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 개봉을 앞두고 <국경의 남쪽> 감독 안판석과 배우 차승원이 만났다. 촬영장에서 매일 만나 뒹굴었던 두 사람이지만, 새벽 기술시사를 보고 난 뒤인지라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브라운관에서 맺은 인연을 스크린으로 힘들게 옮겨오기까지의 스토리를 짧은 대담으로 묶었다.
안판석과 차승원은 드라마 <장미와 콩나물>(2000)에서 함께 작업했다. 그때 안판석은 MBC의 간판 드라마 프로듀서였고, 차승원은 가능성에 머물던 모델 출신 3년차 배우였다. 6년 뒤, 두 사람이 다시 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만났다. 이번엔 반대. 브라운관에서 잔뼈 굵은 베테랑 PD 안판석이라고 할지라도 신인감독이었다. 반면, 차승원은 어느새 10편 넘는 출연작을 거느리고 있는 흥행배우가 돼 있었다.
안판석: 드라마를 했던 건 일종의 저축이었다고 봐. 나중에 영화해야지 하는 맘으로 한 거지. 그래도 신인감독인 건 사실이잖아. 네가 경험자이니까 많이 기대면 되겠구나 했지.
차승원: 따지고 보면 별로 못했죠. 영화에 대해 100% 완벽히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것 챙기기도 바쁜데. (웃음) 내 입장에선 감독님하고 이야기나 많이 하자, 뭐 그 정도?
안판석: 그저 대화상대였다는 건가. (웃음)
차승원: (웃음) 솔직히 씨알이 먹혀야지. 계속 얘기하다가 상대방이 안 받아주면 세 마디 이상 못해요. 근데 감독님과는 현장에서 그동안 느꼈던 고충을 자주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죠. 솔직히 영화 많이 찍은 감독에게 이런 얘기하기 껄끄럽거든요. 월권하는 것 같고.
안판석: 신인감독이라서 만만했다는 거네.
차승원: 처음엔 감독님이 옹고집인 줄 알았어요. 근데 의외로 다른 사람 생각도 많이 받아들이더라고요. 그거 아니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워두긴 하지만, 그 안에서 많은 걸 수용하니까. 반대도 있거든요. 다 받아들일 테니 해보라고. 그리고서 결국은 그냥 자기 하던 데로 하는. 그런 분들은 자기 것이 너무 많아서 침범할 수가 없죠. 그런데 저도 인간이니까 마냥 줄 순 없잖아요. 기브 앤드 테이크가 돼야 하는데. 감독님은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서 편했어요.
“차승원에게서는 허(虛)기가 느껴졌어”-안판석
안판석은 <국경의 남쪽> 시나리오를 차승원에게 직접 전달했다. <혈의 누> 촬영현장까지 직접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왜 김선호 역에 차승원을 맨 먼저 떠올렸을까. 흥행배우라서? 어쨌든 차승원은 건네받은 시나리오를 곧바로 읽지 않았다. 묵힐 만큼 묵혀뒀다. 출연하겠다는 의사는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안판석에게 되돌아왔다. 차승원은 왜 김선호 역을 냉큼 거두지 않았을까.
차승원: <혈의 누> 촬영장에 직접 오셨는데 되게 의외였어요. 보통은 프로듀서가 와서 매니저한테 주잖아요. 배우 입장에서도 어디 제작사 찾아가서 이 영화 꼭 하고 싶습니다, 하면 손해보는 느낌이 있거든요. 내 안에도 그런 게 있었고. 근데 내가 아는 감독님은 게다가 그럴 스타일도 아니었거든요.
안판석: 내가 어린애인가. 안 먹힐 사람한테 들이대겠어. 드라마할 때 배우와의 교류라는 게 현장에서 동선이나 연기톤을 나누는 게 고작인데, 그런데도 느낄 수가 있다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마주앉아 오랫동안 술마시며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차승원이라는 배우의 본질에 대한 어떤 판단이 있었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실(實)로 꽉 차 있진 않고 허(虛)가 좀 많이 있다고 봤어. 그러니까 확 들이댄 거야.
차승원: 어떤 허기가 느껴졌어요?
안판석: 무슨 연기를 잘하고 싶다, 그런데 기회가 없다, 뭐 그런 허기는 아니야. 연기라는 게 이 신 찍고 저 신 찍고. 배우라는 삶도 꽉 짜인 패턴 안에서 계속 전진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 사람을 실하다고 하는 거고. 그런데 가끔 차승원이라는 배우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느낌이 있어. 내가 어디 서 있나, 자문하는 것 같고. 그게 바쁜 와중에 쉽지 않은데 말이지.
