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 감독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천재감독’, ‘다양한 장르 안에 깊이있는 주제와 철학을 담은 감독’, ‘검열과 삭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에 5∼6편의 완성도있는 영화를 찍은 감독’,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모드로 바꿔낸 감독’ 등등. 하지만 그러한 평가에 비해 이만희의 영화는 거의 보여진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열리는 이만희 ‘전작전’은 한국 영화사의 거장을 새삼 발견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삼포가는 길>로부터 지난해 기적적으로 발굴된 <휴일>에 이르기까지 작품 22편이 상영된다. 프린트 소재를 파악할 길이 없는 <만추> 등을 제외하면 상영할 수 있는 이만희 감독의 모든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미에서 이번 ‘전작전’은 더욱 뜻깊다. 이만희 감독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영화평론가 김소영, 허문영씨의 이만희 감독에 대한 단상을 전한다.
오는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천재 이만희”라는 제명 아래 그의 전작전을 개최한다. “천재”란 무엇인가 지식인에게 물어보았다. 천재란 “보통 사람의 능력 이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며 중요 특징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만희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소재를 다룬 감독이라는 점에서 “창조성”을 과시하고,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생산성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천재성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천재성은 깊이있는 주제와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보통의 언어로 풀어내며 대중적인 외형 속에 존재했다. 그가 한국 영화사 속의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장르영화를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만희의 작가성을 그의 전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몇몇 제한된 작품에 국한하여 발견했던 이유이며, 그에 대한 변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그의 전작을 본다는 것은 몇몇에게 주어진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작전은 영상자료원의 소개에서처럼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_ 페르소나 문정숙을 만나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 10월6일 서울의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6년 안종화 감독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안종화 감독에 이어 박구, 김명제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은 그는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김승호의 추천으로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불효자>를 연이어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정교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보여주는 젊은 감독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이런 연출력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 작품은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를 가져와 당시 제작사들이 그리 반겨하지 않았던 밤장면으로 점철된 범죄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 작품이 이만희에게 제공한 기회는 우연히도 25편이라는 똑같은 편수를 함께 작업한 배우 문정숙과 촬영감독인 서정민과의 만남이었다.
감독 이만희와 배우 문정숙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만희가 사랑한 것은 여자로서의 문정숙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문정숙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만희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만희는 문정숙을 통해 세상을 보았고, 문정숙은 그가 만들어낸 세상의 히로인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변화하는 사회규범과 새롭게 정립된 가치질서의 혼란스러운 물결에 적응하며 순응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저항하는 인물로 문정숙을 선택한 것이다. 둘이 만났을 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문정숙은 젊은 배우에게서 찾기 힘든 완숙함과 도도함, 고상함과 우아함 그리고 세파를 초월한 듯한 우울함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1962년에서 1967년까지 총 25편의 영화에서 서정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열린 공간보다는 닫힌 공간, 여백보다는 채워짐의 미학을 추구했던 이만희의 영화적인 비전은 서정민이 가진 정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만희는 그 어느 시기보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서로 다른 영화적 형식을 실험하였고, 서정민은 그 서로 다른 다양함을 하나로 관통하는 이미지의 힘을 실어주었다.
