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추모, 신상옥 감독 [1]
2006-04-24
글 : 조영정 (한국 영화사 연구가)

김수용은 1960, 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가 얼마 전 펴낸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는 신상옥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수용이, 네 영화 좀 봤는데 몽타주가 재밌더라.” 첫 대면에 반말하는 신상옥이었지만, 김수용은 그의 무례와 오만을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회고록의 맨머리에 메가폰을 들었던 데뷔 시절의 김수용 대신 왜 신상옥을 만난 김수용(이미 5편이나 만들었던)을 떠올렸을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이장호의 회고는 또 어떠한가. 신필름에 입사했을 당시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거인 신상옥에 대한 묘사는 그의 영화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녹아 있다. 이러할진대 신상옥을 해방 이후 한국영화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과장이고 무리일까. 나의 영화적 아버지는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뿐)이었다”는 술회에서도 엿보이듯, 신상옥은 스스로 한국영화의 아버지여야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 강박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1970년대 한국영화의 암흑기를 불러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나 아버지라 불리길 원했던 그가 80살을 끝으로 지난 4월11일 눈을 감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굴곡 많은 개인적 불행마저 드라마틱하게 변주했던 그의 삶과 영화에 대해 한국 영화사 연구가인 조영정이 진심어린 추모글을 보내왔다. 아직 한국영화의 거목 신상옥을 더듬어보지 못했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의 추모전도 둘러볼 일이다.

2006년 4월11일 밤 11시49분. 한국 영화계의 거장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을 누비며 75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20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대종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각각 4회나 수상했으며, 60년대 중반까지는 출품작으로 지명만 되어도 영광이었던 아시아영화제에서 역시 작품상과 감독상을 4회나 수상했고, 세상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60년대 초반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2년 연속 초청돼 특별상까지 수상했으며,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화려한 수상경력을 뒤로하더라도, 그는 누가 뭐라 해도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말까지 한국 최대영화사를 소유하고 한국 영화계의 맹주로 군림했다. 이렇듯 선천적인 재능은 물론 천부적인 운까지 겸비한 영화인을 적어도 세 사람은 합쳐놓아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눈부신 경력을 남긴 신상옥 감독에게도 여한이 남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만들어야 할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을 당시 만들었던 영화 <탈출기> 촬영현장
200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시상식에 감독상 시상을 위해 참석한 신상옥 감독

신상옥 감독은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한의원을 하던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했던 어머니 사이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도쿄예술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 그는 1945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서 미술을 맡았고, <독립전야>에서 조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그에게 영화적 감성과 지평을 열어준 스승으로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을 꼽았고, 영화기술을 전수해준 직접적인 스승으로 최인규 감독을 꼽았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고, 기술적인 완성도와 미학적인 정교함을 추구하는 신상옥의 영화세계가 이 세 스승의 영향인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신상옥을 완성시킨 것은 신상옥 자신이었다. 스스로 천재가 아님을 주장하는 그는 편집을 공부하기 위해 편집기계를 집으로 가져와 몇달 동안 밤새도록 필름을 잘랐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훈련을 거듭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자기훈련의 과정은 1950년대 그의 영화들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젊은 그들>(1955)에서 나타나는 기술적인 미숙함은 다음 작품인 <무영탑>(1957)에 이르면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에선 동시대 다른 영화들을 월등히 앞서는 완성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신상옥의 영화세계를 완성시킨 것은 당대 최고의 스타 최은희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뮤즈 최은희를 통한 남성적인 영화미학의 구현

