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장르로 변주하다
이만희 감독은 1961년부터 14년간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주마등>이 처음이었고 <삼포가는 길>이 마지막이었다. 대단히 다작인 셈이고, 1967년엔 한해에 무려 11편을 찍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일곱 개의 스펙트럼으로 나뉜다. 유실된 영화가 많아 이것은 엄정한 범주화라기보다는 스펙트럼이라는 용어의 의미 그대로 잔상이나 영역 정도의 의미다.
먼저, <휴일> <물레방아> <귀로>처럼 어떤 미적 완성도를 향해 가고 있는 것. 이 영화들은 이른바 당시의 ‘문예영화’들을 고쳐 쓴 것으로 그 범주에 치유 불가능한 삶의 비극을 깊숙이 주입한다. 이 텍스트들이 구성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에 놓인 대상과 소품, 조형물들은 인물들과 불화한다. 위안이나 휴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일반 문예영화의 스토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풍경의 사용과는 달리 이 영화들 속의 빛나는 장면은 시네필적 현현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시각적, 감정적 동요와 흥분을 일으킨다. <휴일>, 흙바람 날리는 봄의 공원에 선 연인의 무기력, 그리고 그 프레임을 침범하는 꽃가지가 그러하다. <물레방아>,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어두운 강물에 흰옷을 띄우는 신영균의 표정이 그렇다. <귀로>, 문정숙이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와 불안하나 기대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도시 공간을 바라볼 때, 이 영화는 근대성의 체험을 양가적으로 기술하는 탁월한 텍스트가 된다. <만추> 역시 이 분류에 드는 유장한 작품이 될 것이나 영화가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물레방아>로, 나도향 원작이고 20세기 초반을 다루고 있으나 전근대적 믿음을 동정하면서도 그것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도시가 아닌 무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풍경과 마음의 심상을 모더니스트적으로 그렸던 김승옥의 태도와 유사하다.
다른 한편으로 호방하고 활달하나 동시에 시대적 암울이 추동했던 활극 장르영화들이 있다. 이중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상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한 활극이다. 역시 필름이 남아 있지 않으나 <흑룡강>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엔터테인먼트영화다. <창공에 산다> <방콕의 하리마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 냉전 이데올로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텍스트의 상처로 걸고 있다기보다는 플롯의 핍진성이나 추동력으로 삼은 정도다.
네 번째로 당시 냉전, 분단 이데올로기와 어떤 방식으로든 깊이 개입된 경우다. 당시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던 <7인의 여포로>, 무늬만 프로파간다 영화인 <싸리골의 신화> 등이 그 예일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영일 선생이 이만희의 리얼리즘 영화라고 불렀던 것으로, <흑맥> <시장>등이 그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위에서 내가 달리 분류했던 <물레방아> <만추>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나 좀더 상세한 구분을 위해 일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은 피해가기로 한다.
여섯 번째로는 위 스펙트럼을 공유하고 있으나, 범주 속으로 잘 떨어지지 않는 영화들 군이다. 좀 난데없는 영화들 말이다. 데뷔작 <주마등> <한석봉>의 경우다.
마지막이 스릴러영화들이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마의 계단> 그리고 <여섯개의 그림자> <삼각의 함정> 등이다. 특히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당시 스토리없이 ‘무드’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평을 받았다.
사실 이렇게 스펙트럼을 나누었으나, 나는 이만희 감독을 보는 기존의 범주들을 좀 교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재 이만희라는 표현은 그 사람에 대해 범재인 누구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 되니 일단 기각하자. 리얼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이분법은 위의 스펙트럼을 통해 본 것처럼 그의 작품들을 상당수 버리고서야 가능하다. 이만희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려고 하는 경우 그나마 적합한 범주는 ‘무드’다. ‘무드’는 관찰 가능한 심리적 상태다. 그리고 감정의 조합이다. 일반적 기능으로 보자면 무드는 적응 가능한 외부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울증과 같은 무질서한 무드는 비적응 현상으로 기술된다. 군사독재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는 60년대와 70년대 이만희 영화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봐야 할 경우 그것은 이러한 양극단을 오가는 무드, 조울증 현상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는 이 용어를 의료적 병리 현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멜랑콜리와 무기력이 있는가 하면, 시네필적 현현에 다름 아닌 흥분, 신대륙 발견(장르)과 횡단의 활력, 심리적 도착성과 유토피안적 아나키즘의 공존이 있는 이만희의 14년에 걸친 50여편의 영화는 그야말로 ‘무디’(moody)하다. 세태에 잘 적응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무질서 그 자체인 영화가 있다. 난세에 따르는 시대적 우울과 그에 반하는 저항의 활력의 변주. 그러니 물어보자. 누가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모드로 바꿔낸 그의 영화를 거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