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1일 개봉을 앞둔 <구타유발자들>의 시나리오는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최우수작으로 당선됐을 때부터 ‘물건’으로 통했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은 제자를 벤츠에 태워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온 음대 교수는 인적이 드문 강가에서 모종의 작업을 시도하다가 심상찮은 동네 토박이들을 만난다. 자신보다 약한 고등학생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나사가 빠진 듯 낄낄거리는 이들의 광기는, 알량한 상식을 호소하는 교수의 위선을 도화선 삼아 진화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리를 바꾸는, 근원을 찾을 수 없는 폭력의 순환. 한 장소에 모여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극단으로 치닫기까지의 몇 시간을 한달음에 묘사해야 하는 <구타유발자들>의 현장이 그 자체로 악몽에 가까우리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해 12월9일부터 지난 1월16일 사이의 그 어디쯤의 4일 동안 촬영장을 엿봤다. 영화의 내용만큼이나 색다른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그곳은 무대 위와 아래의 경계가 사라진 마당놀이처럼 흥겹고, 또 괴로웠다. 이어지는 글은 한달 뒤 우리가 극장에서 맞닥뜨리게 될 색다른 지옥에 대한 간략한 예상도가 되어줄 것이다.
<구타유발자들>은 어떤 이야기인가
“도시화에서 배제되어 세상을 등지고 동물처럼 변한 이들 같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덜 익은 삼겹살을 씹어먹고, 돌멩이를 들고 위협하는 애들이 항상 웃고 있었다는 거였다. 순수해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 광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돌아오자마자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원신연)
강원도 문막 간현유원지 안에 자리한 촬영장을 찾아가는 길. 계곡의 겨울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다. 동행한 제작진이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 수십여명이 모여 있는 그곳은 일반적인 촬영현장과 여러모로 달랐다. 그 흔한 조명기 하나없고, 예닐곱명에 이르는 연기자들의 행색은 저마다 꾀죄죄하여 스탭과 구분할 수 없는데, 임시번호판도 떼지 못한 고급 승용차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그 옆으로는 축 늘어진 꿩의 시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핏자국이 살기를 더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상찮은 것은 저마다 중얼중얼거리고 비실비실 웃으면서 연습에 여념이 없는 배우들이다. 아무래도 이 현장, 뭔가 수상하다.
모든 것은 그놈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원신연 감독이 35mm 단편 <빵과 우유>의 촬영을 준비하던 어느 날. 인적이 드문 철로를 헌팅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그는, 한 무리의 동네 토박이들과 마주쳤다. 정형화된 관계와 반응에 길들여진 도시인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아닐까. 순박한 얼굴 밑에 짐승 같은 폭력성을 감춘 봉연(이문식),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수시로 목소리를 높이는 오근(오달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봉연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고교 퇴학생 홍배(정경호), 나사가 풀린 표정으로 일관하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원룡(신현탁) 등의 살벌한 캐릭터는 모두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오토바이를 타고 몰려들어 덜 익은 삼겹살을 안주 삼아 대낮부터 소주를 들이켜고, 외지인이 자신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늘어놓는 거짓말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의 행동양식도 마찬가지다. 젊은 여제자를 어떻게 해볼 생각 때문에 낭패를 보게 된 속물 음대 교수 영선(이병준)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을 조롱하기에, 더이상 잃을 게 없어 물불 가리지 않는 이들은 제격이다.
원신연 감독은 해직 노동자의 자살 해프닝을 다룬 <빵과 우유>를 비롯해서 존속살해범의 처절한 인질극을 묘사한 <자장가> 등의 단편에서 사회적 약자를 향한 독특한 시선을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두 번째 장편 <구타유발자들>은 꼬리를 물고 격앙되는 폭력에 집중하지만, 그 극악한 폐쇄회로는 때때로 사회를 향한 풍자로 확장된다. 토박이 무리의 대장 격인 봉연이 계곡물에 발을 씻으면서 애국가를 불러대는 장면은 그 단적인 예다. 그들이 왕따시키는 고등학생 현재(김시후)와 중후한 풍채를 지닌 교수 영선이 개싸움에 열중한 동안 홍배와 원룡은 차 안에서 인정(차예련)을 겁탈하는데, 그 장면에 흐르는 봉연의 애국가는 흡사 장송곡 같다. 폭력의 아비규환을 감싸는 배경음악으로 애국가를 선택한 짓궂은 감독은 “폭력의 수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2분30초 가까이 이어지는 둘의 결투는 보는 사람에게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왜소한 현재와 육중한 영선의 몸이 빚어내는 코믹한 대비는, 궁지에 몰린 인간의 막싸움이 주는 서글픔을 거쳐 돌로 상대의 머리를 찍는 섬뜩함으로 마무리된다. 맞는 영선과 때리는 현재에게 피해자와 가해자의 도식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큰 폭력으로 비폭력을 이야기하는 역설법”을 취하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가 어렴풋하나마 이해가 될 듯도 싶다.
