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구타유발자들> 미리 보기 [2]
2006-05-10
글 : 오정연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세대의 카메라, 욕망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영화 전체가 감정이 끊이지 않는 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보는 이에게는 바로 그 끔찍한 상황의 한복판에 있는 느낌을 주고 싶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관객의 심리적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질 수 있는데, 카메라가 순간적으로 8명의 등장인물 모두의 시점을 대변할 수 있다면 이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원신연)

“드디어 카메라 세대가 도는군.” 불을 쬐던 배우들을 모래에 파묻힌 자동차 주위로 불러내면서 원신연 감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홍배와 원룡은 봉연의 명령에 따라 인정을 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넣고, 영선과 현재는 이긴 쪽은 앞으로 괴롭히지 않겠다는 봉연의 약속을 담보로 싸움에 열중하며, 영선을 때려눕힌 현재가 차 주변을 기웃거리던 오근의 머리를 가격하기까지를 두 테이크에 담을 계획이다. 악에 받쳐 싸움에 임한 현재가 영선을 제압하고, 오근의 머리를 내리치기 직전까지가 첫 번째 테이크다. 지미집(무인 크레인)에 매달린 C카메라가 차 위에서 전체 상황을 부감으로 비추고, B카메라가 영선과 현재의 싸움을 집중적으로 따라잡는 동안 A카메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들 모두를 프레임에 담는다. 리허설을 겸한 카메라 테스트가 시작되자, 일곱명의 인물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바삐 움직인다. 분주한 것은 배우들만이 아니다. A카메라를 제외한 두대의 카메라가 이들을 따라가는 동안, 김동은 촬영감독은 모니터를 확인하며 각각의 카메라 앵글과 사이즈, 무빙, 타이밍을 수정한다. 녹음팀, 특수분장팀, 의상팀, 연출부 역시 모니터상에서 각자의 영역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고, 그 와중에 감독은 격렬한 액션신에 임하는 배우들이 리허설에 너무 많은 기운을 쏟을까 염려한다. “너무 힘 빼지마.” 몇번의 리허설 끝에 배우와 스탭들이 한 호흡을 완성하면, 그제야 세대의 카메라 앞에 세개의 슬레이트가 자리하고, 첫 번째 테이크가 시작된다. 세대의 카메라에 담긴 이 테이크는 편집을 통해 수십컷으로 나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촬영이 진행된다면 완성된 <구타유발자들>은 대략 3천여컷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감독은 예상한다(일반 상업영화는 1500컷 정도). 카메라 한대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게다가 한대의 카메라로 위치를 바꾸어 몇번의 테이크를 찍고 이를 짧은 컷으로 쪼개어 서로 연결할 경우, 그 안에서 인물의 연기와 시선처리를 정교하게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상업영화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구타유발자들>의 현장에 최소 두대의 카메라가 쉼없이 돌아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카메라가 늘어나면 현장 모니터도 늘어난다. 일반적인 현장에서 감독들은 카메라가 두대 이상 동원된다 하더라도 메인 모니터에 집중하게 마련이지만, <구타유발자들>에 임하는 원신연 감독은 다르다. 그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두세대의 모니터를 번갈아가며 체크한다. 그가 한 모니터에서 또 다른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는 타이밍은 커팅 포인트와도 일치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포인트는 사전에 완성된 스토리보드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매 순간순간 어떤 앵글에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고 싶다는 관객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다.

정교한 사전작업과 현장의 즉흥성을 결합한 이러한 시스템은 촬영감독은 물론이고, B카메라 기사와 현장편집 기사 등 개별 스탭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김동은 촬영감독과 B카메라 기사 김병정씨는 이 현장에서 별개의 촬영팀을 거느린 촬영감독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카메라를 잡은 두 사람은 트라이포드 위에 카메라를 얹어놓더라도 고정을 시키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을 대변해야 하는 이들의 카메라는 자신이 찍고 있는 대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움직임은 핸드헬드에 가깝다. 한 인물에 집중하다가 때때로 갑작스러운 줌인과 팬이 이어진다. 이는 바라보는 자의 순간적인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는 연출자와 촬영자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덕분에 고생하는 대표적인 스탭이 동시녹음 기사다. 곳곳에 자리한 카메라 프레임에 걸리지 않도록 붐 마이크를 대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다 애초에 정해진 프레임에 맞추어 위치를 잡았던 붐 마이크는 갑작스레 프레임이 넓어지면 몸을 감출 여유가 없어 버벅댈 수밖에 없다.

<구타유발자들> 현장은 매일 오후 4시가 넘어서면 새로운 멤버를 영입한다. 매 순간 어둠을 더하는 야박한 한겨울 태양을 보완하는 조명기가 그들이다. 대낮에도 각종 조명기구를 동원하여 빛을 통제하는 것이 요즘 한국영화의 익숙한 광경이지만 이곳에서 조명기는 최후까지 등장이 미뤄진다. 촬영 전 20회 안에 2000컷을 찍겠다고 구상한 감독과 촬영감독은 하루 평균 100컷을 소화해야 하는 계산 결과에 경악했다. 제아무리 두세대의 카메라를 동원해도 일상적인 조명방식으로 그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이미 <빵과 우유>에서 다양한 필름과 현상 테스트를 통해 일체의 조명없이 화면 톤을 제어한 경험이 있다. <구타유발자들>에서 이들이 원하는 것은 흑백도 컬러도 아닌 미묘한 색감이다. 홍배의 머리를 파격적으로 물들인 것도 그 안에서 빨간 머리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원신연 감독은 사전 테스트 결과, 블리치 바이 패스로 화면의 컨트라스트를 조절하고 100% 디지털 색보정을 거친다면 원하는 화면 질감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8명 모두가 주인공, 연기 연출의 주안점은?

