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중년의 카리스마 김수미 [1]
2006-04-20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훌륭한 중년 배우는 많다. 김혜자, 백윤식, 나문희, 김해숙, 고두심 등. 이들의 연기는 안정적이며 믿음을 준다. 하지만 이들이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기억은 거의 없다. <순풍산부인과>의 오지명과 “니들이 게맛을 알어?”의 신구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2005년, 김수미는 한국영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마파도>의 성공과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3>에서의 이사벨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부른 <젠틀맨송>은 화제가 되었고, 관객은 그녀의 욕설을 듣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로만 기억됐던 김수미는 이제 중고생들에게 이사벨과 수미 언니로 불리고 있다. 올해에만 개봉하는 영화가 6편이다. 그녀는 이제 중년 배우이기에 앞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조역이거나, 코미디거나. 지난 몇년간 한국 영화계에서 중년 배우들이 소비되는 방식은 단 두 가지였다. 선남선녀 주인공들의 부모가 되거나, 작심하고 망가져 웃음을 주거나. 일용 엄니 김수미 역시 마찬가지다. <전원일기> 이후 그녀는 TV드라마 속 누군가의 어머니로 출연했고, <오! 해피데이> <위대한 유산> 등의 영화에선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배우 김수미의 위치는 조금 비상하다. 영화 <마파도>와 <맨발의 기봉이>에서 주연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안녕, 프란체스카3>의 <젠틀맨송>과 이사벨로 부각되는 이미지 변신 때문만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육두문자를 날리고 카메오 출연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코미디와 조역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가 있다. 기존 중년 배우들과는 차별되는 미묘한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그녀를 다시 주목하게 하는 이유다.

김수미의 코믹적 소통 방식, 욕설

<안녕, 프란체스카3>
<전원일기>

2003년, 시작은 <오! 해피데이>였다. <전원일기> 종영 이후 활동이 뜸했던 그녀는 윤학열 감독과의 인연으로 <오! 해피데이>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당시 윤 감독은 대본 한장없이 모든 걸 그녀에게 맡겼고, 김수미는 모든 연기를 애드리브로 보여줬다. 반응은 대단했다. 흥행과 비평에서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오! 해피데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김수미의 ‘욕설 연기’로 기억됐다. 욕설 그것은 김수미의 연기를 설명하는 가장 큰 키워드다. 특히 그녀가 충무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최근 3년간의 연기는 가히 ‘욕설 연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위대한 유산>의 비디오 가게 주인,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조폭 두목 홍덕자 여사,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3>의 이사벨, SBS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갤러리 관장까지. 하지만 그녀의 욕설에는 악의가 없다. 전북 군산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욕설이 구수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코믹적 요소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가 쓰는 육두문자는 전라도 사투리거든요. 만약 전라도 출신이 아닌 사람이 하면 상스럽게 느껴지겠죠.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해왔기 때문에 일종의 대화로 들리는 것 같아요.” 욕설은 형식보다도 화자의 의도가 중요하다. 화자가 악의를 갖고 있느냐, 없느냐가 욕설의 기능을 설정한다. 야비한 말이라도 공격성을 띠지 않을 경우 욕설은 또 다른 소통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여기서 김수미의 욕설은 웃음을 의도한다. “옘병∼”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일용아∼”를 외치는 엄니의 목소리와 오버랩되고, 사람들은 그 푸근함에 바로 무장해제된다. “사람들이 일용 엄니를 많이 그리워해요. 그래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해도 그 이미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용 엄니는 그녀가 자유롭게 욕설을 할 수 있는 안전망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그녀가 등장하면 관객은 기대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곧 욕설을 내뱉을 것이고 그들은 웃기 시작한다. 관객은 욕설이 발화되기 이전까지의 긴장감을 즐기고, 이후의 폭소를 누린다.

김수미가 연기하는 엄니, 엄마, 어머니

1980년 김수미는 당시 27살 나이에 60살 노인 일용 엄니 역을 맡았다. 도전을 좋아하는 그녀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래서 일용 엄니 캐릭터에는 그녀의 색깔이 짙게 묻어난다. 걸걸하지만 높은 톤의 목소리, 기역자로 구부러진 허리는 그녀가 만들어낸 설정이다. “당시 연기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쉬어 있었어요. 내가 어리기도 했고, 노인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게 자연스러워야 했죠. 그래서 그런 설정들이 나온 거예요.” 오늘날 일용 엄니의 이미지는 많은 부분 희화화되어 있다. CF나 TV에서 패러디될 때, 일용 엄니는 가볍고, 주책이 심한 노인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는 일용 엄니 캐릭터를 효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전원일기>는 농촌드라마이기도 하지만 가족드라마예요. 또 효를 다루고 있죠. 특히 일용이네 가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들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설정이었어요. 실제로 방영 당시 <전원일기>에서 일용이가 엄니에게 사골을 해주면, 시골 동네에서는 시어머니들이 며느리한데 사골을 해달라고 눈치를 줬대요.” 그녀의 연기에서 가족, 효, 모성은 또 하나의 키워드다.

<맨발의 기봉이>

중년 여배우가 누군가의 어머니 역을 맡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김수미는 이 흔한 배역을 자신만의 색깔로 채우는 재주를 갖고 있다. 연기의 스펙트럼도 엄니에서 엄마 그리고 어머니까지 다양하다. <미스터 주부퀴즈왕>에서 그녀는 전업주부인 아들을 멀리서 응원하는 어머니의 자상함을 보여줬지만,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선 ‘우리 애기’ 재민의 연애까지 주무르는 속물적인 엄마를 연기했다. “<미스터 주부퀴즈왕> <슈퍼스타 감사용>은 안으로 감추는 어머니 역할이죠. 요즘 신세대 엄마들이랑은 달라요. 좋건 싫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삭이는 스타일, 대가족 제도에서 감정을 숨기고 살아온 옛날 어머니들이죠. 신세대 엄마들 같았으면 그냥 드러내서 응원하거나 표 끊어서 같이 야구 구경 갔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두 가지를 다 이해해요. 옛날 엄마는 우리 엄마에게서 느낄 수 있고, 신세대 엄마는 제가 요즘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맨발의 기봉이>, 비주얼만 보면 또다시 일용 엄니가 아닌가 싶다. “처음엔 좀 망설였어요. 일용 엄니랑 비슷할까봐. 물론 기봉이 엄마가 나이가 더 많지만요. 그런데 이번 역할은 일용 엄니와는 성격 자체가 달라요. 일용 엄니의 가벼움을 많이 침잠시켰달까.” 그녀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실제 엄마를 자주 떠올렸다고 한다. “지체부자유자 기봉이도 엄마를 위해서 심청이 못지않게 수양하고 공양하는데, 나는 왜 사지가 멀쩡하면서 엄마에게 쌀밥, 고깃국을 못 챙겨줬을까. 엄마가 일찍 가셔서 참 안타까워요. 효도 못한 거. 그래서 영화 찍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요.” 그녀의 모성 연기는 그것이 극중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든 자신의 경험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그녀의 연기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대표적인 예다. 그녀가 맡은 재민 엄마는 악역이다. 물론 극중에는 완전한 악역도 선한 역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청자들은 주인공 대 악역의 구조로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수용한다. 그러나 재민 엄마는 달랐다. 그녀는 럭셔리한 사모님의 이미지를 갖고도 아들에 집착하는 엄마의 페이소스를 보여줬고, 결코 악역의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