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쿨의 시대 - 앤서니 밍겔라의 <리플리>
“자기 생존의 특질에, 불만에, 그리고 자기 오르가슴의 기쁨, 음탕, 염증, 절규, 절망 등의 무한한 변주에 음성을 부여한 것. 재즈는 오르가슴이다.” - 노먼 메일러
부르디외는 음악적 취향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계급적 표지를 드러내는 상징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개 호텔 벨보이인 리플리가 디키의 옷을 빌린 뒤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지중해의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바흐의 <이탈리안 협주곡>을 칠 수 있는 손가락이다. 그리고 디키의 아버지가 흘린 ‘재즈광 디키’라는 단서를 신분상승의 힌트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재치다. 쳇 베이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던 리플리가 <My Funny Valentine>을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장차 따라 부를 수 있게까지 되면서(그는 찰리 파커의 음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면서 혼자만의 재즈 수업을 끝낸다. 재즈 수업은 디키를 만나기 위한 신분상승의 사다리다), 신분 위조의 게임이 가능해진다.
디키의 아버지는 일면식도 없는 리플리의 피아노 솜씨 하나만을 보고서, 이탈리아에 있는 천방지축 아들 디키를 잡아오라고 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리플리의 쳇 베이커를 흉내낸 목소리엔 나르시시즘과 질투와 불안이 엇박자와 당김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나른하고 감각적이며 도회적인 선율은 리플리의 디키에 대한 선망을 음표로 바꿔놓은 것 같다. <리플리>(1999)에 나오는 쿨 재즈는, 베트남전과 쿠바사태라는 폭풍우를 맞기 직전의 1950년대 미국 서해안의 맑디 맑은 하늘을 닮았다. 디키의 아버지는 돈은 있을지 모르지만, 곧 푸른 하늘을 뒤덮을 폭풍우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이른바 쿨이라고 불리는 가볍고 산뜻한 재즈는 밥처럼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대신 초연하면서도 지적인 재즈였다. 찰리 파커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온 마일스 데이비스로부터 쿨 재즈가 비롯되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클래식 작곡가의 영향, 흑인이 아닌 중산층 백인의 감수성이 그 시대 ‘쿨’한 문화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대는 밥의 격정 대신 섬세하고 품위있는 쿨 재즈를 자신의 배경음악으로 택했다. 쿨 재즈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쳇 베이커는 마치 제임스 딘처럼 소비되었다. 쿨 재즈를 소비하고자 하는 수많은 모던한 ‘리플리들’이 그를 환대했다.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녹음한 <Chet Baker Sings>엔 언제라도 부서질 듯한 연약하고 중성적이며 탐닉적인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있다.
<리플리>는 이런 쿨 재즈로 자신을 미학적으로 포장하는 디키의 욕망을 전시하며, 디키의 욕망을 욕망하는 리플리의 곁눈질도 함께 보여준다. 술집에서 리플리가 쳇 베이커를 흉내내며 <My Funny Valentine>을 부르는 장면은, 재즈가 블루스와 아프리카 음악전통과 리듬 앤드 블루스의 혼합을 넘어서서 중산층적 취향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흔히 재즈에 대한 취향을 자랑할 때 그것이 쳇 베이커나 스탄 게츠의 말쑥한 웨스트코스트적 백인 재즈에 국한되는 건 리플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여피나 보보스족)이기 때문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다른 재즈사적인 걸작을 제쳐놓고, 아름다운 소품에 가까운 <Blue Moods> 앨범의 <Nature Boy>를 디키의 목욕장면에 틀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옷을 벗은 디키가 욕조에서 섬세하게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길고 게으른 손가락으로 체스를 움직일 때, 리플리는 한없이 부러운 표정을 짓고 디키의 벗은 몸을 핥듯이 바라보며 ‘욕조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때 나른한 서정과 권태롭기까지 한 슬픔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메마르면서도 서정적인 트럼펫 선율로 흐른다. 디키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엉덩이에 나르시시즘을 느끼면서 동시에 리플리의 선망을 알아차린다. 디키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리플리의 눈동자엔 ‘쿨’을 소유하고자 하는 선망이 넘실댄다. 감각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이런 순간을 쿨 재즈만큼 폼나게 리듬으로 만들 수 있는 음악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