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최우수상
2006-05-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반(半) 허공에서 허공으로 탈주하는 호모루덴스

<왕의 남자> 이현경 작품비평 전문

<왕의 남자>의 서사장치는 ‘놀이’이다. 놀이의 본질은 반(半) 허공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 줄은 댄 채 허공에 떠있는 아슬아슬한 묘미와 쾌락을 제공해야 한다. <왕의 남자>는 놀 수밖에 없었고 놀고 싶었던 호모루덴스, 장생과 공길, 연산과 녹수의 짧은 놀이판을 복기하는 영화이다. 본래 장생과 공길, 연산과 녹수는 놀이의 짝이었다. 장생과 공길은 저잣거리 남사당패 공연의 짝이고, 연산과 녹수는 구중궁궐 내실에서 벌이는 은밀한 놀이의 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장생과 공길은 내관 처선에 의해 궁궐로 놀이판을 옮기게 되고, 장생-공길은 공연자로 연산-녹수는 관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첫 공연에서 무대와 객석은 호위 병사들에 의해 삼엄하게 분리되었고, 네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무한대로 벌어졌다. 그러나 왕이 웃자, 호위 병사의 창끝은 거둬지고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진다. 장생 일행이 궁에서 벌인 두 번째 공연에서 연산은 마당으로 내려와 공연자의 자리에 끼어든다. 황망히 고개를 조아린 장생에게 연산은 계속 놀기를 재촉하고, 여기서부터 장생-공길, 연산-녹수라는 짝의 공식은 흔들리게 된다. 놀이에서 소외된 녹수는 판을 깨기 위해 비방서를 조작하고, 장생-공길-연산 사이에는 새로운 구도의 애정 관계가 형성된다.

<왕의 남자>
<왕의 남자>

연산이 공길을 따로 불러 건네는 첫마디는 “놀자”이다. 녹수는 저고리를 풀고 치마를 들어올려 연산의 콤플렉스를 달래주었지만, 공길은 손가락인형과 그림자극으로 연산을 위로한다. 둘만의 놀이판에서 연산은 장생 대신 공길의 짝이 된다. 공길을 바라보는 연산의 눈길에 매혹된 자의 전율이 담기고, 연산의 그림자놀이를 구경하는 공길의 눈시울은 연민으로 젖어든다. 공길이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연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찍는 순간 사랑과 연민이 혼동되기 시작했지만, 결국 공길은 스스로 손목을 그어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정리한다. 피 흘리는 공길을 향해 연산은 “왜?”라는 외마디 질문밖에 던지지 못한다. 이유없이 그저 좋은 사랑을 이기기에 연민은 힘이 약하다. 술에 취한 공길의 등을 두드리며 장생이 “좋으냐, 뭐가 그렇게 좋으냐” 물었을 때, 공길은 “좋아, 그냥 다 좋아”라고 답한다.

규칙을 무시하면 놀이는 끝이 난다. 연산과 장생은 놀이와 현실 사이를 잇는 긴장의 줄을 끊어버리고 비극적 파토스를 분출한다는 면에서 같은 유형의 인물이다. 경극을 보던 연산이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선왕의 후궁들을 칼로 찔러버리는 순간은, 과잉된 현실이 놀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순간이다. 연산이 놀이에서 관객의 규칙을 어겼다면, 장생은 공연자의 규칙을 어겨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생이 봉사놀음의 봉 봉사가 아닌 진짜 맹인이 되어 줄 위에 올랐을 때, 그는 놀이로 현실을 덮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기 위해 줄에 오른 장생에게 줄 위는 더이상 반(半) 허공이 아닌 허공이 되어버린다. 그 허공에서 장생과 공길은 탈을 쓰지 않고 봉사로 분하지도 않은 채 ‘년’이 되고 ‘놈’이 되어 서로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장생과 공길은 현실의 금기에서 벗어나 제대로 한번 짝 맞추어 놀기 위해 가장 강력한 정념의 허방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 허방의 이름은 죽음이다.

장생과 공길은 무대에서 연산과 녹수는 객석에서 정사(情死)한다. 금기의 벽에 절망하고 내면의 상처에 고통받던 네 사람은 놀이를 통해 잠시 위로받았으나, 끝내 현실과 역사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실재계의 어둠 속으로 투신한 것이다. 놀고 싶었던 왕, 연산은 역사를 방기했고, 금지된 연인을 얻고 싶었던 광대, 장생은 역사에 무심했다. 그들은 땅도 하늘도 아닌 반(半) 허공에 머물다 허공으로 탈주해버린 인물들이다. 이들은 세상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지만 주체의 의지로 탈주하는 인물들이며, 역사가 아니라 놀이의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이 지점에서 <왕의 남자>는 전통적인 사극과 결별한다.