한국전쟁을 피해 내려갔던 부산에서 신상옥은 최은희를 처음 만났다. 그가 당시 준비하고 있던 <코리아>에 출연해줄 것을 그녀에게 제안했고, 영화가 완성된 1954년, 영화를 향한 그의 열정에 반한 최은희는 신상옥과 결혼한다. 이후 최은희는 신상옥의 아내이며 동시에 신필름을 함께 꾸려나간 동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상옥에게 최은희는 영화에 대한 영감을 주는 뮤즈이며, 스크린 속의 분신이었다.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영화가 아니다”라는 신상옥의 주장처럼 그의 영화들은, 특히 그의 대표작들은 최은희를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상을 선보이며 한국 멜로드라마의 영역을 확장했다. 여기에 신상옥 감독의 남성적인 영화미학이 맞물리면서 동시대 다른 영화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멜로드라마가 탄생했다. 그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그의 카메라가 움직일 때에는 너무도 힘이 있고 분명해서 그 움직임을 놓치기란 불가능하다)보다는 정교하게 짜여진 장면화와 편집으로 간결하게 구성된 전개방식을 선택하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감정의 과잉보다는 절제를 요구한다. 때문에 그의 영화 속 최은희는 눈물을 흘리되 흐느끼지 않으며, 입장을 설명하되 넋두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최은희는 늘 강해 보인다. <지옥화>(1958)에서 형제를 동시에 사랑하고, 낭만적인 모래사장이 아니라 검고 질척한 진흙탕에서 애인의 손에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녀는 미소를 짓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는 일기장 하나로 자신이 버려진 딸임을 주장하며 부잣집 딸 행세를 능숙히 해내며, <이생명 다하도록>(1960)에서는 가죽 점퍼에 부츠를 신고 묵묵히 불구가 된 남편이 탄 리어카를 끈다. 심지어 소복처럼 하얀 한복을 입고 언덕에서 바람을 맞으며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모습조차도 도도해 보이기만 하다. 그러나 최은희의 강함은 영화 안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탄탄한 영화 속 존재감은 신상옥의 영화가 완숙해지면서 그의 영화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옥화>로 시작된 성공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과 <자매의 화원>(1959)의 잇단 성공으로 이어졌고, 50년대 내내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성공을 늘 앞서던 홍성기·김지미 커플과의 <춘향전> 격돌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성춘향>의 성공, 완성도 높은 사극 영화 제작

한국 영화사에서 최고의 맞대결로 회자되는 <춘향전> 대결은 세간의 관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같은 스승 아래서 영화를 배우고, 50년대 중·후반 최고의 멜로드라마 맞수였으며, 흥행의 수위를 다투었던 신상옥과 홍성기는 당대 최고 배우, 최은희, 김지미를 아내로 두고 그들을 춘향으로 내세워 한국 최초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된 두편의 <춘향전>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 결과는 널리 알려진 대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서울에서만 42만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끌어들인 이 영화의 성공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을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 영화사로 발전시킨 일등공신이 되었다. <성춘향>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5월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회는 또 한 차례 격변을 겪게 된다. <상록수>를 눈물 흘리며 봤다는 박정희의 집권은 한국 최고, 최대의 영화사를 건설하려는 신상옥에게 여러모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업화와 산업화를 기치 삼아 국가경제 재건을 내세웠던 박정희의 정치신념은 좀더 안정적인 제작여건을 확보하기 위해 메이저 영화사 설립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신상옥의 욕망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성춘향>의 성공으로 이미 대규모 스튜디오와 설비를 갖춘 신필름은 1962년 영화사의 등록요건을 강화한 영화법 제정과 함께 이루어진 영화사 통폐합 과정에서도 단독으로 영화사 등록이 가능했던 유일한 영화사였다.

<성춘향>의 성공과 영화사가 등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년에 15편의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는 영화법의 제작쿼터로 인해 신상옥은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하나는 성공으로 얻게 된 재정적인 풍요로 그동안 꿈도 꾸지 못하던 대규모의 완성도 높은 사극을 본격적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된 거였고, 다른 하나는 제작쿼터를 맞추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장르영화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과거야말로 우회적으로 그러나 좀더 예리하게 현재를 조망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신상옥이 사극에 가진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작품연보에서 사극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다다르는 양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소재의 다양함 역시 이후 사극장르의 획을 긋는 작업이었다. <천년호>나 <반혼녀> 그리고 <꿈>같이 찬타지 세계를 탐험하는 영화들이 있는가 하면, 구중궁궐 안에서 내밀하게 벌어지는 여인들의 욕망을 그린 <내시>와 <이조여인 잔혹사>(일부)가 있는가 하면, <연산군>과 <폭군연산> 그리고 <대원군>같이 궁중의 뒤틀린 권력다툼을 중심에 담은 남성적인 사극이 등장했다. 그러나 신상옥의 사극은 한국적인 스펙터클을 선보이는 장이기도 했다. 실제 궁궐에서 실제 궁중 가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웅장하고 우아한 세팅과 금빛과 은빛이 물결치며 총천연색으로 화면을 누비는 화려한 의상은 흑백화면에 익숙한 당시 관객에게 충격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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