차승원: 오래 살고 봐야 해. 오래 경험해야 아는 거니까. 저도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상대 캐리커처가 빨리 그려져요. 타고났다기보다 일하면서 익힌 건데. 감독님하고 만나면서 이 사람과 작업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얻을 게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안 따질 수 없죠, 나도 인간인데. 기본적으로 이 시나리오를 잘할 수 있는 분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좀 걸리긴 했지만 읽자마자 바로 하겠다고 전화한 거죠.
“감독을 믿으면 연기도 술술 나오져”-차승원
<장미와 콩나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만남은 드라마 <수줍은 연인>(1999)이 처음이다. 굳이 첫 대면의 상황을 끄집어낸 건 안판석의 배우 차승원에 대한 믿음이 이때부터 싹텄기 때문이다. 차승원은 <수줍은 연인> 때를 세밀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어서 함께 작업한 <장미와 콩나물>에서 특정한 연기 대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주던 안판석의 연출 스타일에 대한 신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안판석: <수줍은 연인>은 선배 프로듀서가 연출하던 작품인데. 갑자기 아파서 대타로 들어갔지. 9회부터선가 맡았을 거야. 그때까지 차승원이 누군지도 몰랐어. 선배가 캐스팅한 배우니까. 사무실 여자들이 TV보고 멋있다기에 한번 봤더니 너였는데, 내 눈에는 너무 느끼하게 생겼더라고. 왜 전혀 관계없는 여자들이지만 어느 남자한테 확 쏠리면 괜히 이상한 반감이 생기잖아. (웃음)
차승원: 화장실 좀. 커피를 다섯잔 정도 마셨더니.
안판석: 중요한 이야기하는데 어딜 가. (웃음) 어쨌든 촬영하러 갔는데 너랑 맞닥뜨려서 찍을 신이 굉장히 어려운 거더라고. 네가 김선아와 같이 잠자리에 들고 육체 접촉을 하는 신이었는데, 전회(前回)를 보면 두 사람 모두 확 들이대는 캐릭터가 아니거든. 그렇다고 다리 거는 것만 보여줄 순 없지. 연출 입장에선 인물들의 짧은 동작 안에 많은 감정들을 담아야 하는데 고민이 되더라고. 생각은 많고, 몸은 부자연스럽고, 스텝이 꼬이고, 그러다 벽에 부딪혀서 전등 스위치를 건드리고, 갑자기 불이 켜지면 대낮에 치부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운 표정을 보여주자. 뭐, 그렇게 계산을 했는데. 내 맘대로 계산이지. 그게 어디 쉽나. 배우가 받아줘야 하는데. 그런데 네가 그걸 너무 잘해낸 거야.
차승원: 하고 싶지 않은 걸 누군가가 시킬 때 그걸 잘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굉장히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 후자예요. 누군가 나랑 안 맞는 것을 자꾸 원하면 잘 못하는 편이고. 그냥 저 사람이 나를 다른 쪽으로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믿음이 있으면 술술 나오고. 대중은 절 보고 딱딱 나온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부류예요.
안판석: 어쩌면 전에 대화를 많이 안 나눴다고 해도 소통이 됐다고 봐. 마음 졸이면서 관찰하다 보면 저 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배우 또한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할까 골몰하는 거니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보면 유홍준씨가 ‘겉으로 스쳐서 보고 지나면 돌덩이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썼잖아. 이 대목에서 울림을 받았는데, 감독과 배우가 작업을 할 때도 이런 단계에 이르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차승원: 감독이 선장이라고 쳐요. 잘못 됐으면 항로 수정을 해야 하는데. 안 하고 그냥 가는 경우도 있어요. 뚝심도 좋지만, 불을 보듯 잘못된 항로인데 그냥 가요. 잘못된 항로라는 걸 자기가 가장 잘 아는데, 자기를 절대적으로 믿고 가는 거죠. 반면 안 감독님은 잘못 됐으면 ‘그런 거야’ 하고 산뜻하게 넘어가니까. 우리 재촬영한 분량도 그랬고. 사실 배우가 촬영 끝나고 ‘감독님, 이게 참…. 제가 보기에 아까 했던 연기가 처음이고 하다 보니까…’ 뭐 이런 이야기 꺼내는 게 쑥스럽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