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있어줘>는 테레사 첸이라는, 청각장애를 이기고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여인에게 헌정된 영화다. 그녀와 전혀 관계없는 여러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테레사 첸의 이야기로 절묘하게 흘러간다. 감정의 결이 애잔하게, 쓸쓸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는 추락장면에 이르러 극적 순간을 맞는다. 압축 성장을 겪은 동아시아 도시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보여주는 추락의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에릭 쿠의 영화가 진단한 싱가포르는 어떤 증상을 앓고 있는 곳인가.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글을 통해 <내 곁에 있어줘>로 호평받은, 싱가포르의 영화적 페르소나로 인정받은 에릭 쿠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혹시 싱가포르에 가게 되면 DVD숍에 들러보라. 그리고 에릭 쿠 영화가 있는지 물어보라. 자부심에 찬 얼굴로 판매원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있지요. 박스 세트를 원하세요?”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면로>(Mee Pok Man, 1995)와 <12층>(1997)이 담긴 박스 세트와 <내 곁에 있어줘 >(2005)를 찾아줄 것이며, 짐짓 비밀이라도 나누는 듯 이렇게 말을 건넬 것이다. “그런데 에릭 쿠가 굉장히 부잣집 아들이라는 건 아시죠?”
1995년 싱가포르영화제에서 <면로>로 데뷔한 뒤 에릭 쿠는 의심의 여지없이 싱가포르의 영화적 페르소나다. 사실은 이 장편 데뷔작 이전 1994년 단편영화 경선에서 <고통>(Pain)으로 주목받았으나 영화는 곧 상영금지당한다. 이런저런 경로로 에릭 쿠는 싱가포르국제영화제가 키워낸 인재다.
싱가포르: 성공신화의 빛과 그늘
이른바 1980년대 아시아의 4마리용으로 불리며 고도성장을 겪은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성공적 진입을 이루어낸 도시 국가다. 싱가포르에서 ‘성공’은 수리수리 마수리 주술과 같다. 이 도시 국가의 성공담은, 그곳 사람들의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대한 전 국가적 강박을 추동한 것은 불행하게도 권위주의 정권이다. 1959년부터 지금까지 PAP(People’s Action Party)는 단독 집권을 이루어냈으며, 현 총리는 리콴유의 아들이다. 군주제도 아닌데 말이다. 문화연구자인 추아 벵 후아는 싱가포르 일상의 삶에 침윤되어 있는 국가의 감시의 시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런 권위주의적 국가에서 예술은 정치·비판적 기능을 띨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12층>에서 자신이 비즈니스맨이고 BMW를 탄다고 거짓말을 해 중국에서 아내를 맞는 데 성공한, 실제로는 작은 국수가게 주인인 아구는 아내가 싱가포르 정부를 비판하자 자신을 욕하는 것은 좋은데 정부를 흠집내지는 말라고 부탁한다. 사람들에게 싱가포르 정부가 일종의 이상적 에고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추락 혹은 삶의 느닷없음
에릭 쿠 영화의 특이점은 물론 위와 같은 싱가포르의 사회 상황에 정확히 개입할 수 있는 우회적 정치 비판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존재하는 것의 느닷없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퍽 뜻밖의 어떤 예상치 못한 삶의 돌출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돌출이 마지막에는 영화를 그로테스크하게 종결짓게 된다. 즉 존재성이 드러나는 순간이 삶의 마침표가 되는 것이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 그것은 갑작스러운 자살의 순간이 타살의 장이 되는 비극으로 나타나고, <12층>에서는 한 여자의 자살 기도의 장면이 순식간에 한 남자의 실제 자살로 대체된다. <면로>에서 그것은 죽은 자와의 사랑이다. 에릭 쿠는 죽음을 불러오지 않고는 서사의 진행이나 표면에 어떠한 충격이나 흠집도 낼 수 없는 것처럼 돌연한 죽음을 위 세편의 영화에 모두 가져온다. <12층>과 <내 곁에 있어줘>에서 그것은 추락사이다. 아니, <내 곁에 있어줘>에서는 추락의 연쇄적 효과에서 나오는 죽음이다. 이러한 추락은 상당히 충격적인 파열과 피 흘림을 영화의 시각영역에 난자하게 늘어놓는다. 성공신화가 사회의 기조 서사인 곳에서 이러한 추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성공신화의 대립항 혹은 실패항으로서의 이러한 추락은 사철 구분없이 무더운 열대기후의 도시 국가이며 관광 낙원인 싱가포르를 붉은 피로 물들인다.
에릭 쿠는 민속지학자처럼 도시의 문제지역을 찾아간다. 우선 <면로>에는 게이랑 지역이 등장한다. 성매매 지역이자 수많은 작은 음식점들이 늘어선 지역으로 유명한 게이랑에서 주인공은 미폭이라는 피시볼이 들어 있는 국수를 판다. 이 ‘미폭 남자’(영화의 제목이다)는 아버지의 국수가게를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으며 버니라는 성매매 여성을 사랑한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그는 약간 넋이 나간 상태이며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거나 놀린다. 그는 방 하나인 공공주택에 살고 있는데, 싱가포르에선 85%의 사람들이 이런 정부 프로젝트에서 살고 있다. 버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미폭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와 간호한다. 왜 그는 병원으로 가지 않는 걸까? 이런 단순한 의문은 예의 싱가포르 사회에 팽배한 국가의 간접적 감시의 눈길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답을 구할 수 있다. 끝내 버니는 죽고 영화는 시체애호증(necrophilia)라고 알려진 집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