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영화에서 발견한 재즈의 시대 [2] - <버드>
2006-04-08
글 : 이종도
시대를 앞서간 자유정신

1940∼50년대 중기 밥의 시대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버드>

“파커는 최근 10년간 레코드를 만든 거의 모든 재즈 연주자를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할 수 있을 것이다.” - 레니 트리스타노

알토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그의 별명이 ‘버드’다)의 삶을 다룬 <버드>는 지켜보기에 안타깝고 슬프고 그래서 마음에 남는 영화다. 우리는 마치 버드의 아내 챈처럼 그를 낯익은 선율과 리듬 안에 붙잡아두고 싶지만 그는 마약과 술로 망명을 떠난다. 버드의 선율 또한 낯익은 ‘스윙’을 떠나 자유로운 밥의 선율로 월경한다. 그 위태롭고 고독한 운명은 ‘밥’(bop)의 운명을 닮았다. 스윙처럼 쉽지 않고, 까다로우며,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나머지 대중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한 ‘밥’의 운명. <버드>(1988)에서 밥 시대를 선도한 트럼펫 주자이자 지지자이며 친구인 디지 길레스피는 찰리 파커에게 “바는 열었는데 예매는 꽝이야. 아직 관객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한다. 미국 서부의 라디오들이 청소년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밥 연주를 금지시켰다는 소식과 함께. 찰리 역을 맡은 포레스트 휘태커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종이봉투에 담긴 술을 마시며 힘겹게 연주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찰리 파커는 시대를 앞선 자유정신과 방탕으로 고통받았다.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찰리 파커는 더 멀리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마약과 술에 절어 살았지만 찰리 파커는 “테이프로 칭칭 감고 풀로 여기저기 붙인 아주 낡은 (밥 알토) 색소폰” 하나만으로 자신의 위대한 경쟁자들을 감동시킨 천재였다. 그리고 ‘여전히 관객이 도착하지 않는’ 불운한 선지자였다. 그는 모든 종류의 음악으로부터 찰리 파커다운 음을 뽑아낸 블렌딩 마스터였다. 레스터 영으로부터 우아하고 느리면서도 깊이있는 솔로를, 오페라 <카르멘>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로부터 클래식의 느낌을, 블루스로부터 즉흥적인 선율을 이끌어냈다. 재즈의 역사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것이었지만,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재즈의 자유로움과 독창성은 숱한 전통을 자기만의 것으로 뽑아낸 찰리 파커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버드가 이해받지 못한 천재의 음악만 들려주는 건 아니다. 버드에게도 달착지근한 선율은 있다. <Bird and Diz> 앨범에서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는 그들 못지않게 개성적인 델로니우스 몽크의 자유로운 피아노 선율을 타고 <My Melancholy Baby>를 연주한다. 선율을 풍요롭고 유장하게 이끄는 버드의 숨결은 어떤 색소폰 주자도 주지 못한 아름다움을 안긴다. 그가 영화에서 싸구려 바에서 달착지근한 현악 오케스트라와 <Laura>를 연주할 때, 결혼식 밴드를 전전하며 푼돈을 벌 때조차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Relaxin’ With Lee>에서 오페라 <카르멘> 선율을 살짝 인용하고는 시치미 뚝 떼고 예기치 못한 밥 선율 속으로 디지와 함께 뛰어드는 대목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마찬가지 이유라면, <At Storyville> 앨범에서 거침없이 비상하는 버드의 선율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국의 보수적인 공기가 버드의 비상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여전히 버드의 음악은 참신하고 새롭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찰리 파커의 밥 선율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찰리 파커의 복잡한 내면을 탐사한다. 디지 길레스피에게 가불하고도 월급을 달라고 떼를 쓰는가 하면, 약속된 연주를 펑크내기 일쑤였고, 수시로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도 마약과 술과 여자를 끊지 못한 불규칙적인 삶의 리듬과 그의 재즈의 리듬을 조응시킨다. 그리고 평생 마약값을 대느라 쩔쩔맸던 천재의 우울 속에 갇혀 있던 그의 찬란한 선율을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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