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생각이 같았지”-안판석
주면 받고, 받으면 주고. 궁합 좋은 인연이라고 부부싸움 한번 안 하는 건 아닐 텐데. “선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고 입을 모으는 두 사람은 어땠을까. <국경의 남쪽>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듯이, 디테일에 신경을 쓰던 안판석과 ‘십장’처럼 배우들을 다독이던 차승원은 촬영 기간 내내 ‘행복한 동거’ 혹은 ‘즐거운 분업’을 만끽했을까?
차승원: 캐릭터가 이런 인물이다, 뭐 그런 이야길 나눈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안판석: 네가 즉흥연기를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잖아. 커피 마시면서도 벌떡 일어서서 이거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는데 내 입장에선 다 그럴듯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캐릭터에 대한 생각이 나랑 같군 했던 거지. 근데 현장에서 슥슥슥 하는데 그게 잘 맞아서 첫 테이크에 오케이했는데 네가 한번 더 가겠다고 하면 그땐 신경질나더라. 맞는 거 했는데 왜 다른 걸 해야 하나 싶어서.
차승원: 화나셨구나. 노파심에…. 아시면서. 감독님도 오케이면 오케이인 거지만. 저에게도 기준이 있어요. 내가 뭘 했는데 모르고 지나간 건 좋은 거고. 뭘 한 것처럼 느껴지면 아닌 거고. 근데 후자인데 오케이나면 좀 그렇죠. 그렇다고 그걸 일일이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왜 말론 브랜도도 <워터프론트> 때 감독이 맘에 들지 않는 테이크를 오케이해서 화났다고 하잖아요.
안판석: 나야 다른 쪽 삑사리만 없으면 가는 거지.
차승원: 감독님이 재떨이 쓰셔서 저 곤란한 적 많았어요.
안판석: 재떨이가 뭔지 모르시겠네. <넘버.3>에서 왜 보스가 무슨 일 터지면 박상면 찾잖아요. 그럼 재떨이 허리춤에 끼고 나타나고. 화낼 때 재떨이 쓴다고 하는데. 내가 화는 내고 승원이가 풀어주고 뭐 그런 일종의 분업 같은 게 있었어요. 촬영 거의 끝났을 때쯤 조이진이랑 승원이랑 같이 민박집에 머무는 장면이 있는데. 조이진이 짜온 연기 플랜이 내 거하고 달랐어. 내 것을 좀 따라줬으면 했는데 새 걸 하려니까 잘 안 됐던 모양이지. 그때 재떨이를 쓸 수밖에 없었어.
차승원: 나만 나쁜 놈 된 거지. 이진이한테 오늘 감정이 안 되면 내일도 있으니까 괜찮아. 뭐 이렇게 말하고 감독님한테 가서 내일 하죠 그랬던 건데. 갑자기 재떨이를 빼드시니까. 이진이 생각에는 내가 감독님한테 가서 ‘아무래도 재떨이를 쓰셔야겠는데요’라고 딴말한 놈이 됐죠.
안판석: 갑자기 배우한테 화를 내보고 싶었어. 신경을 좀 날카롭게 만들면 될까 싶어서.
차승원: 재떨이를 너무 보이게 쓰신 거지. 재떨이 질이 잘 안 되면 곤란한데.
안판석: 나한테도 분기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 촬영 이틀째였나, 중국집에서 사기범을 잡는다고 네가 음식점 카운터에서 잠복하는 장면이 있잖아. 그 장면을 찍는데 NG가 났고. 그래서 다시 찍자고 했더니 네가 NG컷이 더 좋다고 했지. 그래서 그 장면을 봤더니 대사하다가 방귀를 뀌더라. 그래서 사운드 배열이 흐트러졌는데, 그게 더 진짜같아 보이더라니까.
차승원: 쭈그리고 오래 앉아 있으면, 속도 부글부글하고. (웃음) 그런 게 더 아이러니하잖아요. 왜, 상갓집에서 웃음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대사하다가 방귀를 뀌니 상대배우가 기막혀하더라니까. 근데 그렇게 리액션이 오니까 내 액션이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안판석: 이 장면이 있어서 그 다음에 여유를 갖고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짜여진 것만 했었을 수도 있겠지. 현장이 주는 선물은 놓치고.
“차승원, 전초전 노하우가 장난이 아니야”-안판석
두 사람 모두 선수다. 감독 구슬리기에 선수고, 배우 어르기에 선수다. 구렁이와 여우가 만나서 수 싸움을 벌이니 이 어찌 볼 만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촬영이 끝나도 두 사람의 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감독의 여관방을 배우는 매일 밤 마을 장소로 삼았다.
