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층> 역시 12층의 공공주택 아파트에 살고 있는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하릴없이 커피숍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남자들로부터, 살이 찐 딸에 대한 언어적 학대를 퍼붓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딸, 중국 출신의 아내와 문제를 겪고 있는 아구라는 남자 그리고 자살 이후에도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청년. 청년의 유령은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등장해 그들에게 눈길을 준다. 그러나 유령론(hauntology)을 도입했다고 보기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죽은 남자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없고, 또 자살을 생각하는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일종의 만화경처럼 영화는 12층 아파트와 그 주변을 보여준다.
에릭 쿠의 위 영화 두편은 애도를 끝내지 못하고 시체애호증과 혼령에 빠져 있는 멜랑콜리아 상태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둘 다 죽음에 닿아 있고 삶의 활기에 개입하지는 못한다. 우울증이라니? 싱가포르 사람들과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신경 증후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수천, 수만 가지 종류의 싸고 맛있는 음식들이 ‘호커’라고 거리 음식점에 널려 있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민 복지를 책임지는 정부 그리고 사철 내리쬐는 햇볕(싱가포르의 어느 택시 운전사는 11월에 한국에 왔다가 얼어죽을 것 같아서 바지를 세개나 껴입었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으하하하!). 그러나 에릭 쿠는 싱가포르를 우울증 국가라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싱가포르의 많은 부분은 근대화나 도시화되어 있지 않았고, 위의 예를 든 에릭 쿠 영화의 사례들은 싱가포르만이 아니라 응축적 근대화를 겪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도시적 현상으로 일반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국가주의 복지를 펼치고 있고, 사실 독재정권에 따르는 부패나 폭력적 탄압의 정도가 극단적이지 않은 좀 희소한 사례다. 때문에 그 문화적 생산물을 국가적 알레고리로 읽으려는 유혹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의 영화는 차이밍량이나 에드워드 양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처럼 압축 성장을 겪은 동아시아 도시에서의 우울과 그로테스크한 몽상으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무기력에서 달콤함으로 <내 곁에 있어줘>
<12층>이나 <면로>와 비교해보면 <내 곁에 있어줘>는 감정이 붙어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테레사 첸이라는 청각장애를 이기고 장애아동의 교사가 된 사람에게 헌정되었는데,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들이 이 테레사 첸으로 절묘하게 흘러가는 과정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영화는 10대 소녀의 동성간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소녀들의 사랑이 씁쓸해질 무렵, 다정한 노년기의 애정으로 향한다. 시장보기부터 칼 질, 요리를 잘하는 노인은 정성스레 병원으로 음식을 나른다. 병상에 누운 아내에게 먹이기 위해서다. 한편 노인의 아들은 테레사 첸의 나들이를 돕는 자원봉사를 한다. 남편의 구구절절한 음식을 병상에서 받아먹던 아내가 세상을 뜨자 남편의 음식은 아들의 손에 들려 테레사 첸에게로 간다. 한편, 영화의 초반 한 소녀와 사랑에 빠졌던 다른 소녀는 절망에 빠져 에릭 쿠의 다른 인물처럼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 시도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하고 빈곤한 노동자를 대신 죽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위에서 잠깐 인용했던 추아 벵 후아는 계급적 의미가 아닌 비상업적 주변적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에릭 쿠가 싱가포르 사회에서 주변인의 위치에 있지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동떨어지고 경멸적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에릭 쿠를 잭 네오와 비교한다. 잭 네오는 <12층>에서 중국에서 온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앞니가 튀어나온 아구 역을 맡기도 했다. TV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영화감독, 배우이기도 해 기타노 다케시의 커리어를 연상시키는 잭 네오는, 인기 코미디언이면서 흥행감독이기도 하다. 잭 네오는 노동계급의 성공담을 다루면서 싱가포르 국내 흥행에서 1위를 점유하기도 하는 등 에릭 쿠와는 상반된 행로를 밟는데, 추아 벵 후아는 잭 네오의 이런 경향을 들어 그가 더 노동계급 친화적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잭 네오의 신랄하고 유쾌한 싱가포르 비판의 예를 다음과 같이 예시한다. <난 멍청하지 않은데>(I not stupid)라는 영화에는 이런 농담이 등장한다. 질문, “어떤 사람이 낚시를 갔는데 고기가 잡히질 않는 거야. 왜 그런지 알아?” 대답, “고기가 도통 입을 열지 않아 미끼를 물지 않는 거지. 싱가포르 사람처럼 말이야.”
그러나 사실은 잭 네오야말로 싱가포르의 성공신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나 저중산층이 꿈을 이루는 서사를 통해 말이다. 또 에릭 쿠가 노동계급에 배타적인 무관심을 갖고 있다거나 그들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면로>나 <12층> 속에서 그들의 삶은 어떤 장면 속에 예기치 못하게 배치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고통의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면로>의 남자주인공의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눌한 동작,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은 뒤에도 <12층>을 배회하는 젊은 남자의 유령, 또 중국에서 온 이민자인 여자의 눈물 등은 오히려 에릭 쿠의 관심이 스펙트럼이 넓고 사회적 예민함을 가졌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면로>와 <12층>의 전반적 무기력에 이어 <내 곁에 있어줘>에서의 다소 달콤한 전환은 에릭 쿠의 영화의 깊이를 아직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