한정된 시공간, 어떻게 담을 것인가
“비가 오건 눈이 오건 그냥 찍는다. 매일 아침 포크레인으로 얼어붙은 강을 깨고, 온 스탭과 배우들이 달라붙어서 산 위의 눈을 치워가며 촬영을 강행한다. 날이 워낙 추워서 바로바로 얼음이 생기는데, 그러면 프레임 안에 얼음이나 눈이 보이지 않도록 부감으로 찍기도 한다.”(원신연)
촬영장을 찾은 첫날. 정오가 조금 지나자 어디선가 햄버거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나타나 일용할 양식을 나눠준다. 전날까지 따끈한 가락국수 국물을 제공했던 스낵카가 폭설로 촬영장까지 들어오지 못한 탓이다. 스탭과 배우들은 차갑게 식은 햄버거와 얼어붙기 일보 직전의 콜라를 숯불에 데우느라 여념이 없다. 시간적 배경이 제한된 탓에 한겨울 해가 허락하는 동안만 촬영이 가능해 점심도 거르고 촬영에 열중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제작진은 매일 두 시간을 점심시간으로 할애하고 있다. 이 기이한 한가로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2월1일 오후 1시부터 5시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영화의 특성상 햇빛이 너무 쨍해도 일관된 톤을 맞출 수 없어 계곡을 둘러싼 두 산봉우리 사이로 해가 지나가는 두 시간은 꼼짝없이 촬영을 쉬어야 한다. 그러나 지독한 혹한과 잦은 폭설이 반복됐던 지난 겨울의 한복판에서, 원치 않은 휴식은 오히려 고행이었다. 유난했던 날씨로 인한 방해는 이 밖에도 다양하다. “촬영 반, 얼음처리 반”이라는 한 스탭의 알쏭달쏭한 설명은 제작진이 겪었던 고군분투를 잘 보여준다. 그래도 눈속임이 불가능해서 무조건 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눈보다는 얼어붙은 강이 낫다. 표면의 하얀 얼음가루들만 걷어내면 멀리서는 제법 고요한 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결할 수 있는 눈이나 얼음보다 답답한 것은 언제 물러날지 모르는 산안개 혹은 물안개다.
눈과 얼음 등 궂은 날씨가 남긴 흔적이 스탭들의 원흉이라면, 살을 에는 추위는 배우들의 천적이다. 영선의 음흉한 손길로부터 도망치던 인정은 스타킹을 벗고, 봉연은 모래에 처박힌 영선의 고급 승용차를 빼내려 차를 밀기 위해 윗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최저기온을 수시로 경신하는 추위 속에서 이러한 설정들은 그야말로 ‘닭살 돋는’ 치명타로 작용한다. 초겨울에 어울리는 의상도 모자라 맨몸을 내놓은 배우들에게, 매 테이크 시작 전 “(현재 영화 속 기온) 영상 10도!”라는 감독의 최면은 야속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게다가 원신연 감독이 실제로 토박이들을 맞닥뜨렸던 장소와 가장 유사하다는 이유로 전격 발탁된 촬영장소 옆으로는 기찻길이 보이고, 근처에는 공항과 사격장이 있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바람 속에서 이어지는 기나긴 테이크들은 각종 소음들로 NG가 나기 일쑤다. 웃통을 벗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문식에게 마지막 한 테이크만 더 해보자고 제안하고 돌아서는 감독이 “아, 이거, 배우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라며 중얼거린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인간들의 동물적인 몸부림을 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이런 장소를 영화의 80%가 진행되는 곳으로 선택한 감독의 의지가 문득 살벌하게 느껴진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한달여 동안 목격한 신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러닝타임이 무려 40분에 달할 예정인 51신은 시나리오상으로도 거대하다. 삼겹살 파티를 벌이기 위해 물가에 모여든 봉연 일당이 영선과 인정을 합류시키면서 시작하여, 봉연이 영선과 인정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늘 당하기만 하던 현재가 살벌한 광기를 폭발시킨다. 폭력의 굿판이 절정에 다다르는 곳으로, 영화에서는 순식간에 가속도를 붙여 휘몰아칠 장면이지만 현실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갖은 악재 탓에 지난 2주 동안 찍은 분량이 15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슬레이트를 치는 연출부가 “(신)51에 (컷)266에 (테이크)1!”이라고 외치며, 기나긴 신의 촬영이 중반부까지 진행됐음을 알린다. 그러나 51신이 끝난다 해도, 변함없는 배경과 인물로 이어지는 이 현장의 단조로움은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원신연 감독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영화 속에 보여지는 모든 공간을 한눈에 굽어보는 롱숏을 집어넣은 것은 그 시각적 밋밋함을 고려한 포석이었을 것이다.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비주얼을 시원한 영상으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모든 폭력의 정점, 최종 포식자인 매의 시점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