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차이밍량과 <흔들리는 구름> [2]
2006-04-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설의 화법-관계의 익명성, 장소의 파편화

고독과 외로움 혹은 단절과 소멸, 그 사이에 놓인 아슬아슬한 소통의 징후. 그 말들이 상기시키는 ‘불통’의 그림자가 차이밍량 영화의 주제라고 사람들은 흔히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지 차이밍량이 그것들에 열중한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법을 차이밍량이 자기 식으로 터득했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그것은 먼저 인물들이 그저 나란히 ‘홀로’ 살아감으로써 생긴다. 데뷔작부터 현재까지 차이밍량의 인물들은 그 ‘병렬의 전개’ 안에 놓인다. 그러다보니 대사는 있을 자리가 없어지고, 인물들은 배회하고, 감정은 동작과 시선들에서 나온다. <흔들리는 구름>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산다. 그곳이 같은 건물인지 아닌지조차 한동안은 알 길이 없다.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냥 자기의 장면 안에 머무르면서 흘러간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다. 게다가 병렬의 전개를 통해 의미는 자꾸 뒤로 밀리고 지연된다. 뭔가 엮여야 의미가 생길 텐데, 그건 대체로 영화가 시작한 지 시간이 좀 흘러야만 한다. <흔들리는 구름>을 보는 관객은 영화 초반부에 이 남자가 벌이는 이 이상한 섹스가 포르노의 일부인지, 개인의 변태적 사생활인지를 단박에 알아채기 힘들다. 엘리베이터 안의 붐대와 거기에 동참했던 포르노 여배우의 행동을 보기 전까지는.

홀로 있는 인물들의 병렬 전개와 서사 지연을 따라 ‘관계의 익명성’이 들어선다. 심지어 인물들이 서로 만난다고 해서 이 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차이밍량의 인물들은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만나 사건을 벌이고 급속한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차라리 관계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 가깝다. 또는 차이밍량은 그들끼리 알고 있어도 그걸 보는 우리가 그 관계를 모르기를 바란다. 인물들 관계의 그럴싸한 이유들, 차이밍량은 그런 사전 단계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관계의 익명성이야말로 차이밍량의 영화를 보는 것을 현대성의 경험으로 이끄는 끈인지도 모른다.

<구멍>
<하류>

여기에 그가 공간을 조직하는 방식이 더해지면, 인물들은 한 장소에 있어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럴 때 차이밍량은 종종 숏 분할을 통해 공유된 한 장소를 개인들의 따로 떨어진 공간으로 나누어버린다. 장소는 하나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공간적 의미는 여러 개가 되는 셈이고, 한 장소에 모여 있어도 사실은 각자가 다른 곳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컨대 <하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조차 짐작하기 힘들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집에 살긴 하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장소를 파편화한다. <흔들리는 구름>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같은 건물에 사는 것 같지만 그걸 확인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서로 소통할 가능성이 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종류의 거리가 다른 이들로부터 그들을 떨어뜨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가까운 가족에게서, 또는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어떤 친구에게서 실제로 매우 멀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내 영화에서 나는 이 역설을 갖기를 좋아한다. 인물들 사이의 육체적인 거리는 실제로 매우 가깝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멀다. <애정만세>에서 여자와 남자는 하룻밤 자는 사이다. 둘은 매우 친숙한 관계지만, 한편으로 그 관계는 매우 멀다. 그들은 결코 가깝고 친숙한 관계를 만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거리를 극복하거나 진짜 가까움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관객에게 이 역설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애정만세>에 대한 차이밍량의 설명이다. 물리적 근접성이 오히려 감정적으로는 한없이 먼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여기에 역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역설을 다시 역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암울한 분위기, 느닷없는 누수, 막무가내로 구멍 뚫려버린 위층과 아래층 사이의 불편함을 희미한 소통의 장으로 이끄는 <구멍>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

<구멍>의 소통에 대한 포르노그라피적 버전

<흔들리는 구름>은 불통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멍>과 유사한 영화다. 그러나, 단지 <구멍>처럼 뮤지컬이 영화 내내 삽입된다는 형식적 공통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두 영화는 가령 두 가지 특별한 기준에 의해 같은 범주로 묶이는데, 첫 번째는 동성애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가족관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이 두 가지 화제를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구멍>과 <흔들리는 구름>이다. <구멍>에서는 2000년을 일주일 앞둔 타이베이의 어느 지역에 정체 모를 전염병이 돈다(차이밍량이 설정한 그 전염병의 증상은 마치 예지라도 하듯이 2000년대 이후 지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사스와 매우 유사하다). 끊임없이 비는 내리고, 누수 공사로 아랫집과 윗집 사이에는 큰 구멍이 난다. 그것으로 윗집 남자와 아랫집 여자는 의사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사실 서로를 잘 모른다. 어딘가에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뮤지컬이 벌어지는 동안만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흔들리는 구름>과 <구멍>에서 뮤지컬이란, 그 곡에 붙은 가사란, 대사 없는 이 인물들에게 사실상의 대사와 마찬가지다. 그 가사들은 그들의 심리적 표현이다. 차이밍량은 뭔가를 직접적으로 피력하고 싶을 때 과거의 노래들을 가져와 뮤지컬을 만든다.