안판석: 촬영 끝나고 여관방에 앉아 있으면 네가 항상 기어들어왔잖아. 아무도 안 찾아오니까 외로워 죽겠는데, 딱 한명이 온다고. 안 봐도 너지. 매일 보니까 딱히 할 이야기도 없는데 어제 찍은 거, 오늘 찍은 거 뭐 그런 이야길 했잖아.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내 입장에선 그런 이야기 중에 맞는 말이 많으니까 가만가만 더듬어본다고. 찍고 나서 맘에 걸리기도 했던 장면을 집어내니까 재촬영을 안 할 수가 없었지.
차승원: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본론 꺼내기 전에 지겹도록 연막을 피우죠. (웃음) 뭔가 하나씩 이야길 하잖아요. 그러다 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할 말 하는 건데. 구렁이가 못 넘어오도록 하는 분도 있고. 감독님은 그걸 또 모르는 척 봐주시니까 좋은 거고. 이 수법을 자주 써먹을 수밖에 없죠.
안판석: 전초전 노하우가 장난이 아니야. 자세도 갖가지지. 하루는 침대에도 걸터앉고 하루는 쭈그려 앉기도 하고, 하루는 땅바닥에 엎드리기도 하고. 그건 다 언제 배운 거야?
차승원: 언제 익혔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저 사람하고 작업은 좀 안 맞는데 하면서도 확 놓지는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맞추려고 노력을 하니까. 딱 그것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지도 못하고.
“감독님 보면 부처님 같다니까”-차승원
속마음을 숨기는 것일까, 아니면 별 욕심이 없는 것일까. 드라마 PD 출신의 충무로 데뷔전의 전례를 볼 때 부담감이 적잖을 텐데 안판석은 “언젠가는 잘 만들 때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코믹한 이미지를 서서히 걷어내고 있는 차승원 또한 “캐릭터와 나의 격차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정도 느낀다”는 말로만 개봉 전 심정을 털어놨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이번 만남이 단계이며, 과정이라는 것에만 고개를 끄덕였다.
안판석: 감독으로서 <국경의 남쪽>에 목숨 걸고 했냐, 그거는 아닌 것 같아. 난 이 영화에 목숨 걸지도 않았고, 걸었다고 해서 더 잘될 것도 없어. 한 만큼 하는 것이고, 한 만큼 되는 거지. 만의 하나 쫄딱 망해서 영화 할 기회가 없다면 아쉽긴 할 거야.
차승원: 가끔 감독님 보면 부처님 같다니까. 촬영장에서도 ‘그냥 놔둬’ 하는 식이었고.
안판석: 내가 했던 드라마 케이블에서 해주는 걸 가끔 보는데. 점점 잘하는 것 같아. <장미와 콩나물>보다는 <아줌마>가 더 낫다고. 나이 먹는 만큼 조금씩 나아지는 것 아닌가 싶고. 그런데 <국경의 남쪽>이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라면 아깝지. 과정 속에 있는 거니까.
차승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많이 변하는 사람인데. 특별히 무슨 영화에서 잘했다기보다 요즘 보면 캐릭터와 나란 사람과의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 같긴 해요. 극중 선호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영화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나오잖아요. 근데 그 말이 선호가 가장 사랑하는 연화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경주에게 하는 말이고. 그게 선호의 아이러니한 입장을 대변해주는 장면인 것 같은데. 내가 선호에게 어느 정도 젖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맘에 들고.
안판석: 쉽지 않은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됐지. 된 건 있다. 연기하기도, 찍기도 어렵다고 봤는데 단번에 갔으니까. 개인적으론 선호랑 연화랑 돌 던지고 맞는 장면이 좋더라. 둘 사이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고.
차승원: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기할 때 몇번 떠올린 게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 무대인사를 갔을 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다 나에게 쏟아지고 마침 세명의 아이들이 꽃다발을 들고 나오는데 당연히 자신이 받을 줄 알았는데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상황. 그때 내 자세와 표정은 어땠을까 하는.
안판석: 관객이 그런 상황을 슬프게 바라볼까. 선호 같은 인물은 북한에서 고통받고 살아왔지만, 그들이 남한에 정착한다는 건 그냥 밥그릇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는 슬픈 거고.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관객에게 몰입을 강요하기가 좀 그랬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고, 그래야만 그들이 짊어진 고통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차승원: 카메라가 내쪽으로 많이 안 들어온다고 느꼈으니까. 관망하고 있구나. 근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탈북자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뭘 해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 입장에선 좀더 극적인 걸 원할 수도 있지만, 이번엔 아니라고 느껴지던데요.
안판석: 코미디로 삼아선 안 되는 소재들이 있는 것 같아. 표현의 자유가 끝없이 있는 건 아니니까.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게 있는데. 탈북도 마찬가지라고 봤으니까. 결말을 해피하게 몰고 가고 싶은 맘도 없었고. 코미디나 판타지를 섞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차승원: 다음에 다시 저랑 하면 지금과는 또 다르겠죠.
안판석: 그때야 뭐. 일단 여관 방문부터 잠그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