<7인의 여포로> _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하지만 이만희로 하여금 이렇듯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제작비를 들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우여곡절 끝에 공개되고,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만희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감독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출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기쁨도 잠시, 1964년 12월,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필름이 압수되고 이만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각계에서는 이만희 감독을 옹호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정부에 진정서가 제출되었지만 정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오랜 법정 시비 끝에 1965년 9월 영화는 혹독한 검열을 당한 뒤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개봉되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게다가 영화 개봉 뒤, 감독을 구속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이만희 감독은 결국 수감되었다. 약 3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만희 감독은 그러나 잠시 쉬고 나왔다는 듯 영화계로 복귀하였다. “반공영화”를 만들고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희는 고집스럽게 다시 전쟁영화와 이른바 “반공영화”로 되돌아온다. 1966년 <군번없는 용사>와 1967년 <싸리골의 신화>는 이러한 이만희의 고집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추> _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
웬만한 사람이라면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시련을 겪고 난 1966년, 이만희는 생애 최고의 해를 창초해낸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모두 시도해보는 해”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했고, 그는 보란 듯이 다양한 장르를 누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잊을 수 없는 여인>과 나도향의 원작을 영화화한 문예영화 <물레방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쟁영화 <군번없는 용사>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만추>가 모두 이해에 탄생했다. 그의 기세는 1967년까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양하면서도 완성도를 잃지 않는 탁월한 연출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자그마치 11편의 영화를 쏟아놓았다. <만추>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대표작 <귀로>와 <방콕의 하리마오>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섞어놓으며 이만희 전성시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만추>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적인 영화언어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수확”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동시에 “서구의 모더니즘 영화언어의 답습”이라는 유보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평가와 상관없이 <만추>는 분명히 이만희의 영화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고 있다. <만추> 이전의 작품들이 좀더 대중적인 기호에 따르고 있다면 이후의 작품들은 같은 장르영화라 할지라도 좀더 실험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이만희에게 고통스러운 시기를 예고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변덕스럽고 억압적인 영화정책과 제작구조의 기형화, 텔레비전의 등장 등으로 영화산업 전체가 쇠퇴기로 접어들기도 하였지만 대중과의 교감 지점을 잃어버린 이만희의 영화들은 상업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 실패는 결국 이만희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하였고, 영화 만들기가 삶의 전부였던 이만희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휴일> _ 우울과 절망의 시기
이 시기 이만희의 영화들은 우울함과 절망의 깊이를 더해간다. <휴일>은 이 절망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휴일마다 만나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다. 지연은 애인인 허욱에게 임신사실을 알리고 자신들의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설득한다.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지연의 건강상태로 인해 중절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휴일>은 태어날 수 없었던 아이처럼 세상과 만나지 못했다.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로 인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관은 이만희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이후 제작에 들어간 <천국의 사랑> 역시 촬영이 50%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제작정지 처분을 받았고, <포대령>이라는 영화는 제작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되고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에 실패한 <휴일>은 이만희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영화 만들기를 목숨처럼 여기던 이만희 감독이 1969년에 영화계를 떠나버린 데는 이러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쇠사슬을 끊어라> _ 구원과 용서의 메아리
그리고 2년 뒤, 이만희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온다.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는 영화에 대해 변화된 그의 태도를 반영하듯 좀더 유희적이며,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이만희 영화 중 예외적으로 주인공들 모두가 살아남아 유유히 석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 영화에서 그들이 가는 곳이 희망찬 내일이 아님이 분명할지라도 그들의 질주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70년대 이만희 영화의 예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사물인 <0시>(1972)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을 잡아넣은 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한 유괴범은 타고난 순수함으로 아들과 친구가 되고, 처벌을 면하게 된 뒤, 둘이 함께 서울역 광장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며 끝난다. 이 영화는 분명히 범법자이지만 순수한 유괴범은 악법으로 인해 범죄자의 너울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던 당시 사회에 대한 항변이며, 구원과 용서를 통해 우울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이만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구원과 용서”는 이만희 후기 영화의 대주제이다. <청녀>와 <태양을 닮은 소녀>, 그리고 유작인 <삼포가는 길>까지 이것은 세상과 병마에 지친 이만희의 역설적인 외침처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3일, <삼포가는 길>의 편집을 하던 중 이만희는 갑자기 쓰러진다. 이미 암으로 발전된 심각한 상태의 간경화도 문제였지만 급성 위출혈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늘 건장한 모습으로 작업현장을 지배했기에 그의 입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구도 그의 죽음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지 열흘 만인 4월13일, 이만희는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서양의 영화천재이며 서스펜스스릴러의 대가였던 앨프리드 히치콕은 죽기 전 프랑수아 트뤼포와 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세계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고,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누누이 스스로에게 다짐시키지만 아무래도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천재의 영역이 있는 법인가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버린 이만희 감독의 부재가 두고두고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