비밀과 거짓말, 사랑을 지키는 두 가지 방식

감독론 요지- 현실 세계의 틈새 통해 인간의 숙명 성찰하는 리안의 시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표면적 질서 안에 혼돈이 내재되어 있으며, 삶은 질서와 혼돈이 길항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로 구성된다. 리안 영화는 내재된 혼돈이 표면으로 표출되는 통로인 틈새가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탐사하고, 그 틈새를 봉합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우리의 곤혹스러운 노력을 그려낸다. 리안은 특히 자아와 가정에 드러나는 틈새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데, 자아와 가정은 친밀하고 익숙하지만 낯선(uncanny) 영역이다. 모호한 욕망과 씨름하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은 자아가 틈새를 봉합해서 다시 질서를 되찾는 과정이고, 그렇게 봉합된 자아들이 만나는 장소인 가정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또다시 필연적인 틈새가 벌어지는 영역이다. 가정에 드러난 틈새를 봉합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비밀과 거짓말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이런 방편마저 없다면 위험한 구멍들이 속수무책으로 공중에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아이스 스톰>

비밀은 겉모습이 실제와 다른 것이고 거짓말은 겉모습이 실제가 아닌 것이다. 리안 영화의 인물들이 비밀을 만들고 거짓말을 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라는 보편 가치이다. 그러나 리안은 발화되는 순간 결국 바람 소리(flatus vocis)에 불과해지는 ‘사랑’의 절대적 의미 탐구보다는 사랑이 부재하는 기호일 때의 현실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사랑의 의미를 길어낸다. 리안 영화에서 ‘사랑’은, 상처를 헤집는 고통의 의식을 치른 끝에 회귀한 지점에서 진부하지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의 가치로 재회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의 경계가 애매한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행위의 연속이다. 이런 우리의 삶처럼 리안 영화도 여러 층위에서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각도의 모색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간 숙명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리안은 혼돈이 드러나는 현실 세계의 틈새를 봉합하려는 우리의 시도와 고뇌를 냉철한 시선으로 담아내지만 도덕적 판단은 미루고 있다. 그건 불가해한 세계와 모호한 욕망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질서의 틈새를 부단히 뚫고 나오는 혼돈을 봉합하면서 살아야 하는 고단한 숙명을 지닌 인간에게 진실은 결코 단선적일 수 없다.

“평론도 재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우수상 수상자 이현경 인터뷰

“실제 정신연령은 서른살이라고 써주면 안 되겠나. (웃음) 운이 좋았던 것 같다”며 잠시 부끄러워하는 이현경(40)씨는 11살 난 소중한 딸, 이정민의 이름으로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겸손과 수줍음의 웃음과 달리 고려대 심리학 학부와 국문학 석사를 거쳐 지난해에는 같은 대학 영상문화학부의 박사과정을 수료한 재원이다. 지금은 항공대에서 학생들에게 영화에 대한 교양 과목을 강의하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워낙 우왕좌왕하는 편”이라고 너털웃음을 짓지만, 보내온 글을 보면 꼼꼼하고 성실하게 영화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는 훈련된 영화 글쟁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아직 구체적으로 잡진 않았지만 한국 멜로영화에 관한 걸 써볼까 고민 중”이라고 박사 논문 계획도 밝혔다.

-영화비평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예전부터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문학과 영화를 둘 다 좋아했다. 석사과정 들어갈 때는 영화과를 갈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일 학교에서 아는 사람들과 노는 게 익숙하고, 모르는 분야로 가는 게 걱정도 되고 해서 그냥 같은 학교 문학쪽으로 가게 됐다. 평론쪽에는 이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워낙 게을러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더 늦으면 힘들 것 같아서 올해 응모하게 됐다.

-리안에 관한 이론비평을 제출했다
=주제론이나 장르론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원래 리안을 좋아했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확실히 계기를 얻게 됐다. 내가 리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리안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건 뭔지 그런 걸 생각해보고 싶었다. 준비를 하다보니 글을 쓰기 쉬운 감독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쨌든 내 식으로 한번 마무리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글을 쓴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는 데는 한달쯤 걸렸다.

-그 밖에 어떤 영화적인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나.
=멜로영화 안에서의 남성, 공포영화 안에서의 여성 등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에는 <사생결단>을 흥미롭게 봤는데, 뽕짝 누아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편 본 정도지만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도 관심이 가고, 한국 사극영화도 요즘 공부하고 있다. 외국영화들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코언 형제, 우디 앨런, 마틴 스코시즈, 관금붕, 차이밍량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작품은 <분노의 주먹>.

-추구하는 평론의 방향이 있다면.
=평론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해야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이야기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매료되고 내가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남들이 또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내 감성이 분출되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글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도 그래야 재미있다. 물 흐르듯 쓰되 내용은 짜임새가 있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매거진T> 이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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