<구멍>의 마지막 장면에서 뚫린 천장 아래로 남자는 손을 뻗고 여자는 그 손을 잡고 올라간다. 그렇다면, <흔들리는 구름>의 마지막 장면은?(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주의보 발령) 여자는 의식을 잃고 엘리베이터에 쓰러져 있는 포르노 여배우를 발견한다. 쓰러진 그녀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온다. 그러다 문득 자기가 보기 위해 빌려온 포르노영화 안에서 지금 자기 집에 엎어져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도 함께 본다. 이제야 여자는 남자의 직업을 알게 되는 셈이다. 포르노 여배우를 옮겨다준 뒤 여자는 그곳에서 벌거벗고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계획대로 촬영에 들어간다. 의식을 잃은 여배우를 데리고 포르노 촬영은 벌어지고,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벽너머로 뚫려 있는 둥근 창문을 통해 쳐다본다. 벽과 창문, 그 뒤에 서서 포르노의 현장을 보는 여자, 의식 없는 여배우와 섹스하는 남자. 괴이한 일은 이때부터 벌어진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배우 대신 바깥에 선 여자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영화는 결말로 치닫는다. 그리고는 노래가 흐른다(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주의보 해제) .

<흔들리는 구름>
<흔들리는 구름>

<구멍>에서 손을 잡는 건 일종의 비유로서의 섹스였던 셈이다. 적어도 그의 영화에서 섹스가 혼자가 아닌 둘의 진정한 소통이 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흔들리는 구름>이 <구멍>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구멍>이 간접적인 비유적 섹스를 통해 소통에 다가서려 한 것에 반해, <흔들리는 구름>이 직접 그것을 재현해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흔들리는 구름>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구멍>의 그것에 대한 포르노그라피적 버전이다. 말하자면,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벽은 각각으로 나눠져 있는 방, 또는 따로 닫혀져 있는 문처럼 폐쇄적이고 단절적인 의미였다. 거기에 창이 뚫려 있다는 건 징조로 받아들일 만하다. 원래는 나의 외로움을 확인하는, 그래서 소리만 들려오도록 가로막고 선 불통의 그 벽에 구멍이 뚫리면 인물들은 소통에 희망을 건다. 게다가 벽 너머에 있는 상대방의 육체에 나의 목소리를 넣어 엑스타시에 이른다는 것은 그동안 벽에 갇혀, 침대 아래 갇혀 소리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차이밍량의 인물이 황홀경에 도달하는 이상한 역전, 도치된 합일의 순간이다. 이게 정말 희망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흔들리는 구름>은 차이밍량이 말한 역설관계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독이면서 약인, 양면으로서의 가능성

차이밍량은 어떤 영화를 만들든지 ‘파르마콘’(pharmakon)으로서의 영화를 만든다. ‘독이면서 약인 파르마콘’,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바로 그 양면의 상태로서의 가능성. 때문에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벽(<애정만세>)과, 멀리 있어도 가까이 느끼도록 하는 시계(<거기 몇시니?>)와, 현재와 과거를 잇는 영화와 노래(<안녕, 용문객잔>, <구멍>)들이 바로 그런 파르마콘이다. 그것은 <흔들리는 구름>의 가뭄일 수도 있고, 다른 많은 영화에서처럼 멈추지 않는 빗줄기일수도 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항상 놓이는 유동으로서의 ‘물’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혹은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차이밍량은 이 사이를 즐긴다. 하긴, 언제나 가장 흥미로운 상태는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역설의 감정술사이자, 파르마콘의 제조자’인 차이밍량이 <흔들리는 구름>에서 전하는 바가 그것이다.

차이밍량의 여자배우들

이강생의 여인은 천샹치, 이강생의 엄마는 류이칭

천샹치
류이칭

차이밍량의 페르소나가 이강생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강생만큼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이 양귀매, 천샹치, 티엔미아오, 류이칭이다. 양귀매는 <애정만세>와 <구멍>으로 이강생만큼이나 이름을 알린 지 오래다. 하지만 요즘은 그 자리를 천샹치가 대신하고 있다. <하류>에서 잠깐 등장한 것을 계기로 천샹치는 <거긴 지금 몇시니?> <안녕, 용문객잔>, 이번 영화 <흔들리는 구름>까지 이강생의 여인으로 고정출연 중이다. 만약 이강생에게 부모가 필요해진다면, 그건 어김없이 티엔미아오와 류이칭이다. <청소년 나타>에서 <거긴 지금 몇시니?>까지 언제나 영화 속 아버지는 티엔미아오였고, 어머니는 류이칭이었다. 재미있는 건 티엔미아오와 류이칭의 역할이 최근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티엔미아오는 <안녕, 용문객잔>에서 자신이 출연했던 <용문객잔>을 관람하는 관객으로도 출연했다. 유년 시절부터 이 영화를 좋아했던 차이밍량은 영화의 도입부에 자신과 티엔미아오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뒷모습도 잠시 넣었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 <흔들리는 구름>에서 가장 충격적인 변신을 한 것은 류이칭이었는데, 그녀는 양귀매와 함께 포르노 여배우로 나온다. 류이칭의 이 모습은 단편 <천교는 보이지 않는다>에서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던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아니 좀더 거슬러 올라가 <거긴 지금 몇시니?>의 넋나간 어머니부터일 수도 있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간 <하류>에서 포르노 업자에게 매달리는 어머니부터일 수도 있다. <흔들리는 구름>에서 멀리서 잡힌 그녀의 등장을 눈여겨보시기를. 영화를 인생처럼 생각하는 차이밍량인데, 그렇다면 이건 변화의 예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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