 모두 함께했다. 그리고 또, 후반작업 전문가 아닌가. (웃음)

정성일: <당시>와 <망종>을 찍은 스탭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떻게 끌어모았나.

장률: 중국에서 스탭들은 지하와 지상의 구분이 없다.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돈을 주면 하고 혹은 뜻이 맞으면 함께한다. 그래서 단편영화를 찍을 때의 촬영감독도 아주 좋은 친구였다. 당시 그는 상하이영화촬영소에 소속된 사람이었고, 내가 전화를 걸어서 나는 이런 사람이고, 단편을 찍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그런데 돈은 없다고 말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을 했더니, 이런 영화를 찍겠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왔다. <당시>의 촬영감독은 리우용홍이라는 사람인데, 양리의 <망징>을 찍은 아주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게 돼서 같이 술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쪽에서 먼저 기회가 되면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말했다. 그러던 중 사스가 돌았다. 사스라는 병 혹은 관념 때문에 베이징이라는 도시 전체가 싹 비었다. 거리는 텅 비었는데, 어느 집이건 전화를 해보면 다 통화 중이다. 갇혀 있으면 더 소통하고 싶은 게 있나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지 말자며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후반작업은 한국에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을 받아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는 1원도 못 벌었다. 그런데도 촬영감독이 또 영화를 같이 하자며 기다리더라. 근데 <망종>이 계속 투자가 되지 않아, 결국 촬영감독이 그걸 못 참고 투자자를 찾아줬다. 어쨌든 그는 유명한 촬영감독이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후반작업을 했고. 스탭들이 없었으면 영화를 못 만들었을 거다.

<당시>는 내 그림자가 반영된 영화

정성일: 돌이켜 생각할 때, 당신의 첫 번째 장편인 <당시>는 스스로에게 어떤 영화였나.

장률: <당시>는 내 그림자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다. 내가 딱 그 주인공처럼 한 10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서 바깥 세상과 소통하기 싫어했다. 우리 옆집에, 영화 속 할아버지와 똑같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혼자 살면서, 옆사람들에게는 전혀 폐를 안 끼치는 사람. 소통하기도 싫어하고, 항상 겸손하고, 자기 집 앞 복도를 만날 청소하는. 영화에서처럼 우리 화장실에서 옆집의 소리가 다 들린다. 밤에 불끄는 소리도 들리고. 그 소리가 내 생활의 한 리듬이 되어버렸다. 어떨 때는 1주일 동안 소리가 안 나면, 입원을 한 건지 궁금하고 불안하고. 그 리듬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내가 집사람에게 말했다. 저 할아버지 참 괴상하다고,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궁금하다고. 그런데 집사람의 대답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 할아버지가 당신이랑 똑같다고. (웃음) 그래서 알게 됐다. 아, 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그러니 그 영화는 거의 내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성일: 당신에게 당나라 시대의 시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

장률: 당시를 원래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이태백. 그의 시는 정말, 사람 냄새가 난다. 어떻게 보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휘황찬란했던 시기가 바로 당시대다. 근데 그 휘황찬란했던 시기의 시가 제일 엄격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모든 중국 사람들이 슬프거나 기쁠 때 술이 취해서 한마디 떠올리는 시가 있다면 대부분 이태백의 시다. 엄격한 형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암송이 가능한 것 같다. 당나라 시는 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 한수 두수는 꼭 외우고 있다. 모순으로 여겨지는 건, 엄격한 틀이 예술의 적이 아니던가. 예술은 자유분방해야 하는데, 이태백은 왜 그 틀 속에 들어갔을까. 어떻게 보면 예술과 예술가들이 자유보다 오히려 어떤 틀 속에 있을 때, 그 자유가 더 힘이 나는 것 같다. 일관성있고, 흐트러지지 않고. <당시>의 주인공은 방과 복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갇혀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복잡하다. 이태백이 그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듯, 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시를 제목으로 선택했고, 중간중간에도 당시를 자막으로 넣었다. 중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은, 중간중간 등장하는 당시가 그 단락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냐고 꼭 물어온다. 그 단락별 이야기에 맞는 시를 찾는 건 아주 쉽지만 고의적으로 그런 관계를 없애려 했다. 중국 사람 누구나 일상적으로 외우는 시를 쓴다는 원칙만 있었다. 옛날로 치자면 중국의 그림에 항상 들어가는 시와 같다. 서예가가 휘갈겨 쓴 그 글을 중국인들도 잘 못 알아본다. 그림을 볼 때 글 역시 그림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나도 그런 뜻으로 당시를 넣었다. 영화가 워낙 답답한데, 중간중간 누구나 다 아는 시가 한번씩 나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유럽 관객이 시와 내용의 연결을 안 물어본다. 시를 그림처럼 받아들이더라. 하지만 내가 당시를 내용과 관계없이 썼다는 것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다. 형식주의자라고. 실제 그건 아닌데, 좀 억울하다. (웃음)

통역 도움 도성희·일러스트레이션 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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