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생결단> 시나리오 취재기 [2]
2006-04-19
글 : 최호 (영화감독)

2003년 8∼9월_ “무조건 형사들한테 매달리고 보자”

일단은 무작정 부산에 덤벼드는 것을 포기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부산일보>의 지난 기사 검색 중에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발견했다. 이 사건에는 뭔가… 동물적인 이끌림이 있었다.
일명 남구 백운포 살인사건. 1999년 마약 조직의 내부 암투에 의해 일어난 살인사건이었고, 당시에 기사를 썼던 기자와 어렵게 통화가 이루어졌다. <부산일보> 기획취재부의 강병균, 이현우 기자였다.
그중 나와 연배가 비슷한 이현우 기자가 무척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그는 학생 시절 내가 장산곶매 활동할 때 조감독으로 참여한 <닫힌 교문을 열며>를 본 적이 있었기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운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 기자가 소개해준 살인사건의 담당 형사들을 만났는데, 남부서의 형사들 중 한명이 부산 지방경찰청 마약과에 착출돼 오랫동안 일한 마약 담당 베테랑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제부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끈질기게 먹이를 물고 늘어지기.

이 즈음에서 취재의 유의사항 몇개를 얘기하면,
-넉살 좋게, 안면 두껍게,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이게 가장 힘든 요소였다. 성격상).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말고 말 한마디, 한 단어라도 기억해야 한다(술에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마시는 게 무척 힘들다. 순간 무너지면 다음날 일어나선 자신이 취재당한 걸 느낄 것이다. 돈까지 내고).
-아닌 것 같으면 과감하게 일어나고 뭔가 나올 것 같으면 끈질기게 늘어진다.
-세 보여야 한다(얼굴이 동안인 편인 나는 그걸 극복하려고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마약과의 베테랑 형사를 두달 동안 수차례 만나 얻은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마약계의 최고 상선은 일선 형사 따위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
-부산의 마약과 형사들 중 비리에 연류돼 옷 벗은 사람이 꽤 된다는 점.
-마약 수사는 그만큼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선 사이에 있다는 점(마약 수사는 교도소 담을 타고 다니는 것이라고 표현된다).(그 형사의 사수- 부산 마약 수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역시 구속된 뒤 옷 벗은 인물인데 취재를 기피해서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

슬슬 원하던 것… 이 세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취재는 시동이 걸렸고 수많은 형사들의 디테일이 노트에 기록됐다. 그러나 아쉬운 건 정작 ‘뽕 세계’의 핵심! 제조와 판매 그리고 투약, 중독 등의 디테일은 형사들도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취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여기서 머물면 반쪽짜리 이야기… 결국 써먹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고, 이 능선을 넘어가면 그야말로 오아시스가 펼쳐질 것이었다.

2003년 9월_ “오, 뽕계의 대부님, 나의 대부님”

9월 초경, 무작정 다시 부산에 내려왔다.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사건이 터졌다고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다. 모텔에 진을 치고 3일을 기다렸지만 짬이 나면 주겠다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4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같이 만났던 동료 형사에게 전화를 하니 기다려보라고 한다. 만나줄 때까지 서울 안 가고 버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취재에 미진한 점을 정리해서 내려왔기에 꼭 소득이 있어야겠다는 오기가 들었다. 한편으론 전에 쏜 술값이 얼마인데 하는 본전 생각이 났다.
할 일이 없어 <부산일보>의 이 기자에게 부탁해서 부산 달동네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부산 달동네의 특징은?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정겨운 느낌이 들고 그야말로 지역적 특성이었다.
5일째 되던 날 오전, 드디어 전화가 왔다.
오후 1시에 부산역 광장 옆 아리랑호텔에 가보라는 것이다. 이날은 포기한 채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서울발 새마을호를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형사 왈, 부산 마약계의 산증인이 나와 있을 것이라고 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달 동안 그토록 기피하고 연결해주지 않던 인물을 이제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아리랑호텔에 앉았는데 3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라꼬요? 거기 있다꼬 방금 통화했는데?”
뒤돌아보니 가장 으슥한 자리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50대 남자가 눈인사를 한다. 30분 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만남에 경계를 하고 뭔가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먼저 어수룩하게 허점을 보이는 편이 취재원을 편하게 한다. 영화 두편 해서 말아먹은 이런이런 감독이고 취재 목적은 이런 것이다. 솔직히 설명을 하자 그제야 씩 웃어 이빨을 드러내며 충혈된 눈을 반짝인다. 드디어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다!

2003년 10월∼2004년 9월_ “이 원석을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

<사생결단>의 자막을 유심히 보면 기술고문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해당하는 이름이 바로 그날 내가 아리랑호텔에서 만난 인물이다. 그때의 만남을 인연으로 십여 차례의 긴 인터뷰에 응했고,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까지 했다.
영화에 나오는 제조, 포장, 판매 신들의 모든 디테일한 리얼리티는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 군수사관 출신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수사관 경력 탓인지 조리있고, 논리적이고, 앞뒤 아귀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화법을 구사했다.
(전두환이 들어서면서 사수 목이 날아가 졸지에 옷 벗었고, 그 뒤 마약에 손을 댔다. 그래도 군인에서 갑자기 마약 제조라. 이해가 잘 가지 않았으나 이 의문은 그와 안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풀렸다. 술자리에서 그가 털어놓았다. 자기 아버지가 부산 마약계의 유명한 제조책이었다고.)
경상도의 하이톤을 내내 유지하며 그가 뭔가를 설명하면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신들이 눈앞에 흐르는 것 같다. 특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리고선 구미에 맞게 적당히 부풀려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그의 엔터테인먼트 기질엔 항상 감탄을 했다.

인터뷰들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함의 연속이었고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산 마약시장의 변천사
-부산 마약계의 전설로 남은 거두들에 대한 에피소드
-중간 판매책의 하루 일과
-최고 상선과 검찰간의 공조 관계
-형사와 마약상간의 공조체제=악어와 악어새
-제조 과정의 완벽한 구술 재현
-90년대 들어 신종으로 개발된 제조 기법=이동식 제조 공장
-지독한 중독 증상
-마약과 섹스
등등.

마약의 무서운 실체를 알아가면서 애초 취재의 주안점,
‘누아르는 세계관이며 이 세계의 냉혹하고 지독한 시스템을 잘 묘사하는 것’,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명필름의 양해를 구해 계약돼 있던 다른 작품을 미루고,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드러난 세계… 이 원석을 좋은 모양으로 가공해내야 되는 것이다.
“실제 경험에 토대를 두어야 하지만, 그것이 실제 사건들보다 더 진실해질 때까지 상상력으로 그것을 변형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헤밍웨이의 미학적 원칙을 떠올리며 윤덕원 작가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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