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조스트 감독의 <여정들>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대사는 물론 사운드도 거의 들리지 않고, 숲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화면만이 이어진다. <여정들>과 <긴 그림자>, 두 편의 영화를 들고 전주를 찾은 존 감독은 90년대 후반부터 실험영화 작업을 해왔다. “디지털 작업은 경제적이며 효율적이다. 똑같은 영상을 담아내기 위해 필름으로는 엄청난 돈을 필요로 하지만 디지털은 집에서 30분만 작업하면 된다. 또 디지털은 아무리 많이 카피를 해도 똑같은 질의 영상을 만들 수 있다.”
9.11 테러를 소재로 한 <긴 그림자>는 세 여인의 대화로 시작한다. 상처를 받은 듯한 한 여인은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고, 다른 두 여인은 그녀를 위로한다. 9.11이라는 정치적인 사안이 존 감독의 영화에선 개인적인 문제로 풀린다. “나는 항상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정치와 개인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라는 거대한 담론이 개인의 삶 속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그리고 싶었다.” 영화는 세 여인의 대화 속에서 개인의 비극을 발견하고 이를 ‘정치적인 우울’로 연결시킨다. “9.11 테러는 유럽인들이 대면하기 싫어하는 사실을 대면하게 해준 사건이다. 그들은 바로 자기 옆에 무슬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실험적인 작가라는 사실은 <여정들>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이 영화엔 어떠한 스토리도, 내러티브도 부재하다. “나는 작곡을 하듯이 영상을 만들었다. 대체 이 영화가 몇 분이나 될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영화의 리듬에 모든 걸 맡기고, 그 움직임과 색감만을 바라봤다.” 그에게 편집의 원칙은 없다. 총 400시간이 넘는 분량의 자료를 60분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모두 감정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 일이다. “물론 처음 이 영화를 본다면 2분만에 졸음에 빠질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고 느린 화면만 이어지니까. 하지만 그 느림의 리듬, 영상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정들>과 <긴 그림자>, 그의 영화는 일면 졸린 영화일 수도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실험은 항상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