“한꺼번에 일곱명씩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자기를 비추지 않으면 배우들은 섭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별다른 목적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카메라를 비출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영화는 등장인물 여덟명 모두가 주인공이고, 누구나 자신이 메인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원신연)

원신연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 배우들과 실제 촬영장소에서 1주일에 걸쳐 리허설을 하면서 콘티를 구체화했다. “연극배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연습을 10회 이상했을 때 주어진 상황 안에서 놀기 시작하는 그 단계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길 바랐다”는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이 행하는 연기 리허설을 매우 중시한다. 스탭들은 이들의 리허설을 통해 어떤 식으로 촬영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감독이 해당 상황의 의미와 움직임, 동선을 배우 개개인에게 설명하는 동안 두명의 촬영감독은 주변을 맴돌면서 그 움직임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볼 것인지를 최종 결정한다.

예닐곱명의 인물들이 저마다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고, 제각기 반응해야 하는 <구타유발자들>의 클라이맥스는 영화 전체의 완성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웬만한 연극의 앙상블 이상을 필요로 하는 장면, 원신연 감독은 현장에 존재하는 두대의 카메라를 연기연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체 상황을 모두 보여주는 카메라에 잡힌 화면은 배우의 위치와 동선, 배우들 사이의 거리를 모니터하기에 좋다. “그러니까 두분이 이렇게 붙어 있지 말고, 여기 이 공간에 있는 게 좋죠.” 이어서 각 장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잡은 카메라로는 시선과 감정, 손동작 등 디테일을 확인한다.

“인정은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변화한다”(차예련),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내가 마치 현재가 된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꼭 잘해내고 싶었다. 강한 역할이잖나.”(김시후) 저마다 강렬한 변화의 지점을 지닌 영화 속 캐릭터에 매료된 배우들은 두대의 카메라를 대동한 <구타유발자들>의 독특한 현장진행을 신기해하면서도 만족한다. 일단 두 카메라 중 하나는 철저하게 인물을 쫓기 때문에 움직임을 정교하게 암기할 필요가 없다. 계산하지 않는 연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은 정경호는 “한쪽 카메라에 신경 쓰느라 내가 미처 예상하지 않았던 자연스런 연기를 저쪽 카메라가 잡아준다”는 말도 덧붙인다.

삼겹살을 굽기 위해 봉연 일당이 불판 주위로 모여들고, 멀리서 멈칫거리는 인정을 오근이 불가로 끌어오는 장면. 메인 카메라가 오근과 인정을 따라가고, 나머지 배우들은 자신에게서 카메라가 고개를 돌렸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문식, 정경호, 신현탁 등의 배우들은 비닐에서 야채를 꺼내고 고기를 뒤집느라 여념이 없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카메라 앞은 완결된 연극 무대와도 같다. 이는 단순히 배우들이 매번 모니터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 현장의 숨가쁜 상황 때문에 벌어진 결과는 아니다. 원신연 감독은 사전에 여덟명의 배우에게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무겁고 진지하게 상황에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구타유발자들>의 현장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외부인이 훼방꾼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나 추위와 태양과 얼음과 눈과 소음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은 이들이 빚어낸 화음은 지켜보는 이에게까지 전달된다. 고도의 눈치작전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 겨울의 현장은 분명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열정과 집념의 결과물을 확인할 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구타유발자>의 수상한 인물들

*동네 토박이들

봉연(이문식)/ 수상쩍은 무리의 우두머리. 사람을 안심시키는 첫인상은 믿지마라. 더럽고 악랄한 성격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

오근(오달수)/ 군대에서 심한 구타를 당해 가는 귀가 멀었다. 삼겹살의 최고는 때려잡은 돼지의 고기라고 믿는다.

홍배(정경호)/ 돌만 보면 집어든다. 봉연의 말이라면 그 돌로 친구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원룡(신현탁)/ 늘 비실거리는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살지만, 그 행동은 살벌하지 그지없다. 홍배와 ‘덤 앤 더머’ 콤비플레이를 펼친다.

*토박이들에 왕따당하는 고등학생

-현재(김시후)/ 슬픈 눈과 왜소한 외모가 그의 고난을 더욱 참혹하게 만든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 그의 마지막 한방은 기대를 능가할 것이다.

*서울에서 온 교수와 그의 제자

-영선(이병준)/ 한 주먹할 것 같은 외모와 굵직한 목소리의 소유자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굴함이 오히려 귀여운 음대 교수.

-인정(차예련)/ 음흉한 교수를 피하려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의 난장판에 초대된 비운의 주인공. 그러나 마지막에 웃는 자는 결국 그녀다.

*수상한 동네 토박이의 원조

-문재(한석규)/ <구타유발자들>의 마지막 주인공. 봉연이 그처럼 극악한 성질을 지니게 되는 데 크게 일조한 바 있다. 영화의 마지막,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책임지지만 등장횟수는 적은 편이다. 한석규의 촬영현장은 목격하지 못했지만, 원신연 감독에 따르면 “<넘버3>와 <그 때 그 사람들>의 중간쯤 되는 그의 명연기를 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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