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생결단> 시나리오 취재기 [1]
2006-04-19
글 : 최호 (영화감독)

청춘물 <바이 준> <후아유>를 연출한 최호 감독은 초롱초롱한 눈빛과 동글동글한 얼굴로 인해 매우 선한 인상이다. 그가 일명 ‘뽕 누아르’ <사생결단>을 차기작으로 결정했을 때, 아마 주위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을 것이다. <사생결단> 시나리오를 위해 부산으로 달려간 최호 감독의 취재기는 흡사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의 수사일지를 떠올리게 한다. <사생결단>이 이뤄낸 이야기의 핵심을 만들어준 누군가를 만나는 데까지는 오랜 인내가 필요했다. 친척들이 소개해준 술집 주인, 중간 보스, 경찰관이라는 정거장을 지나는 6개월 동안 최 감독은 눈을 부라리기도 하고, 어수룩한 척 머리를 긁적이며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수면 밑에 잠든 대어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운 채 꿈쩍도 않는 강태공의 기다림이었다. 후카사쿠 긴지의 남성드라마에 열광했던 최호 감독이 드디어 낚아올린 마약과 어둠의 세계, <사생결단>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쓰여졌다.

2003년 5월_ “그래, 결심했어! 뽕 누아르를 하는 거야”

<후아유>를 끝내고 청춘이란 화두가 지리멸렬해졌을 때 어영부영 1년이 후딱 가버렸고, 그동안 내면에서 장르에 대한 굶주림이 마구 솟아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즐겨봐왔던 장르영화들… 그런 작업이 하고 싶어졌고, 그래야 상업영화판의 늪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녘에 나이트 화장실에 가모 쓰고 버린 주사기가 바글바글…. ’
‘한창때는 유흥가에 판매자가 널맀고 택시 기사들도 판매… 한 짝대기 3만원!’
‘한번 찔르믄 부모형제도 빠이빠이, 영원한 노예가 되뿌는….’

부산 출신의 친지들이 술자리에 안주 삼아 늘어놓던 부산 마약계에 대한 가십들….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었던 ‘뽕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게 그 즈음이다.
친지들이 풀어놓은 그 징글징글한 에피소드들이 단 50%라도 실제에 근거한다면, 꽤 괜찮은 장르영화… 누아르가 나올 것 같았다.

“누아르는 장르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머리를 맴돌며,
뭔가 지독해 보이는 그 판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냉혹한 현실을 통쾌하게 비추어낼 세계가 나오리라, 는 통밥을 굴리며.

2003년 6∼7월_ “이러다 카드빚만 남는 거 아냐?”

표지에 NOIR라고 써놓은 빈 공책을 들고 부산으로 향했다.
허름한 부산역(지금은 화려한 KTX 역사로 바뀐) 앞 광장에 우뚝 서서
귓가를 자극하는 사투리에 파묻혀 인파를 바라보고 서 있자니 밀려오는 막막함이 참….
눌러라 눌러, 이따위 비전투적 근심은… 이제 막 전장에 나서는 놈이…. 주문을 외우고 택시를 잡아탔다.
일단, 부산 토박이 사돈들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연줄연줄 소개로 현직 중간 보스급 건달, 룸살롱 사장, 도박하우스 사장 등을 만났는데 ‘뽕 세계’의 실체가 가물가물… 잡히질 않는다.

룸살롱 사장: “친구가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1천억원대의 마약 밀수를 했다 걸려 들어갔고 그가 곧 출소할 예정이다. 아니, 내년이던가?” 하우스 사장: “내가 잘 아는 놈 소개해줄게. 잠시만… (전화 통화)… 잠수탔다는데….”
중간 보스: “약쟁이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것들은 인간 말종, 쓰레기다. 내 친구 셋이 약 때문에 죽었는데 난 희귀종이라 불린다. 어려운 시기에도 그걸 안 했으니.”

도움이 될 듯 말 듯한 얘기를 듣다가 술자리가 이어지면, 어쨌든 자리를 청한 게 내쪽이니, 술값 계산하고 허탈감에 빠져 서울행 새마을호에서 영수증 챙겨보면 소득없는 지출이 심각했다.
한번은 <후아유>를 계기로 안면을 튼 시사주간지의 기자가 소개해준 부산의 한 경찰을 만났다.
속칭 ‘러시아 텍사스’라는 외국인 거리가 관할구역인 그에게 러시아 마피아들이 마약을 밀수하는지에 대해 여러 번 캐물었지만 직업 의식이 투철한 스타일이어서 아무리 술을 마셔도 속시원한 얘기를 하질 않았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뜬금없이 외국인 거리에 거주하는 파키스탄인 한명을 소개해주더니 툴툴 자리를 털고 가버린다. 나처럼 이름이 외자였던 파키스탄 친구와 술을 마셔가며 건져낸 얘기는 그 거리에서 몇 백달러면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뽕에 대해선 들은 바도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신문에서 떠들던 러시아 마피아의 국내 진출 어쩌고저쩌고하는 얘기는 검찰의 대언론 플레이로 뻥튀겨진 것이라는 것 정도. 이런 식의 허탕이 두달. 죽도 밥도 안 되고 카드빚만 남는 거 아냐? 하는 비전투적 심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안 돼… 세상은 전쟁터야… 정신차려. 전략 수정이 필요해.

(소근소근)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시기의 몇 가지 인상이 <사생결단> 시나리오의 중요한 키가 됐다. 자신이 희귀종이라는 중간 보스의 얘기는 류승범의 캐릭터에, 파키스탄인과 경찰 술자리에서의 모습은 전형적인 야당과 경찰의 만남, 그 자체였다. 황정민과 류승범이 술집에 앉아 얘기하는 톤이 아마도 여기서 온 게 아닐까. 결국 그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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